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연을 받아 글을 쓰며 생기는 문제 중 하나가, 매뉴얼을 올리고 나면 그 매뉴얼의 주제와 같은 사연들이 계속 도착한다는 것입니다. 이걸 운전에 비유하자면, 제가 뺑소니 관련 글을 올리고 난 후
"전 음주 뺑소니를 당했는데요."
"저는 대리기사 뺑소니 사연입니다."
"이런 사연 없죠? 사람이 안 타고 있을 때 뺑소니 당한 경우요."
라는 사연들만 계속 도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대리기사 뺑소니'를 다루고 나면 또 다른 뺑소니 사연이 오고, 저는 운전면허 시험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은데도 사연이 다 뺑소니 관련 사연이니 그 얘기를 하게 되고, 그러면 다양한 사례를 보러 들어오신 분은 뺑소니 얘기에 질리기도 하고…, 뭐 이런 악순환이 계속 이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나름 고른다고 골라서 올리고 있긴 한데, 이래버리면 또 자신의 사연이 다루어지지 않은 분들은 분노하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 경우, 어딘가에 사연을 올렸는데 그 사연이 다루어지지 않으면 그곳을 다시는 가고 싶어지지 않기도 합니다. 실제로 어느 라디오프로그램에 정성껏 사연을 써서 보냈는데 다뤄지지 않아 지금까지도 듣지 않고 있습니다. 그 프로그램 작가도 밉고, 디제이도 미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연을 보낸 후 저를 미워하거나 싫어하게 되신 분들이 늘어가는 것 같습니다. 어느 분은 자신의 사연이 무시당하는 걸 보며 제게 인간적으로 완전히 실망했다는 이야기를 하시기도 하고, 매뉴얼에서 다정하게 글을 쓰던 것과 달리 자신의 사연을 다루지 않았으니 가식적인 다정함일 뿐이라는 이야기도 하시던데, 그게 물리적 한계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약 제가 한 사람을 상대하는 거라면, A4 예닐곱 장의 사연을 읽고, 또 거기에 첨부된 카톡대화 오십 여장쯤을 읽고 난 뒤 '짧게라도 한 마디' 해드리는 게 가능합니다. 하지만 종종 사연을 받지 않는다는 공지까지 해가며 나름 부지런히 썼지만, 여전히 349통의 메일이 현재 제 메일함에 있습니다. 메일서비스를 순수한 노멀로그 계정으로 바꾼 까닭에 스팸메일 한 통 없는데도 349통 입니다.
이왕 말 나온 김에 하나 더 얘기하자면, 사연이 다뤄지고 나면 사연 주인공들이 고맙다고 말한다거나 아래에 있는 커피 한 잔이라도 쏘는 거 아니냐고, 그래서 보람도 있고 금전적인 도움도 되는 거 아니냐고 하시는 분들도 있던데. 댓글 보시면 아시겠지만 사연의 주인공이 고맙다고 말하는 사례는 일주일에 평균 1~2회 정도입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매뉴얼이 자신의 생각과 다르게 나왔다며 기분 나쁘다고 말하는 사례가 월등히 많습니다. 그리고 '밀어주기'라고 되어 있는 부분, 11월 누적 지원금 100원입니다. 돈을 벌고 싶으면 그 시간에 나가서 놀이터 철봉 밑을 뒤지는 게 훨씬 많이 벌 것입니다. 이처럼 제가 악당이라 그러는 거 아니고, 돈에 눈이 멀어 그러는 것도 절대 아니니, 너무 미워하진 마시길 좀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이거 서두가 너무 길어졌는데, 각설하고 매뉴얼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1. 구남친의 결혼전제 재회요청, 받아들여도 될까?
제 여동생이 그런 요청을 받았다면, 일단 저는 반대할 것입니다. 저는
"감성이 극에 달하는 저녁 열한 시. 그간 연락한 번 없다가, 이제야 네가 내 인생이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며 결혼 전제로 다시 만나보자고 하는 보낸 구남친의 카톡. 너는 정말 그거 하나 믿고 다시 시작해도 된다고 생각해?"
라는 질문을 가장 먼저 할 것이고, 그 다음으로는
"너희가 왜 헤어졌고, 연애 중 그는 어떤 사람이었으며, 마지막은 어땠는지도 돌아봐."
라는 말을 할 것입니다. 헤어져 외로운 와중에 사귀며 좋았던 기억들이 떠올라 뭉클할 순 있겠지만, 그런 마음으로 만난다고 해도 실제로 뭔가가 달라진 것은 아니기에, '우리가 왜 헤어졌었는지'를 다시 깨닫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 테니 말입니다.
제 여동생에게라면 저렇게 말하겠지만, L양에게는 뭐라고 얘기해야 좋을지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사연에 이별사유가 자세히 적힌 게 아니고
'구남친의 '결혼 생각이 없다'는 말이 가장 결정적이었기에 이별을….'
이라고만 적혀 있으니 말입니다.
