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정씨, 난 오늘 '보통의 대한민국 이십대 중후반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될 것 같아. 이런 이야기를 하고 나면 꼭
"남자만 그러냐. 여자도 마찬가지다."
라는 이야기를 하는 분들이 있는데, 이 매뉴얼의 포커스가 '남자'에 대한 거라는 걸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 이건 매뉴얼이지 판결문이 아니잖아. 여기서 한바탕 성별대결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아래에서 내가 이야기 할 건 '그는 이러이러해서 그러했을 것'이란 이야기지, '그가 이러이러해서 그런 거니 이쪽이 다 이해해야 한다. 그는 잘못 없다'는 얘기가 아니라는 걸 미리 밝혀두고 싶어.
아, 그리고 말이 나와서 하는 얘긴데, 전에 내가 매뉴얼에 "내게는 친척 남동생이 둘 있다."라는 이야기를 한 적 있거든. 그랬더니 어느 분께서 "무한님은 친척 여동생이 있는 걸로 아는데 아니었나요? 그 친척 여동생에게 보내는 글도 쓰셨던 걸로 아는데…. 혼란스럽네요."라고 적어두셨더라고. 난 친척 남동생도 있고 친척 여동생도 있어. 친척 누나, 친척 형도 있고. 그런데 이걸 내가 글을 쓸 때마다 "내게는 네 명의 친척 누나와 네 명의 친척 형, 그리고 네 명의 친척 여동생과…."라고 쓸 수 없잖아. 그래서 그랬던 건데, 뭐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여하튼 매뉴얼 시작해 보자고. 출발!
1. 보통의 대한민국 이십대 중후반 남자.
이십대 초반까지는 다들 열의에 불타지. 군대를 다녀온 이후 이십대 중반에 접어들게 되었을 때, 뭐 그때까지도 아직은 '덤벼라 세상아' 모드이긴 해. 그런데 졸업에서 취업으로의 환승을 원하고 있거나, 갓 취직하고 난 후에는 생각이 많아지기 시작하거든.
부모님이 뒤를 봐주시는 까닭에 걱정할 일 없으면 얘기는 다를 수 있어. 그런데 오늘 할 이야기엔 '보통의'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잖아. 그건 즉, 그의 부모님은 노후걱정으로 바쁘시고, 그는 자신의 미래걱정으로 바쁘다는 얘기야. 사회생활 시작부터 반쯤 부모님을 부양해야 하는 경우도 있긴 한데, 역시나 오늘은 '보통의'라는 수식어를 달았으니까 그것 역시 제외할게.
음, 내가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보다, 은정씨가 오늘부터 밖에 나가서 혼자 산다고 생각해봐. 내가 좀 양보해서 집은 일단 해결되었다고 해줄게. 집 제외하고, 오로지 은정씨가 벌어 그 돈으로 은정씨가 먹고 사는 거야. 그러면 마냥 자유롭고 행복하기만 할까?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다른 거 안 하고 아주 단순히 생활만을 유지하는 것에도 꽤 많은 힘이 들 거야. 여행가고 싶을 때 여행 가고 갖고 싶은 물건 있을 때 구입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카드 값을 갚아나가느라 허덕이게 되겠지. 차를 산다면 차를 유지하는데 그렇게 많은 돈이 든다는 걸 뒤늦게야 깨달으며 허리가 휠 수 있고, 연애를 한다면 매달 모이는 돈 없이 다 데이트비용으로 지출되어버리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을 수도 있어.
오해하지 말고 들어봐. 내가 얘기하고 싶은 건 '남자들이 저렇게나 힘들다'는 게 아니야. 남자만 힘들겠어? 여자도 힘들지. 그런데 대개 여자들은 상대와 긴밀한 관계가 되었다고 생각하면 여러 이야기들을 털어 놓는 반면, 남자들은 좀 멍충이 같아서 말을 안 한단 말이야. 결혼은 이쪽이랑 하는 건데, 이 멍충이들은 저런 얘기를 이쪽에겐 전혀 내비치지 않으려 하고, 그저 친구 만나서 "하…, 씨바…. 죽겠다." 따위의 대화만 나누곤 해. 때문에 여자는 또 왜 집에 안 들어가냐고 하고, 남자는 중요한 할 얘기 있어서 그러는 거라고 하고, 여자는 빨리 들어가라고 하고, 뭐 그렇게 싸우기도 하지.
