개인적으로, 9월 중순이 되면 한 번씩 꼭 앓아 눕는 것 같다. 재작년엔 주꾸미를 먹고 난 후에, 작년엔 순댓국을 먹고 난 후에, 그리고 올해엔 광어회를 먹고 난 후에 아팠다. 다이어리를 보면 매년 9월 중순 경에 한 번씩 앓아 눕는다는 걸 알 수 있는데, 가을의 저주 같은 것에 걸린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번엔 주말 내내 아팠고, 어제까지 푹 잤다. 아직도 다 나은 상태는 아니라 머리가 무겁다. 일요일이 절정이었는데, 누워 있으면 입에 고인 침에 이질감이 들고 조금만 움직여도 이불의 감촉이 피부로 전부 느껴졌다. 왼쪽이나 오른쪽 어디로 눕든 뇌가 흘러내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고, 솜이불을 덮어도 추웠다가 또 옷을 다 벗어도 더웠다가 하는 일들이 계속되었다.
지금은 맥박이 뛰는 게 머리로 느껴지는 것과, 하도 올려 대서 목 주변 근육이 아픈 걸 제외하고는 거의 다 나은 상태다. 오늘까지 쉬고 싶긴 하지만 마냥 누워 있을 순 없으니, 오늘은 크게 심각하지 않은 사연들을 살짝 들춰보는 수준으로 함께 살펴보자.
1. 유학 중 만난 외국인 남친과의 이별.
M양에게, 올해 초부터 알게 된 어느 친구가 있다고 해보자. 그 친구가 M양에게 묻는다.
"나, 대학에 가지 않은 게 후회가 돼. 그래서 내년에 수능을 볼까 생각 중이야. 내년 초부터 준비를 하면, 몇 점이나 맞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점수로 어느 대학까지 갈 수 있을까?"
M양은 뭐라고 대답해 줄 것인가?
공부에 대한 그 친구의 재능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기 전까지는 답해주기가 쉽지 않다. 또, 만약 그 친구가 3개월 내에 한 과목을 모두 끝낼 정도의 재능이 있다는 걸 알아도,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안 될 거라는 걸 알기에 몇 점을 받게 될 거라 예상하기도 어렵다.
사연 끄트머리에 있는 M양의 질문을 받은 내 입장이, 딱 저렇다는 걸 말해주고 싶다. M양은
- 서로가 노력하면 다시 잘 될 수 있는 관계인가요?
- 긍정적인 관계인가요? 아니면 가망이 없으니 서로를 위해 포기해야 하나요?
- 기회가 남은 거라면 놓치고 싶지 않은데, 제가 잡아도 되는 걸까요?
라는 질문들을 내게 했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뭐라고 답해주기가 어렵다. 다만, 내가 읽은 M양의 사연을 기반으로 앞으로 벌어질 가능성이 큰 시나리오를 적어보면, 그걸 읽고 M양이 생각해 보는 건 가능할 것 같다.
그가 휴가와 업무로 한국에 들어오는 까닭에, 둘이 다시 만나게 되는 건 전혀 어렵지 않는 일이라 나는 생각한다. M양이 사연을 보낸 이후 둘은 그의 휴가로 인해 한국에서 만났을 텐데, 그 시간동안 함께하며 다시 연인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가 아는 몇몇의 한국인 중 연인이었던 M양은 '연고 없는 곳에서 가장 친한 사람'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외국 어드벤테이지'가 적용될 수 있는 시간을 길지 않다. 길어봐야 반 년. 상대에게 한국이 익숙해지고, 또 M양과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 점점 둘은 서로의 단점들까지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난 M양이 외국에 나가있을 때 그와 사귀다 헤어진 게, 단순히 M양이 타지생활에 외롭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미안하지만, M양에겐 불만족과 자존심의 문제가 있다. M양은 "더더더더."를 외치는 편이고, 더불어 중요한 순간에 지지 않으려 자신이 관계를 끊거나 연락을 하지 않는다. M양은 그걸 다 타지생활에서의 문제로 여기지만, 난 그걸 M양이 가진 문제로 본다.