다만 L양은 구남친과 이별하기 전부터, 다른 남자에게 고민을 털어 놓지 않았습니까? 그 후에는 고민을 들어주던 그 사람과 썸 비슷한 걸 탔고 말입니다. 때문에 여기서 보기엔 구남친과 L양의 유대감이 좀 약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연 자체도 구남친과의 재회보다는 썸남과의 발전에 더욱 포커스가 맞춰져 있는데, 이런 와중에 제가
"L양의 호감도가 구남친에게 47%, 썸남에게 51%라면 썸남에게 가세요."
라는 이야기를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최소한 80% 이상은 되어야 뭐가 돼도 될 텐데, 두 관계 다 그 기반이 연약해 보이니 말입니다.
썸남에 대한 L양의 질문에 저는,
"그건 썸이 아닌 것 같습니다."
라는 대답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건 '오피스 메이트'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메신저로 농담 주고받고, 회사 사람 몇몇 모인 조촐한 회식에서 장난치고, 뭐 그런 관계 말입니다. L양은 제게
"개인적으로 카톡도 그렇게 주고받는데 이게 다 그저 '오피스 메이트'라서 그런 거라고요?"
라고 물으실지 모르겠는데, 내용을 한 번 자세히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그저 장난과 드립이 난무할 뿐이며, L양이 호응을 잘 해주니 그가 더욱 필 받아서 드립을 치는 모양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좀 충격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L양이 계속 말을 거니까 그가 대답을 해주는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L양이 염색을 하든 말든 그는 사실 별 관심이 없는데 L양이 자꾸 머리 얘기하고, 10분에 톡 보냈다가 답이 없어 30분에 또 톡을 보내니 그가
"아 그래요 ㅋㅋ 요즘 그 색깔이 유행인가봐요. 앞으로 역삼동 ***라 불러줄게요."
식의 대답을 해주는 것에 가깝다는 얘깁니다.
이 매뉴얼이 '구남친'이라는 카드나 '썸남'이라는 카드를 전부 버리라는 얘기처럼 되어버렸기에, L양이 당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L양은 지금 물 들어온 것 같으니 노 저으려 했는데, 매뉴얼 내용은 물이 더 찼을 때 노를 저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제가 사연을 읽고 내린 결론은 이와 같기에, 이렇게 밖에 드릴 말씀이 없다는 걸 좀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L양은 썸남이 늘 마지막 대화에 답을 안 하는 게 고민이라고 하셨는데, 그건 L양이 '질문'으로 끝내면 해결 가능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딱 그 정도의 마음밖에 없는 상대에게 계속 말을 더 하게 만들어봐야 의미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L양은 이제 적은 나이가 아니라며 결혼을 전제로 만나려 한다고 밝혀주셨는데, 그렇다면 50~60% 말고, 80% 이상 호감이 가는 사람과 시작하시길 권합니다. 상대에게 정말 나에 대한 관심이 있는지를 현미경으로 관찰해야 할 정도면, 그건 분명 부족한 겁니다. 상대가 관심을 가진 게 분명한지만 살핀 뒤 관심 있는 거면 풍덩 뛰어들려고 준비하지 마시고, 좀 더 여유를 가지고 만나보시길 권합니다.
2. 동아리 선배 오빠가 있는데….
안녕 미경씨. 우선, 본인의 나이보다 어려 보이는 건 나쁜 게 아니야. 지금 미경씨는 대학생인데 사람들이 자꾸 고등학생으로 보니까 짜증이 날 수 있는데, 딱 3년만 지나도 미경씨는 본인이 동안이라는 사실에 감사하게 될 거야. 그러니까 그걸로 스트레스를 안 받아도 될 것 같아.
결론부터 말하자면, 즐겨. 즐기라고 말하면 음란마귀에 씌인 사람들은 자꾸 문란하게 즐기는 것만 떠올리던데, 그런 거 말고, 그냥 자주 만나고, 자주 밥 먹고, 자주 대화하고 그래.
"오빠, 학교 앞에 있는 식당 많이 가봤어요? 베스트 좀 추천해 주세요."
뭐 이런 식으로 그냥 들이대. 괜찮아. 저렇게 들이댄다고 죽는 거 아니야. 순수한 동아리 후배로서 선배와 친해지고 싶어 대화한다는데 누가 뭐라 그래. 또, 누가 뭐라고 쑥덕거리든 상관하지 마. 단언컨대 졸업 후 1년만 지나도 그 중 80%와는 영영 인연이 끊겨. 연결이 된다 해도 사회에 나가는 순간 관계가 다시 정렬되고 정비되니까, 신경 쓰지 마. 원하는 걸 해. 눈치 보지 말고.
그리고
'지금 내가 한 인사가 너무 예의 없이 보인 건 아닐까?'
