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이별한 대원들이 글 한 편 읽어서 이별 후의 감정이 다 사라질 수 있다면, 저는 하루에 몇 편이라도 글을 쓰겠습니다. 사연을 주시는 분들은 자신이 얼른 괜찮아지길 바라며 매뉴얼을 부탁하시곤 하는데, 매뉴얼은 망망대해에서 표류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동쪽으로 가면 섬이 하나 있을 겁니다. 일단 그 섬에 내려서 정비하신 후,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시면 될 겁니다. 물과 먹을 것을 챙겨 남쪽으로 내려가면, 배를 댈 곳이 있을 겁니다. 이전에 이 지점에서 표류하신 분들이 대개 그 루트를 따라가 뭍에 내렸습니다."
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별과 함께 사라진 나침반을 대신해 길을 알려주는 것이지, 나침반 분실로 인한 표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때문에 매뉴얼을 읽고도 금방 섬이 안 보이자 다른 곳으로 방향을 튼 분도 있고, 조금 더 기다려 보겠다며 계속 그 자리에 있다가 폭풍우를 만난 분도 있습니다. 몇 번이나 그런 일을 반복하다
"이제 집에서도 저를 포기했어요. 전 이제 살 이유도 없어요."
라는 사연을 주시는 분들을 보면, 전 다시 또 담배에 불을 당기게 됩니다. 미세먼지가 좀 있어서 그렇긴 하지만 이 좋은 가을 날, 그것도 불금인 오늘을 온통 회색빛으로 느끼며 아무 기쁨도 없이 살아갈 필요는 없는 건데, 창문을 닫고 커튼을 친 채 저 깊은 곳으로만 침전하고 있는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뭐라도 하며 좀 움직여야 변하는 게 있는 건데, 가만히 앉아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눈물로 얼굴만 적시고 있는 모습이 가엾습니다.
아직 본론에 들어가지도 않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거, 몸살 같은 겁니다. 몸살에 걸려 누워 있을 땐, 입맛도 없고, 그냥 계속 잠만 자고 싶어지며, 남들의 웃음도 소음으로 들리고 누군가의 위로에 답하는 것마저 힘들지 않습니까? 몸이 아프니 온통 생각이 아픈 자신의 몸으로 집중하게 되고, 끄응끄응 하는 신음을 뱉지 않으면 축적된 고통이 빠져나가지 않아 곧 죽을 것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몸이 아플 때 저렇게 되는 것처럼, 마음이 아플 때에도 저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사연의 주인공인 K양은 이 상황이 영원히 지속되거나 뭘 하든 나을 수 없는 것이란 생각을 일단 접고, 찬찬히 아래의 글을 한 번 읽어 보시길 권합니다. K양이 제 가족이라고 생각하며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1. 과연 정말 그게 '신중하고 온순한 것'일까.
K양의 연애는 파국을 향해 치달아가는 중이었습니다. K양 역시
"데이트가 재미 없어진지는 오래 된 것 같습니다."
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다른 부분들을 제가 살펴봐도 둘은 늘 똑같이 반복되는 연애생활에 지쳐있었고, 서로에게 뜨겁거나 깊은 애정이 없는 미지근한 상태로 만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K양의 남자친구가 생각한 게 '결혼'입니다. 그가 생각하기엔 둘 모두 나이가 있는데 아직 결혼이 구체화 되지 않아 K양이 지친 것 같기도 했을 거고, 또 여러 부분에서 K양의 불만족이 터져 나오자 K양이 제일 원하는 것 같은 '결혼'을 이야기 하면 많은 것이 해결될 것 같기도 했을 겁니다.
만약 K양이 그의 청혼을 받아들였으면, 헬게이트가 열렸을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둘에게 부족한 건 애정과 협의와 공유와 관심이었는데, 덜컥 결혼을 해버리면 몇 달은 좋겠지만 얼마 가지 않아 그 문제가 다시 고개를 드는 것 아니겠습니까? 많은 갈등이 있는 친구에게 성대하게 생일파티 한 번 해준다고 해서 모든 감정이 해서되고 긍정적인 느낌만 남는 게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사연에 등장하는 K양의 남친은, 대화에 소극적이며 같이 협의해야 할 문제들에 대해 자꾸 회피만 하려 합니다. 다른 것으로 좀 각색해서 말하자면, 아래와 같은 형태로 대화를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K양 - 우리도 이번 겨울에 저런 곳 갈까?
