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제이양. 제이양은 대단한 게 맞아.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대학에 다녔고, 전문적인 과정까지 밟은 뒤에, 이제는 미래가 보장되는 직장에 곧 입사할 거니까. 똑똑한 거 맞고, 노력 많이 한 거 맞고, 많지 않은 나이에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많은 것들을 만들어 둔 것 맞아.
그런데 그게, 남들에게도 과연 큰 의미인 걸까? 제이양을 폄하하려고 하는 얘기가 아니라, 제이양이 그런 스펙을 갖췄다고 해서 친구나 지인이나 동료들이 늘 제이양을 주인공으로 생각해야 할 필요는 없는 거잖아. 그 스펙 때문에 제이양을 대하는 것에 쩔쩔매거나, 어느 자리에서든 모두 제이양의 이야기를 경청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난 제이양이, 가끔은 스스로에 대해 그저 작고 작은 인간 중 하나일 뿐이라는 생각을 해보면 어떨까 싶어. 현재 제이양은 엄청난 부피의 자존감과 자신감으로 무장되어 있거든. 야망을 가지고 노력하는 삶을 사는 것에는 그게 동력으로 작용하겠지만, 대인관계서는 단점이 될 수도 있어. 자신이 노래를 잘 한다고 노래방 같이 갔을 때 마이크 놓지 않는 친구, 같이 게임을 하는데 자신이 더 잘 하니 대신 해주겠다며 계속 조이스틱을 빼앗아 가는 친구, 아는 게 많다고 무슨 이야기를 하든 논문 얘기를 하며 남의 주장을 묵살하는 친구, 뭐 이런 친구들과는 어울리고 싶지 않은 법이잖아.
어떤 사람이 수능을 봤는데 만점을 받았다고 해봐. 그래서 그는 그것에 엄청난 자부심을 가진 채 10년 째 계속 수능을 봐.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이 노력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고, 자신은 하루에 다섯 시간만 잠을 자며 공부에 투자하고 있다고 말하지. 본인은 그게 자랑스럽고 남들이 다 우러러 볼 정도의 성실함과 끈기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게 나나 제이양과 관련이 있나? 어떻게 보면 솔직히 웃기기까지 하잖아. 냉정하게 보자면 그는 그냥 만두 빨리 빚는 달인과 다를 게 없는 수능 달인일 뿐인 거니까. 그가 제이양에게 와서 자신이 저술한 공부법 책이 한국에서 제일 많이 팔렸다고 말한다고 해봐, 그럼 제이양은 엄청 대단한 사람을 만났구나 생각하며 그를 상석에 앉힌 채 모시고 싶어 할 거야? 아니잖아. 그가 자꾸 잘난 척 하며 말 자르고 끼어들려고 하면, 제이양도 그와 다시는 만나려 하지 않을 거잖아.
1. 고학력과 많은 지식 때문에 연애를 못 하는 걸까요?
제이양은 외국에 있는 까닭에 자꾸 "한국 남자들은 이런 것 같다.", "한국 남자들은 저런 것 같다."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내 생각엔 그게 꼭 국적이나 성별 때문에 그런 건 아닌 것 같아. 외국 남자들은 제이양에게 대시를 하기도 했다고 했는데, 난 거기에 '동양인에 대한 호기심'과 '외국인이기에 문화의 차이로 여겨주는 것' 등도 분명 작용했다고 보거든.
한국이라고 생각해 봐. 유학생으로 온 마이크(25세, 미국)와 얘기를 나누는데 그가 제 3세계와 인류애에 대해 이야기를 해. 그럼 나부터라도 그걸 흥미롭게 듣게 되거든. 그런데 윤만근(25세, 한국)씨가 제 3세계와 인류애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아무래도 낮술 같은 걸 마셨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기도 하지. 제이양은 자신이 '미국 스타일'에 더 가까우며 그들의 문화와 맞는다고 생각하는데, 글쎄 난….
