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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매뉴얼(연재완료)/솔로부대탈출매뉴얼(시즌5)

두 달 바짝 들이대다가 연락두절 된 썸남, 왜죠?

by 무한 2015. 9. 10.

지인 중 하나가 지방 생활을 하다가, 바(bar)에 빠진 적 있다. 김모양(이십대 중반으로 추측)이라는 여성분이 그곳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지인은 그녀에게 빠져 매일 출석하듯 바를 드나들었다.

 

김모양이 그 지역 유지들을 홀리고 있다는 건 지인도 알고 있었다. 김모양 때문에 이장과 최씨가 멱살잡이를 한 유명한 사건이 있었고, 지인이 갔을 때에도 검은 큰 차를 타고 온 사람이 있으면 김모양이 그 손님을 맞으러 갔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모양에게 빠지고 나니, 지인은 정신을 차리질 못했다. 지인은 '그녀는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술집에서 일하는 여자가 아니'라고 주장했으며, 자신에게는 속된말로 '빼먹을 것'도 없는데 호감이 아니라면 왜 그녀가 자신을 그리 인간적으로 대하겠냐고 내게 되물었다. 김모양이 지인에게 '바에서 파는 술이 비싸니 그걸 사먹지 말고 나가서 같이 맥주 한 잔 하자'고 했던 것, 그리고 자신이 바에 있는 상황에서 다른 손님이 와 가야할 때 진심으로 미안한 표정을 짓는 것 등을 증거로 내밀었다.

 

난 그게 '스뎅수저 구슬려 목걸이라도 하나 건지기' 작전이라 생각했지만, 지인에게 말하진 않았다. 실제로 그는 돈을 탈탈 털어 액세서리들을 선물하곤 결국 퇴장했다.

 

이렇듯 멀리서 볼 땐 그게 뭔지 분명히 알고 있던 것도, 가까이서 보면 헷갈리게 된다. 또 다른 지인이 있던 모 동호회엔 양다리 걸쳤던 것으로 유명한 남자회원이 있었는데, 동호회의 여자들은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에게 넘어갔다. 지인의 소개로 그 중 한 여성회원이 내게 사연을 보낸 적 있었는데, 그녀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요. 하지만 그 사람도 정착을 해서 누군가와는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며 살 거 아녜요. 제가 그 상대가 되고 싶어요. 그리고 그가 양다리를 걸쳤다고 소문났던 것도, 사실은 그게 아니라…."

 

라는 이야기를 했다. 역시 '남의 이야기'라면 한숨만 나올 일을, '본인의 이야기'로 여기게 되자 가능성과 합리화 할 증거만을 찾는 것이다. 이번 사연의 주인공인 P양은 다행히 아직 이 정도까진 아니지만, 점점 상대에게 빠져들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여기서 더 넘어가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오늘 함께 한 발짝 떨어져서 살펴보기로 하자.

 

 

1. 알아가다 보니 나쁜 애는 분명 아닌 것 같아서?

 

내가 꼬꼬마였을 때, 우리 집에 자주 방문하시던 부모님 친구 분이 계셨다. 부모님 친구 분 중 유일하게 옥살이를 하신 분인데, 죄목은 '사기'였다. 왜 몇몇 가정을 보면, 엄마가 엄청 싫어하는데 아빠는 친구사이니까 계속 만나는 그런 친구가 있지 않은가, 그 아저씨는 그런 친구였다.

 

난 부모님 친구 분 중 그 아저씨를 제일 좋아했다. 그 아저씨는 내게 칭찬을 할 때에도 구체적으로 칭찬을 해줬으며, 내게 관심을 가지고 필요한 게 없는지 까지를 물어봐 주곤 했다. 물론 이게 엄마의 환심을 사려는 작전이라는 걸 나도 알고 있었지만, 그게 싫지 않았으며 낚시를 하고 싶다는 내 말을 잊지 않고 나중에 릴낚싯대까지 선물해 주는 그 아저씨가 좋았다. 