남친 - 그래, 나중에 같이 가자.
K양 - 이거 지금 넣어야 나중에 찾을 수 있는데 등록할까?
남친 - 좀 더 알아보고 등록하자.
K양 - 지금 그렇게 하면 안 되잖아. 그거 말고 다른 거 하는 게 어때?
남친 - 시작한 거니까, 일단 해 보고 생각하자.
K양 - 그럼 차라리 시험이라도 준비해 보자. 시험 합격하면 보장되잖아.
남친 - 시험에 합격한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시험생각은 하지 말자.
좋게 보자면 신중하고 온순한 거지만, 나쁘게 보자면 겁이 많고 자신의 생각만을 고집하는 겁니다. 종종 큰 소리 내가며 싸워야만 고집하는 걸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데, 저런 수동적인 태도로도 거부하는 것도 '고집'이라고 봐야 합니다. 크게 모난 부분이 있는 대화가 아니라 아무렇지 않게 생각할 수 있는데, 결국 나중에 따져보면 남친은 전부 자기 생각대로만 결정하고 진행하지 않았습니까?
또, 그 결과는 어땠습니까?
"그가 그렇게 호언장담하던 일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결국 그것과 관련해서 그가 한 마지막 말은 '미안하다'였습니다."
이런 유형의 남자와 연애를 하다 헤어진 여성대원들은,
'그는 정말 착하고 온순한 사람인데, 욕심이나 열정이 없어서 이용만 당할 수 있다. 그래서 난 헤어진 지금도 그 사람이 걱정된다. 그도 그 나름대로 최선을 다 한 걸 텐데….'
라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좋게 보자면 그럴 수 있겠습니다만, K양이 제 가족이라면, 저는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며 결혼을 반대할 것입니다. 사람이 온순하고 착한 거랑, 준비와 대책이 없는 건 구별해서 봐야하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으로 협의하고 함께 만들어 가야 할 부분에 대해서는 전부 회피해 버리고, 그것 외에 다른 것들을 잘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하며 살 것인지에 대한 의사소통이 불가능한데, 프로포즈를 감동적으로 한다고 전부 해결되는 건 아니잖습니까.(실제로 감동적인 프로포즈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그래서 전 K양이 그와 잘 헤어졌다고 생각합니다.
2. K양은 무엇을 잘못했는가?
K양의 잘못을 굳이 하나하나 밝혀보자면, 먼저, 같이 살 인생을 함께 고민할 만큼 친해지지 못했다는 게 가장 큰 잘못인 것 같습니다. K양이 동생의 입장에서 상대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는 말했다면 해결되었을 것 같은 문제가 있습니다. 예컨대 '이직'이라고 하면,
"난 오빠가 거기 가는 게 너무 걱정 돼. 거기 가게 되면 이러이러한데, 그럼 난 그 일이 벌어졌을 때 너무 두려울 것 같아. 난 오빠를 믿고, 또 오빠가 그냥 마음 가는 대로 결정한 건 아니라고 생각해. 하지만 오빠도 지금 내가 염려하는 부분을 모르는 건 아니잖아. 또, 다른 여러 길도 남아 있잖아. 굳이 꼭 거길 가야 할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 그냥 가장 들어가기 쉬워서 택하는 건 아닌지도 한 번 고민해줘. 오빠만의 인생이 아니고 우리 인생이잖아."
라고 말하면 그의 마음이 움직였을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K양은 동생이 아닌 엄마, 또는 보호자의 입장에서
"거길 왜 가. 거기 가서 5년 더 있어봐야 뭐가 되는데. 거기서 자리를 잡는다고 해도 받는 대우라고는 고작 이러이러한 정도를 벗어나지 못 하잖아. 차라리 이러이러한 걸 해. 내가 말하는 걸 해서 2년 정도 지나고 나면 조건도 좋아지고 가능성도 올라가는데, 왜 그걸 안 하고 다른 걸 하려고 해. 제발 나중을 생각해서라도 다른 걸 하라고. 제발."