여하튼 제이양의 생각이 맞다고 강하게 주장하고 싶은 거라면, 그렇다고 해뒀으면 해. 어차피 제이양은 외국인이랑 만날 생각 없고, 부모님의 조언도 있었으니 한국 사람과 만나고 연애할 거잖아. 그러니 바로 위의 이야기는 제이양의 다양한 인간관계를 훑어보고 난 뒤 내린 내 결론정도라고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 중요한 건 한국 남자들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는 부분이니까, 그 얘기를 해보자고.
내 생각에, 해답은 제이양이 다니는 한인교회의 교인 분이 해주셨다는 말에 있는 것 같아.
"제이양은 너무 아는 게 많아서 연애를 못 하는, 딱 그런 스타일이다."
저걸 문자 그대로만 보지 말고, 저 분이 왜 저런 이야기를 했을지를 곰곰이 생각해 봐. 제이양이 누군가에게 저런 이야기를 했다면, 상대의 어떤 점들을 보고 저런 이야기를 했을 것 같아? 내 경우는, 누군가 늘 아는 척을 하고 자기 말만 맞다고 하는 경우에 저런 평가를 내릴 것 같거든. 이런 내 짐작이, 제이양이 교회에서 사람들에게 보여줘 왔던 인상과도 맞아 떨어져. 교회에서 사람들과 수다를 떨다 결혼 얘기가 나왔을 때 제이양이 한 말을 봐봐.
ⓐ나는 가정을 꾸리고 싶고,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 공부도 할 만큼 했으니 커리어도 계속 이어가고 싶다.
ⓑ일찍 결혼해 아이를 낳으면, 아이가 대학을 갈 때 난 40대일 수 있다. 그 나이는 커리어를 이어가기 늦지 않은 나이다. 그런데 늦게 결혼해 아이를 낳으면 50대가 되고 그땐 에너지가 없을 것 같다.
ⓒ게다가 한국 중년 여성이 많이 시달리는 질병 중 하나의 원인이 늦은 출산 때문이라고 한다. 이건 내가 읽은 이러이러한 논문과 뉴스에도 나왔던 내용이다. 호르몬이 블라블라. 그러니 건강을 위해서도 일찍 결혼하는 게 낫다.
제이양의 희망사항을 논리적으로 기술한 것으로는 흠잡을 데 없는 얘기지. 그런데 연애나 결혼이 무슨 명령어 하나 집어넣어서 결과를 도출해 내는 게 아니잖아. 한국인 오빠 하나가 제이양과 친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을 때도 마찬가지야. 그가 같이 운동 경기 보러 가자고 했는데, 제이양은
"지금은 돈도 없고, 시간도 없고, 바빠서 못 가요."
라고 대답했잖아. 만약 반대로 저 말을 상대에게 들은 거라면, 제이양은 그 말에 대해 '정말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며 똑부러진다'고 생각할까, 아니면 '나에게 관심도 없고 그냥 자기 위주로만 생각하는구나'라고 생각할까?
제이양도 이제 이십대 꺾였잖아. 그럼 똘똘한 걸로 그저 칭찬받을 나이는 지난 거야. 어른이잖아. 힘이 센 사람은 자신이 힘이 세니 누굴 때릴 수도 있는 거고 반대로 누굴 지켜줄 수도 있는 건데, 제이양이 그동안 전자였다면 이젠 점점 후자로 변해가야 해. 그러기 위해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관광객의 마음으로 시작해봐. 관광객은 자신이 앞장서기 보다는 현지인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누군가에게 추천을 부탁하기도 하며, 작은 일 하나에 목숨 걸고 이기려 하거나 악착같이 더 많이 가지려 들지 않잖아. 그렇게 상대의 자리를 내어주기 시작하면, 제이양이 바라는 대로 상대와 친해지는 게 가능할 거야. 깊은 강은 소리 없이 흐른다는 걸 기억하며, 급하게 어필하려 하지 말고 천천히 만나가 봐.
2. 이 선배랑 잘 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세요.
안녕 W양. 위의 제이양 사연 읽고 내려온 거지? 내가 위에서는 필요에 의해 제이양의 안 좋은 모습만을 부각시켜 말하긴 했는데, 솔직히 좀 멋있는 부분도 있지 않아? 뭐랄까, 아이비리그로 간 이순신 장군의 느낌이잖아. 큰 칼 옆에 차고. 좋게 말하자면, 배짱이 두둑한 거지. 외국 남자들이랑은 잘 친해지는데 한국 남자들이랑은 안 친해진다, 한국 남자들이 이상한 것 같다, 뭐가 어떻든 이런 강단이 있잖아.