 

그 아저씨를 보며,

 

'저렇게까지 사람을 대할 줄 알면, 누구라도 넘어갈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정말 날 위해주는 사람, 날 위해 어떤 일이든 기꺼이 나서줄 사람이란 것 같다는 신뢰가 들었다고 할까. 누가 사주면 모를까 가족끼리 외식하기엔 좀 부담되었던 메뉴도, 그 아저씨는 턱턱 잘 사주곤 했다. 부모님들 두 분이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면 그 아저씨는 경제력이 신용불량자 수준이었는데, 그런 와중에도 비싼 차를 끌고 다니며, 명품을 입고, 용돈과 선물을 나눠주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분이라 누군가에게 소개해줄 수 없지만, 누구든 그 아저씨를 만나 보면 '참 좋은 사람'이라고 여길 거라 난 생각한다. 사기 전과에 대해서도 그 아저씨는 오해 때문에 벌어진 해프닝이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었는데, 역시 아저씨의 말을 10분 정도만 듣고 있으면 그게 정말 오해 때문에 벌어진 해프닝이라고 대부분 믿게 될 것이다. 시계가 멋지다는 얘기를 하면 자기 시계를 풀어주려는 액션까지 막 취하는 까닭에, 계속 마주하다보면 나도 그렇게까지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에 빠지기도 한다. 아저씨에게 인감을 맡기거나 돈을 맡겼던 사람들이, 다들 고위직 고학력이며 바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왜 빠졌는지를, 겪어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여러 사연에 등장하는 '꾸러기', 즉 '선수'들도 위와 같은 방법을 쓴다. 남들이 당하고 난 결과를 보면 저걸 왜 당했나 싶을 테지만, 막상 만나 보면 상대가 한 명의 '사람'이며 선천적으로 나쁜 사람은 분명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다. 네 시간 걸려 공항까지 태워다 주는 모습을 보며 그게 그의 진심이라 생각하기도 하고, 전화통화를 하며 이쪽의 구구절절한 하소연까지 다 받아주고 감싸주는 모습에 그건 분명 애정인 것이라고 착각하게 되기도 한다. 때문에 처음엔 상대에 대해

 

'대놓고 끼부리네.'

'뭘 믿고 저렇게 근자감을 부리는 거지?'

'참 나. 눈에 빤히 보이는 얄팍한 수를 쓰네.'

 

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점점 만나다 보면

 

'얘가 내 얘기를 들어주고 날 이해해 주고 있잖아.'

'얜 적적한 내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존재야.'

'지금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달려와 줄 것 같은 사람, 바로 얘야.'

 

하며 넘어가 버리고 만다. 분명 끼부리고 있다는 걸 아는데 그게 밉거나 싫지 않고, 상대의 근자감이 오히려 귀엽게 보이며, 어쩌다 속 얘기라도 털어 놓게 되면 겉보기와 달리 진지하고 깊은 생각을 가지고 산다는 걸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것 역시 레퍼토리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긴 하지만, 이미 콩깍지가 씐 후라 이젠 상대가 "내 잘못들은 다 내 트라우마 때문에 생겼던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해도 믿게 된다. 믿는 것뿐만 아니라, 거기서 더 나아가 상대를 치료해주고 보듬어주고 싶다는 생각까지를 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다들 이렇기 때문에 꾸러기에게 빠지거나 휘둘리는 거지, 정말 사람 보는 눈이 없거나 바보 같아서 그러는 게 아니라는 얘기를 해주고 싶다. 멘탈이 단단하고 올곧기로 유명한 사람이라 해도, 외롭고, 심심하고, 고민 많고,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을 땐 꾸러기에게 빠질 수 있다. 건강한 사람도 면역력이 떨어졌을 땐 질병에 쉽게 걸릴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P양도 처음엔 제대로 상황파악을 했지만, 상대가 계속 받아주다 보니 기대게 되고, 그러다 보니 결국 상대에게 "너 보고 싶다." 등의 이야기까지 하게 된 거라 나는 생각한다.

 

 

2. 무한님은 왜 그렇게 단정지으시는 거죠?

 

나도 늘 사연을 다룰 때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신중히 판단을 하는데, P양의 사연은 빼박캔트(빼도 박도 못함)다. 상대가 하는 모든 행동이 꾸러기들이 사용하는 '팬클럽 모집'과 다른 게 하나도 없고, 대화 역시 9할이 장난이며, 밖에서 보면 그가 P양의 마음을 떠보고 이리저리 흔들어 대고 있다는 게 금방 보인다.