이라는 뉘앙스로 이야기를 했던 것 같습니다.
상대를 어느 정도 방치해뒀다가 탓을 하거나, 다짜고짜 '왜 그러는 거냐'라고 묻는 건 좋지 않습니다. 자동차는 계속해서 닦고 조이고 기름 치지 않아 녹이 슬어버리면 정비가 곤란해질 수 있지 않습니까? 그것처럼 둘의 관계도 계속해서 돌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말 너무 단순화 되어 그냥 밥 먹고 차 한 잔 한 뒤 집에 들어가는 게 당연한 관계가 되기 전에, 분위기를 환기하고 계속해서 생기가 돌게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그냥 두고 보며 뒷짐 지고 있다가,
'내가 너 그럴 줄 알았다.'
하면 안 된다는 얘깁니다. 그러기 전에 나서야 하고, 그러기 전에 손을 써야 하며, 그러기 전에 상대를 흔들어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게 해야 합니다.
"이후 상대가 먼저 데이트를 제안한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질 않네요."
그런 불만을 속에 품은 채 만나서 밥 먹고 차 마신 뒤 헤어지지만 말고, 만나서 얘기를 해야 합니다. 둘은 연인이니 거의 매일 통화하고 대화했을 텐데, 그럼 다른 얘기가 아닌 바로 저런 얘기를 했어야 하는 겁니다. 이게 안 된 까닭에, 작은 노력으로 수리가 가능했던 고장이 큰 고장으로 이어진 것 같습니다.
3. 이제 전 뭘 어떻게 해야 하나요?
K양이 평강공주, 남친이 온달이었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평강공주가 뒷짐을 지고 있었고, 온달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온달은 평강공주와의 관계가 점점 더 나빠지는 것이 '결혼 얘기'가 안 나와서 그러는 건 줄 알고 청혼을 하긴 했는데, 평강공주가 원한 건 청혼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K양의 '청혼 거절, 이별 선포'를 지지하는 또 다른 이유는, K양 남친이 생각하고 있는 결혼생활이라는 게, 그냥 지금까지 K양이 큰 문제를 일으키거나 못 견딜 잔소리를 하지 않고 있었으니 그대로 자신의 가정에 편입시키면 된다고 생각하는 듯 보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지방으로 내려가면 좀 편하게 살 수 있겠지. 거긴 집값이 서울처럼 살인적이지도 않고, 또 어릴 적 같이 지내던 친구와 지인들도 거기 있으니 날 도와줄 거야. 서울에 있을 때보다 훨씬 도움도 많이 받을 수 있고, 또 악착같이 벌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어. K양만 설득시키면 결혼과 그 이후의 삶은 문제가 안 될 거야.'
라고 생각하는 사람 같습니다. 뚜렷한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고, 뭔가가 안 될 경우에 대비한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말해서 죄송합니다만, 저건 나쁘게 말하면 '도피'에 가까운 겁니다.
또, 다시 말하지만, 그가 하는 저 주장을 따르지 않을 경우 둘은 합의를 할 수 없습니다. 그의 온순하고 착한 태도로 말하는 저 주장을 따르지 않으면 방법이 없는 겁니다. 어떤 남성대원은 전에,
"저를 정말 사랑한다면, 산에 들어가 농사짓고 둘이 살자고 해도 살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라고 하던데,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을 상대가 안 따른다고 해서 그걸 '사랑이 부족해서'라고 말하는 건, 이기적인 태도일 뿐입니다.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 여자를 데려다 왜 은둔생활을 시키려는 겁니까? 그리고 그렇게만 따질 것 같으면, 저는
"당신이 그간 잘 해왔고 확신한 신뢰를 갖게 만들었다면, 그녀가 안 따르겠습니까?"
라는 질문도 해보고 싶습니다. 행동이든 결과든 그 어떤 것으로든 상대에게 증명한 적 있다면, 상대는 당신에게 가진 신뢰를 기반으로 최소한 고민이라도 할 것입니다.