여하튼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결혼에 대한 얘기' 뭐 그런 걸 할 때는 저것까지를 좀 다 포함해서 생각해보자는 거야. 물론 대화도 해야지. 이게 좀 꺼내기 불편하고 유쾌하지만은 않은 부분이라고 해도, 무조건 꺼내서 대화를 해봐야 해. 상대가 말을 안 하면 주리라도 틀어서 어떤 상황인지를 공유해야 하는 거라고.
남자인 내가 보기에, 은정씨의 남친은 결혼 할 생각이 없었다기 보다는 아직 자신이 없었던 것 같아. 그런데 그 얘기는 안 하고 계속해서 다른 이유들이 있는 것처럼 돌려 말하기만 하거든. 또, 여기서 보기엔 은정씨 역시 결혼할 준비가 안 되어 있어. 아래에서 자세히 이야기 하겠지만, 아무튼 남친도 그걸 바로 옆에서 목격했겠지. 그러니까 필연적으로 둘의 이야기가 이별로 흐르고 만 거야.
그 외에 성격과 관련된 문제들도 있긴 한데, 난 이게 가장 큰 문제였다고 생각해. 이건 고등학교 1학년 학생에게 어느 기업에 취직할 건지 적어서 내라고 한 거랑 비슷한 거거든. 그가 머뭇거리거나 잘 모르겠다고 하면 "넌 나중에 취직 안 할 거냐?"라며 다그치기만 한 거랑 같은 거지.
2. 그가 본 은정씨는 어땠을까?
은정씨가 사연 도입부에 이렇게 적었잖아.
"아마 제가 이별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또 아무래도 남친이 잘못한 부분들에 대해 쓰다 보니 남친만 나쁜 사람인 것처럼 말했을 수 있습니다. 연애 중 남친이 저와 싸울 때면 꼭 저만 피해를 입은 것처럼 말한다는 지적을 한 적 있습니다. 이런 점들을 감안해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게 뭔 줄 알아? 저걸 감안하지 않고 읽어도 은정씨 남친이 답답해했을 지점들이 사연에 드러나 있어.
대학시절 옆 사람과 짝을 이루어 과제를 하게 되었다고 가정해보자고. 그런데 옆 사람이 과제를 할 의욕도 보이질 않고, 둘이 만나서 계획을 짤 때에도 수동적인 태도만 보여. 그런데 그러면서 과제점수는 잘 받길 원해. 이왕 가정하는 거니 좀 더 가정하자면, 과제가 1년짜리야. 1년 동안 그 짝과 호흡을 맞춰 준비한 뒤 2학기 말에 발표해야 하는데, 한 학기가 끝나도록 둘이 뭔가 준비한 건 없어. 그런 와중에 교수님이 짝을 바꿔도 된다고 해. 은정씨 같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할 것 같아?
그가 봤을 때, 둘의 연애에서 은정씨는 위의 이야기에 나오는 '짝'과 같았던 것 같아. 그가 다분히도 현실적이었기에 더욱 은정씨를 들볶았다는 문제가 있긴 한데, 사실 그가 은정씨에게 말했던 것들은 '지적질'이라기보다는 가만히 있지 말고 움직이자는 거였거든. 두 사람이 졸업을 앞둔 취준생이라고 한다면, 은정씨는 상대가 기념일을 챙기고 선물을 주길 바랐지만, 상대는 취업정보와 대외활동 정보 등을 챙겨준 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그는 은정씨에 대한 확신을 잃어갔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 물론 취업이라는 게 본인이 원한다고 그냥 바로 턱턱 되는 게 아니니 은정씨에겐 그 시간이 슬럼프였겠지. 다정하고 따뜻한 남자라면 그런 은정씨를 보며 토닥토닥 해주고 좀 늦어도 괜찮다고 말해줬을 거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은정씨의 남친은 냉철한 사람이었고, 스파르타식으로 은정씨을 들볶기 시작했지. 이거 또 내가 습관적으로 사연의 제보자인 은정씨의 입장이 되려 하고 있는데, 이걸 잠시 접어두고 남친 입장에서만 보자고.