"그가 한국에 와서 사귀게 되면 참 행복해 질 것 같고, 또 저도 한국에선 바쁜 삶을 살고 있으니 의지하거나 투정부리지도 않을 것 같아요. 제 모습으로 돌아왔으니 외국에서처럼 징징거릴 일도 없을 거고, 그에게 더 잘해 줄 자신도 있어요."
M양의 그런 마음은, 그저 책을 구입하기 전의 착각과 비슷한 것이라고 여겼으면 한다. 무슨무슨 책을 읽고 나면 많은 걸 깨닫거나 그 분야에 통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할 수 있는데, 막상 읽고 나면 그건 책을 읽었다는 것일 뿐 눈에 띄게 엄청난 변화가 생기거나 혼자만 아는 엄청난 지식이 생기진 않는다. 이제 막 허브를 심은 화분에 물 한 번 주었다고 해서 당장 잎이 무성해지진 않는 것처럼 말이다.
때문에 난 저런 기대가, 또 다른 형태로 M양의 실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당장은 그가 한국에 돌아와 M양과 다시 사귀기만 하면 영원한 행복이 보장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겠지만, 사실 그런 일이 벌어져도 공짜 행복이 매일 M양에게 배달되진 않을 거란 얘기다. 손님과 생선은 3일이 지나면 냄새를 풍기기 시작한다는 말처럼, 재회의 기쁨과 반가움이 기한 없이 계속 되진 않을 것이다. 그런 시기가 오면 둘은 다시 갈등을 겪을 텐데, 그때 가서 또 M양이 차이기 싫어 먼저 그를 찬다거나, 싸운 뒤 자존심 때문에 연락을 끊어버리면 연이 끊어지는 것은 시간문제가 된다.
이런 모든 부분들을 고려해 내린 내 대답은,
"그저 익숙함과 기회라는 것 때문에 다시 만나는 건, 신중히 생각해 봐야 할 문제다."
라는 거다. M양은 한국에 돌아와 어쨌든 그 연애를 잊고 잘 살았는데, 그러다 그가 한국에 방문할 시간이 되자 다시 마음을 그쪽으로 기울였다. 게다가 거기엔 재회를 향한 M양이나 상대의 갈망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나아가 M양의 마음을 좀 냉정하게 말하자면 '될 것 같으면 해보고, 안 될 것 같으면 말겠다'는 건데, 이런 마음은 작은 갈등에도 뿌리 째 뽑혀나갈 수 있는 위험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기대를 내려놓은 채 서로를 더 알아가며 노력하겠다면 얘기는 달라지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단순히 재회가 모든 걸 해결해 주진 않을 거란 얘기를 해주고 싶다.
2. 절 좋아하던 고교 동창을 다시 만났는데요.
군대에 다녀온 남자라면 다 알고 있을 '훈련소의 법칙'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 훈련소 퇴소할 때 나중에 꼭 연락하자고 약속하지만, 연락하지 않는다.
라는 것입니다. 5주의 기본훈련을 마치고 나면 다들 친해지기 마련인데, 그 기간이 끝나고 서로 다른 부대들로 배치를 받게 되면, 눈물까지 흘려가며 꼭 보자고 약속합니다. 하지만 자대배치 이후 자대생활에 적응하고 나면 그 동기의 이름이 생각이 아예 생각이 안 나기도 하고, 자대생활만으로도 충분히 바쁘고 정신없기에 약속했던 것을 까맣게 잊기도 합니다. 심한 경우 '매일 보는 게 군인인데, 휴가를 나가서까지 내가 군인을 만나야 해?'하는 생각으로 그냥 넘겨버리기도 하고 말입니다.