이거 갑자기 K양의 이야기를 하다가 이상한 쪽으로 넘어가고 있는데, 여하튼 좀 더 이야기를 하자면, K양의 경우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 둘은 헤어지기 전, 의무적으로 만나고 영혼 없는 대화를 나누는 커플이 되고 말았습니다. 먼저 만나자는 말을 꺼내거나 어딜 같이 가고 싶다는 얘기를 한 번 하지 않는 남자가 청혼을 합니다. 그러면서 결혼하면 지방에 내려가서 살자고 합니다. 재정상황을 털어 놓는데, 들어보니 '이보다 더 나쁠 순 없다' 수준입니다. 이런 와중에도 '예스'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그게 '정말 사랑하는 것'일까요.
정리하겠습니다. K양이 참고, 고민하고, 수 백 번 망설이기까지 하고 난 뒤에 결국 이별을 선포한 건, 둘의 목적지가 달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K양이 생각한 건 전진이었고, K양 남친이 생각한 건 후퇴였습니다. 그렇게 생각이 다른 두 사람이 같은 차를 타고 갈 순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만약 같은 차를 타고 가려면, 두 사람은 서로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며 협의를 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K양이 설득을 할 때 남친은 자신도 생각이 있다는 식의 대답만 했을 뿐이며, 직접 나서서 K양을 설득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뭐 방법이 없는 겁니다. 물론 지금이라도 어떻게 손을 쓴다면 방법은 있겠습니다만, 이미 K양도 이 관계를 거의 체념한 상태고, 저 역시 K양을 제 가족이라 생각하며 글을 쓴 까닭에, 결혼보다는 이별을 택한 것이 좋은, 그리고 옳은 선택이었다고 적어두고 싶습니다. 지금 이 시간 이후로는, 그를 걱정하거나 염려하는 것보다, K양 자신에 대해 더욱 신경을 쓰고 본인을 위해서 뭔가를 하시길 권해주고 싶습니다. 그와 사귀면서 K양은 가고 싶었지만 그가 의욕을 보이지 않아 가지 못 했던 곳에도 가보고, 연애 때문에 접어 두었던 인간관계나 K양의 취미에도 마음과 시간을 다시 좀 쏟으셨으면 합니다.
제 지인들 중 몇은, 카메라를 사기 전 제게 물어보곤 합니다. 카메라를 다뤄본 적 없는데 DSLR를 가지고 싶어 할 경우, 저는 최신 보급기종을 추천하곤 합니다. 물론 금전의 여유가 있어 상위기종으로 간다고 하면 말리진 않지만, 그게 아니라면 보급기로도 충분히 사진을 찍을 수 있으니 보급기를 권합니다. 지금 나오는 보급기들은, 내셔널지오그래픽의 사진가들이 수 년 전에 쓰던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성능을 가진 녀석들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이런 질문을 하는 지인들이 있습니다.
"이건 고급기종에 있는 이러이러한 기능이 없던데?"
"네가 추천해 준 건 고속동조가 안 된다고 하더라고."
"그 카메라에 옛날 렌즈들은 못 쓴다면서? 다 되는 거 사야하는 거 아냐?"
'안 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찾으면 저런 것들을 계속 찾게 됩니다. 때문에 이미 구입을 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카메라가 '불완전한 카메라'로 생각될 수 있고, 그러다 보면 애정마저 생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 카메라로 평생 남을 사진을 찍기도 하고, 공모전에 내 입상할 사진을 찍기도 하지 않습니까?
뜬금없이 카메라 얘기를 한 건, 저 위에서 제가 이야기 한 K양 남친이, 누군가에겐 또 둘도 없이 훌륭하고 괜찮은 사람으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집'과 '협의'라는 부분만 좀 손보면, 전원생활을 꿈꾸는 누군가에겐 훌륭한 남친, 남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K양을 가족이라 생각하며 K양의 편에서 이야기를 쓰다 보니, K양의 남친에 대해 너무 폄하를 한 것 같다는 생각에 이렇게 적어두기로 했습니다. 긴 글,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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