여친이 취직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으며 쉬고 있어. 잘 씻지도 않고 그저 TV를 보며 하루하루를 보내. 그런데 그런 와중에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거야. 여친에 대해 '적극성이 떨어지며 게으르다'고 생각하는 중이니, 아직 결혼 생각이 없다는 식의 대답을 해. 그러자 여친은 더욱 다급해져서는 계속 사랑이나 결혼을 확인하려 해. 이래버리니 남자는 결혼을 하게 되면 여친의 인생까지를 떠맡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만 거야.
"헤어지기 얼마 전부터는 결혼에 대한 문제로 계속 다퉜습니다. 남친은 결혼에 회의적이라는 이야기를 했고, 저는 저를 사랑한다면 그럴 수 없는 거라고 말하며 서로 상처 주는 말만 했습니다."
은정씨와 남친은 '이별 유예 기간'을 갖기로 했는데, 그 기간 중 은정씨는 거의 모든 면에서 변화하려 노력을 했더라고. 고생한 건 알겠어. 그런데 그러면서 은정씨는 조건부의 질문을 계속 했잖아. "네가 원하는 모습으로 내가 다 하면 다시 기회가 주어지는 거냐."라고 말이야. 남친이 보기에 그건 남친을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은정씨 자신을 위해서 하는 일인데, 은정씨는 계속 그것에 대한 보상을 말하는 거야. 이러니 "그건 너에게 좋은 일인데 왜 날 위해 그런 노력들을 해주고 있는 것처럼 말하냐."라고 말했지. 그럼 또 은정씨는 그 말에 서운해 하고 상처받아 표류하고….
언젠가 내 지인 하나가, 자신이 살 왕창 빼면 뭘 해줄 거냐고 내게 묻더라고. 그래서 칭찬 해주겠다고 했지. 지인은 무슨 양복 한 벌을 맞춰준다거나 하는 대답을 기대하고 있던데,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건 그냥 그가 정상체중을 찾는 일일 뿐이잖아. 그가 만약 내게 "네가 뭔갈 해주지 않는다면 나도 더는 노력하지 않겠다."라는 말을 했다면, 난 "그러든지."라고 대답했을 거야. 밖에서 봤을 땐 이렇게까지도 보일 수 있다는 걸, 은정씨가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봤으면 좋겠어.
3. 여자문제와 이별 후의 연락.
자, 소제목 2번까지는 연애 중 은정씨가 상대에게 어떻게 보였을지, 그리고 둘의 연애는 왜 파국으로 치달았는지에 대한 이야기야. 그리고 이번 소제목 3번에서는, 연애 중반 이후 오만해진 상대가 벌인 잘못들과 이별 후 보이는 모습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까 해.
현재의 모습이 은정씨의 한계이며 더는 나아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상대는, 다른 사람에게로 눈을 돌렸지. 은정씨는
"평소 그의 행실이나 제가 아는 그의 성격 상, 쓰레기 같은 짓은 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며 믿었습니다."
라고 했는데, 사람 모르는 거잖아. 그가 은정씨에게 여러 가지 지적을 할 땐 늘 진취적이며 바르다고 할 수 있는 말을 하긴 했지만, 그런 말을 했다고 해서 그가 완벽한 사람인 게 아니잖아.
내가 보기엔, 오히려 그가 자신의 여친에 대해 한심하다 생각하며 불만을 가졌기에, 사고를 칠 확률이 더 높아 보여. '네가 계속 이런 상태라면 너랑 결혼 못 할 것 같다'고 말할 정도면, 일단
'너랑 사귀긴 내가 아깝다.'
라는 마음이 싹을 틔워 줄기까지 뻗었다고 봐야 하거든.