학창시절 누군가 D양을 좋아한다는 고백을 했었다면, 그건 상대의 그 당시 감정이었다고 생각하길 권해주고 싶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지인은 '나에게 호감을 보였던 남자 리스트'를 만들어 가지고 다니며 누군가와 헤어지거나 외롭고 심심할 때마다 연락을 해보곤 하던데, 그건 내팽개친 땅이 금싸라기가 되어 있길 바라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다시 찾아다 개간을 하고 씨를 뿌리면 농사를 지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저 방치해 둔 그 땅이 수확을 기다리고 있는 과수원으로 변해있을 가능성은 없다는 얘깁니다.
"그 친구에게 있어서 저는 무슨 의미일까요? 또, 그가 고맙다고 말했던 부분들의 의미는?"
두 번째 질문부터 대답하자면, 그건 '예의상 한 말'이라고 생각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몇 년 동안 소식을 모르고 지내다가 만나게 되었을 땐, 누구라도 듣기 좋은 말을 쏟아내기 마련입니다. 특별히 둘 사이에 원한이 될 만한 일이 있었던 게 아니라면 말입니다. 그러니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 뒤 의미부여를 하시기보다는, D양 역시 그저 비슷한 이야기들을 해주시는 게 좋습니다. 상대에 대한 좋은 추억이나, 고마움 등에 대해서 말입니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친구'라는 겁니다. D양도 사회생활을 하고 있으니 아시겠지만, 대학 졸업 이후엔 예전처럼 친구와 늘 붙어 다니거나 매일 연락하기가 어렵지 않습니까? 가까운 친구일 경우엔 한 달에 한두 번, 그렇지 않으면 경조사나 동창회 등에서 보는 게 전부이고 말입니다. 여기서 보기엔 상대가 현재 D양에게 연락하지 않는 것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아래에서 이야기 하겠지만 당연히 그러지 말아야 하는 것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그러니 '옛 감정'을 찾아내려는 유적발굴에서는 그만 손 떼시길 권하고 싶습니다.
상대에겐 현재 여자친구가 있습니다. D양은
"헤어지면 좋겠지만 찢어놓을 생각을 하는 건 웃기고요."
"제가 또 만나자 하면 이 친구가 언제든 만날 것 같네요."
등의 이야기를 하시는데, 죄송하지만 그건 근거 없는 자신감에 가깝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달려든다면 그가 흔들릴 수도 있겠습니다만, D양이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은 남에게도 저지르지 말길 저는 권하고 싶습니다.
초등학생 때, 저와 처음으로 농구를 함께 했던 친구와 어느 날 연락이 닿는다면 저는 정말 반가울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만나 하루 종일 이야기를 나눌 것이고, 어떻게 살아왔나, 지금은 뭘 하며 살고 있나,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등에 대한 이야기로 밤을 지새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제 친구나 지인들을 모두 제치고 옛 시절로 돌아가 계속 그와만 시간을 보내진 않을 것입니다. 그와 함께 어울렸던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어울린 친구들이 있고, 그때의 그 친구를 생각하던 마음보다 더 강렬한 마음으로 생각하는 친구가 현재에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를 그 시절에 일시정지 시켜두었다가, 이제 플레이 버튼만 누르면 다시 시작되는 게 아니라는 걸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수 년 만에 다시 만난 반가움을, 여전한 호감과 착각해서도 곤란합니다. 앞일은 저 역시 모릅니다만, 인연의 끈을 다시 잡아당겨 본 건 이번 연락으로 충분하니, 더 당기려 애쓰진 마시길 권하고 싶습니다. 친구끼리 할 수 있는 명절인사, 새해인사, 생일축하 정도만 챙기셨으면 합니다.
이틀 동안 죽만 먹었는데, 어제 두 끼를 단호박죽으로 먹었더니 오늘 글이 너무 단호하게 써진 것 같다.(응?) 오늘 저녁엔 타락죽을 먹을 예정인데, 내일 매뉴얼이 어떨지 벌써부터 걱정된다. 다들 즐거운 화요일 보내시고, 아프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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