그래서 난 가능하다면, 둘 다 유학생이니 제이양과 W양을 만나게 해 반반 섞이게 하고 싶어. 불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W양은 제이양과 완전히 반대 지점에 있거든. 제이양이 천상천하 유아독존 스타일이라면, W양은 누가 옆에 없는 걸 못 견디는 스타일이지. 제이양이 철벽을 친다면 W양은 어장관리로 오해 받을 만큼 친철하기도 하고, 또 제이양이 다가오는 남자도 칼 같이 잘라버리는 타입이라면 W양은 가는 남자 계속 바라보며 어떻게 잡아야 하나 고민하는 타입이지.
내 얘기를 잠깐 할게. 스물 두세 살 즈음이었나, 그때부터 차가 있는 친구와 없는 친구가 갈리기 시작했어. 물론 다들 아빠 차를 끌고 나오는 경우가 많기는 했지만, 여하튼 차가 있는 친구와 어울리면 기동력이 생기니 그 친구를 주축으로 모이곤 했지. 그 중 A라는 친구가 있었어. A는 차가 없는 친구 중 하나야. 차는 없었지만, A는 사교성이 좋았기에 아는 이성도 많고, 누굴 만나도 기분 좋게 어울리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어. 물론 단점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이상하게도 '차 있는 친구'에 집착하며 자신의 필요에 따라 기사처럼 움직여 줄 친구를 가까이 한다는 거였어. B가 차를 잘 태워줄 땐 B와 어울리고, C가 차를 잘 태워주면 B와의 관계는 딱 잘라버리고 C와 어울렸어.
내가 왜 저 이야기를 꺼냈는지 좀 감이 오지? 내가 보기엔, W양과 내 친구 A사이에 비슷한 부분이 있단 말이야. A가 '지금 차를 잘 태워다 주는 친구'와 친하게 지낸다면, W양은 '지금 내 얘기를 들어주고 맞장구를 쳐주는 사람'과 친하게 지내. 때문에 그 이전까지 W양과 친하게 지내던 사람은 지붕만 쳐다보게 되는 거고, W양은 이성으로서의 감정 없이 수다 떨며 친하게 지낸 건데 왜 쟤가 오해를 하고 혼자 저러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 놓이지.
선배와 W양의 관계를 떠나, W양은 예전에도 한 번 그리고 이번에도 한 번 W양을 좋아하는 남자로부터 시달림을 당했잖아. 물론 당장 경찰에 신고하면 바로 처벌 받을 게 분명한 짓을 했던 예전 남자는, 그 남자가 백 번 잘못한 거지. 난 여기서 잘잘못을 말하고 싶은 게 아니라, '왜 갑작스레 집착을 하며 자기 혼자 오해한 거냐고 따지는 사례가 거듭해서 일어났나'를 한번 고민해 보자는 얘기를 하고 싶어. 내가 보기에 그건, W양이 외롭거나 심심할 때 이성과 대화하는 걸로 그 감정들을 해소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친해지면 상대가 썸으로 착각할 정도로 많은 연락을 주고받는 것, 또 그러다 상대에게 흥미를 잃거나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남처럼 변해버리는 것, 등이 문제가 된 것 같아. 굳이 내가 이 얘기까지 꺼내가며 말하는 건, 이게 달라지지 않으면 앞으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질 수 있기에 하는 얘기니까, 오해하지 말고 곰곰이 생각해 봤으면 좋겠어.
자 그럼 선배와의 얘기로 돌아와서. 선배와의 관계가 틀어진 것에도 역시 W양의 '의존하는 습관'이 큰 영향을 끼쳤어. 둘의 관계가 변한 걸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지.
ⓐ 둘은 그저 선후배로, 인사 정도 하는 사이였음.
ⓑ 그러다 선배가 W양에게 호감을 가짐.