하는 염려같은 것도 그냥 넣어둬. 그런 거 고민할 시간에 비타민C를 하나 더 챙겨먹는 게 나아. 나중이 되면 알겠지만 '선배'라는 게 무슨 어마어마한 어른들도 아니고, 사회에 나와서 보면 또래 꼬꼬마들이 서열 세워서 군대놀이 비슷하게 했다는 걸 알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선배를 무슨 고등학교 담임선생님 대하듯 대하지 말고, 또래 친척 오빠쯤으로 생각해 봐. 미경씨는 유독 그 부분을 엄격하게 생각하는 까닭에 지금 좀 얼어있단 말이야. '가신다고 하시더라고요, 주신다고 하시더라고' 뭐 이러면서 말이야.
지금 아주 좋아. 좋은데, 미경씨가 너무 상대를 조심스럽게 대하거든. 그러다 보니까 대화 자체가 스승의 날을 앞두고 선생님께 카톡 보내듯이 이루어지고 만단 말이야.
제자 -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 누구누구 입니다. 혹시 내일 학교에 계신가요?
선생님 - 어 그래, 누구누구구나. 잘 지냈니? 난 학교에 있지.
제자 - 네 ^^ 내일 찾아뵈려 하는데, 혹시 학교에 안 계실까봐 연락드렸어요.
선생님 - 평일하고 똑같이 학교에 있을 거야. 대학생활은 재미있고?
제자 - ㅎㅎ 내일 뵙고 말씀드릴게요.
선생님 - 그래 . 내일 보자. ^^
완전 똑같지? 미경씨가 선배랑 카톡한 거 절대 공개하지 말라고 해서 내가 새로 만든 건데, 저 대화랑 미경씨의 카톡대화랑 느낌이 거의 같지 않아? 이제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지? 저런 식의 대화가 참 예의바르긴 한데, 저기서 더 들어가질 못 한다는 단점이 있어. 격식을 갖추느라 둘 다 불편하고 딱딱한 옷 입은 채 마주앉은 느낌이거든. 보통 대학생들의 카톡대화를 보면 발랄하고 생기가 넘치는데, 미경씨 카톡을 보면 정좌를 튼 채 허리 곧게 세우곤 카톡하는 느낌이 든단 얘기야. 대화 마무리 할 땐 실제로 허리 숙여 인사까지 함께할 것 같은 그런 느낌.
반면 상대는 그런 느낌을 허물려고 시도를 많이 해.
"아 그래? 그거 내가 해줄 수 있지 ㅋㅋㅋ"
라며 힘을 좀 빼려고 하는데, 그걸 미경씨는 또
"정말요? 감사합니다."
라며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버리고 말아. 더불어 태도 자체가 이렇다 보니, '자체종결형 대화'를 하는 문제까지 같이 발생하고 말지.
"이번 주에 A가신다고 하셨죠? A 잘 다녀오시고 주말 잘 보내세요."
"오늘 1교시 수업 있어서 일찍 나왔는데 비오네요. 따뜻하게 입고 나가세요."
"네. 저는 괜찮아요."
저래버리면, 대화가 두세 줄로 끝나버리고 말잖아. 그러니까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말 그대로 '수다'를 떤다는 생각으로 대화를 해봐. "밥 먹었어요?" 정도만 보내도 돼. "식사 하셨어요? 저는 도서관 식당에서 먹었어요. 아직 식사 안 하셨으면 식사 맛있게 하세요."라고 보낼 필요 없다고. 알았지?
하나 더. 사연에서 느껴지는 미경씨를 보면, 데이트를 해도 미술관이나 음악회 같은 곳에서 데이트를 하려 할 것 같거든. 그러지 말고, 시작은 가볍게 해. 영화부터 봐. 영화부터 시작해도 괜찮아. 그래야 만나는 것에 부담감이나 거부감이 안 들어. 뭔가를 주고 싶으면, 그것 역시 아주 가벼운 바나나우유나 초콜릿 정도로 줘. 그걸로도 충분해. 소설이나 영화가 아니라 현실이라는 걸 잊지 마. 소설이나 영화 같은 것에서는 뭔가 특별해야 하고 더 있어보여야 하니까 LP판을 선물하거나 미술관을 가거나 그러는데, 꼭 그래야 하는 것 아니니까 힘을 좀 빼.
생각해 봐. 내가 지금 미경씨와 개인적으로 만나 공부 열심히 하라고 만년필을 주면 미경씨 그 만년필 쓸 거야? 이거 왠지, 쓴다고 할 것 같아서 불안하네. 여하튼 내 경우는 만년필보다 제트스트림 0.5미리 볼펜이 더 유용하고 편하거든. 그러니까 영화나 소설처럼 연애하려 하지 말고, 미경씨 본능이 시키는 대로, 불편하지 않는 대로 자연스럽게 시작해 봐. 하다가 어려우면 또 내게 사연 보내면 되니까 걱정마지 말고. 화이팅.
오늘처럼 하늘이 파랗고 구름이 예쁜 날은 일 년에 며칠 되지 않기에, 이쯤에서 매뉴얼을 마무리하고 얼른 사진을 찍으러 나가야 할 것 같다. 불금이 하루 앞으로 다가온 오늘, 다들 조금만 더 힘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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