 

"심심하면 연락해~"로 시작하는 건 꾸러기들의 전형적인 레퍼토리다. '너와 가까워지고 싶다'며 다가온다기 보다는 '내가 너랑 놀아준다'는 개념으로 접근하는 거라고 할까. 그렇게 연락을 트고 난 후엔 뭐 좋아하냐, 뭐 먹고 싶냐, 어디 가고 싶냐 등의 이야기를 하며 즉각즉각 그것들을 들어주어 환심을 산다.

 

"호감이 없는 거라면 왜 그러는 거죠? 관심 없는 여자한테 그렇게 잘해 줄 필요 없는 거잖아요."

 

기본적인 상식으로 생각하자면 그런 의문이 드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꾸러기의 입장에서 보자면, 본인에게 20% 정도 호감을 가진 상대의 마음을 키워가는 게 재미있는 것이다. 한강에서 물고기 잡아봐야 어차피 먹지도 못 하지만, 그냥 손맛을 위해 잡는 그런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일종의 추격본능을 발휘하는 것이다. 잘 해주며 환심을 사고, 기대게 만든다. 그러면서 본인이 원래 드립을 즐기는 타입이라고 말하거나, 장난을 좋아하는 타입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밑밥을 깔아두면, 훗날 마음을 떠보다가 들키거나 상대가 불쾌해 해도 장난으로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초공사를 마친 후로는 이제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간다. 이즈음 가장 흔하게 등장하는 멘트는

 

"그럼 이긴 사람 소원 들어주기~"

"나는 남자친구로 어때? ㅎㅎ"

"나 자극하지 마. 너 덮칠 지도 몰라. ㅋ"

"너 남친 생기기 전까지만 내가 남친 해줄게. ㅋ"

"나 보고 싶어서 운 거야? ㅎㅎ"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나한테? ㅎ"

"고마우면 뽀뽀해주기."

"내가 남자를 가르쳐 줄게. 남자한텐 이렇게 하면 돼."

 

등이 있다. 역시 밖에서 보면 저런 멘트만 봐도 끼부리고 있다는 걸 바로 알 수 있지만, 그 상황에 빠져 있을 때에는 그게 썸 타는 와중에 살짝씩 호감을 표시하는 거라고 착각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자신의 속마음을 그대로 대답하거나, 상대의 장난에 넘어가 고해성사를 하기도 한다.

 

물론 이게 계속 몇 달씩 이어지고 그런 건 아니고, 저런 식으로 이쪽을 들었다 놨다 하다가

 

- 다른 이성과 노는 게 더 재미있어졌을 때.

- 이쪽의 마음을 다 확인해 흥미가 떨어졌을 때.

- 이쪽이 진지한 관계정립을 요구해 가볍게 놀기 어려워졌을 때.

 

등의 순간이 오면, 점점 성의 없는 대답과 연락두절로 자연히 등을 돌리곤 한다.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듯 누구를 소개해주겠다고 말하곤 지인에게 인계(응?)를 하는 경우도 있고 말이다.

 

P양이 겪었던 일들도 저 안에 고스란히 포함되어 있지 않은가? 사실 내가 이렇게 긴 설명을 하는 것도 P양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까봐 구구절절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 그가 P양에게 '남자들과 나는 다른 존재'라는 식으로 밑밥을 뿌리며 애먼 짓을 하려고 한 것만 봐도, 이건 더 고민할 가치가 없는 일이다.

 

남친이 생기기 전까지 무슨 남자를 가르쳐 준다는 둥, 연애를 가르쳐 준다는 둥 하며 휘두르려는 사람과는 멀리하면 멀리할수록 좋다는 얘기를 해주고 싶다. 그가 심심하다고 다시 찾아오거나, P양이 외롭다고 다시 손을 뻗을 경우 보다 심각한 상황에 처할 수 있으니, "그냥 친구로라도…."라며 죽음의 골짜기로 걸어 들어가진 말길 바란다.

 

 

오늘 사실 여행기 2부를 올리려고 하다, 중간에 진로를 바꾸어 매뉴얼을 적었다. 게다가 외부 연재에도 새 글을 하나 올리느라 시간이 늦었는데, 이 시간까지 먹은 거라곤 라면과 떡이 전부다. 오늘 수고한 나를 위해, 내일 먹으려 했던 치맥을 앞당겨 먹어야겠다. 치맥 먹으러 가야 하니 배웅글은 이쯤에서 줄이기로 하자. 이제 한 밤만 자면 불금이니, 다들 조금만 더 힘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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