ⓒ W양은 선배와 연락하며 점점 그에게 기대게 됨.
ⓓ 선배가 고백을 했지만 여러 사정이 있어 사귀는 걸 보류함.
ⓔ 갑자기 선배의 연락이 줄고 관심을 안 두는 것 같은 태도가 나타남.
ⓕ 당황한 W양은 "슬슬 제가 귀찮아 지는 거예요?" 라는 이야기까지 함.
(이렇게만 쓰면 군데군데 이가 빠진 느낌이 들긴 하는데, 어쩔 수 없어. 유학생들은 좁은 커뮤니티에 속해 있기에 누가 언제 한국에 들어오고 누가 어디로 잠깐 가고 하는 얘기를 하면 너무 빨리 정체가 드러나거든. 그래도 중요한 뼈대는 안 빼고 넣었으니까, 이해해줘.)
먼저 말을 걸고 먼저 고백을 하고 했던 건 선배인데, W양의 과도한 의존으로 인해 그는 마음이 식게 되었다고 나는 생각해. 처음에 자신이 생각했던 W양의 이미지와 지금 자신에게 본인이 귀찮냐고 물어보는 W양의 이미지가 완전히 달랐던 거지. 게다가 친해질수록 바라는 게 많아지고 점점 더 많은 부분을 기대려는 W양을 보면서, 사귀게 되면 '연애'가 아니라 '육아'를 하게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을 거야.
W양은 여기서 W양이 선배를 다시 잡았는데 안 잡힌다고 해도 더 잃을 게 없고, 또 안 잡고 넘어가서 후회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다며 선배를 잡으려 하잖아. 내 의견이 궁금한 거라면, 난 세 번 물어도 세 번 다 반대할 거라고 적어둘게. 지금 W양에게 필요한 건 그 사람이 아니야. W양의 사연을 보면, W양은 혼자 있는 시간은 그저 외로울 뿐인 거고, 누군가가 옆에 없는 삶은 별 의미가 없는 삶이며, 남자친구가 없기 때문에 의지 할 곳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거든.
이래버리면 계속 남의 차 얻어 타는 심정으로 오늘은 이 사람에게, 내일은 저 사람에게 기댈 수밖에 없어. 또, W양이 혼자서는 서지 못 하는 상태에서 연애를 해 버리면 상대가 조금만 흔들려도 그냥 무너질 수 있는 거고. 더군다나 현재 저 선배와의 관계에선 그도 이제 피곤함을 느낀 상태인데, 여기서 W양이 의지하겠다고 그를 잡는다면, 계속 애원만 할 뿐 기대지도 못 하는 상황에서 W양만 괴로워 할 가능성이 커. 사연 끄트머리에 W양은
"이번 달에는 저번 달과 달리, 저도 바쁘다 보니 시간도 빨리 가고 선배 생각도 안 났어요."
라고 적었잖아. 그거 봐. W양이 삶에 바짝 당겨 앉으면, 그가 그렇게 절실하게 잡고 싶은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도 금방 드러나고, 그가 없어서 W양이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는 게 아니라는 것도 드러나. 그런데 그러다가도 시간이 남아 다시 기댈 곳을 찾기 시작하면, 그와 멀어진 게 아쉬웠다가, 기분이 나빴다가, 슬펐다가 하잖아. 그래서 이것만 보며 W양은 어떻게든 그를 한 번 잡아봐야겠다고 생각하는 거고. 내 생각에 이건 좀 아닌 것 같아. 그러니까, 연락 없는 상대에게 연락해 귀찮냐고 묻거나 하는 건 그만 두고, 그가 가까워지고 싶어 했던 올해 초 W양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고. 알았지?
에너지 드링크로 인해 생활리듬이 변했는데, 그걸 다시 돌리려 하니 시차적응이 잘 안 되고 있다. 내 평생 다시는 M음료를 그렇게 무식하게 마시진 않을 걸 두 번 다짐한다. 내일 금요사연모음을 쓰려면 얼른 컨디션을 회복해야 하니, 오늘 배웅글은 여기서 줄이기로 하자. 다행히 내일은 비가 오지 않는다고 하니, 다들 불금 맞을 준비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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