그리고 은정씨가 계속 남친에게 쩔쩔매니까, 그는 그런 은정씨에게 더욱 모진 말을 하고 낙심하게 만드는 것에서 약간의 희열을 느꼈던 것 같아. 그가 은정씨에게 하는 말은 계속 그 강도가 심해지거든. 욕설이 섞이지 않은 정중한 말이지만, 그런 말이 더욱 가슴을 후벼 팔 때까 있잖아. 사랑하는 사람에게 "너와의 미래엔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라는 말을 들으면 욕을 들었을 때와는 또 다르게 무너지는 것처럼 말이야.
여하튼 이건, 상대에게 강하고 단호하게 말하는 게 답이야. 아무 미련이나 눈물도 내보이지 말고, "그래, 그게 네 선택이라면, 그냥 내린 결정은 아닐 테니 존중하겠다. 다만, 더욱 비참한 마지막을 겪은 인연으로 기억되지 않게, 이렇게 계속 연락하며 불러내는 거 안 해줬으면 좋겠다."라고 말 할 필요가 있어.
"저, 다시 연락 하지 말아달라고 얘기했는데요."
은정씨는 '혹시 우리 이렇게 다시 만나는 거냐, 그게 아니라면 다시 연락하지 마라.'라고 말 한 거잖아. '다시 만날 거 아니라면'이라는 조건을 빼고 말하라고. 그는 은정씨가 저렇게 말해도 다시 전화해서 나오라고 하면 나올 거 알기에 계속 찔러대잖아. 더불어 은정씨가 큰 결심을 하곤 연락하지 말라고 해도 '또 시작이네.'하는 표정으로 이제 연락 안 할 거라는 협박이나 해대고 말이야.
충격과 공포의 이야기겠지만, 이별통보를 해 놓고 저렇게 옛집 마실가듯 찾아가서 식지 않은 상대의 감정을 확인하는 거, 좀 악랄한 형태로서의 재미가 있을 수 있는 일이거든. 내가 본 사례 중 가장 끔찍한 건, 채팅으로 만난 이성을 완전히 자신에게 빠지도록 만들어 놓고, 계속해서 여지만 남기면서 밀어낸 사례가 있어. 상대는 그걸 희망이라 생각하며 계속해서 더욱 집착하게 되는데, 그럼 이쪽에선 상대에게 스토커로 신고하겠다고 하면서도 전화 오는 거 다 받고 차단도 하지 않는 거야. 전화 오면 받아서 한 시간 넘게 대체 왜 그러냐고, 나랑 사귀고 싶은 거냐고, 난 네가 싫은데 이런 내 마음을 네가 바꿀 수 있냐고, 뭐 그런 얘기를 하며 괴롭히는 거야.
그러면서 주변에는 스토커 때문에 힘들다고 말하며 으쓱해 하고, 전화가 안 오면 그땐 "그래 잘 생각했다. 너도 이제 나 스토킹 하는 거 그만하고 좋은 사람 만나서 잘 살아라."라는 이야기까지 하기도 하더라고. 그 말에 다시 상대가 연락을 해오면 또 여지를 남겼다가, 밀어냈다가 하면서 말이야. 난 은정씨가 이런 상황까지는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다음에 또 연락이 오면, 상대에게
"너에게 난, 네가 발로 차고 밀어내도 다시 오라고 하면 꼬리 흔들며 오는 강아지 같은 존재냐. 갑자기 생각났다며 연락해서 만나자고 한 뒤, 소개팅 했냐, 남자친구 생겼냐, 물어대는 건 새로 생긴 네 취미냐. 너에게선 나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도 보이질 않는다. 넌 나에 대한 결점은 잘 보면서 너에 대한 결점은 못 본 것 같다. 내가 너처럼 너에게 지적을 하며 동시에 다른 남자와 연락을 주고받고, 헤어지자고 한 뒤 '이렇게 만났다고 우리가 다시 사귀는 건 아니'라고 해댄다면, 견딜 수 있을 것 같냐. 넌 네가 대단하고 완벽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지금 내가 보는 넌 그냥 오만하고 이기적인 인간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그런 너라는 사람을 그렇게까지 마음 다해 좋아했던 사람이 누군지를 생각해봐라. 너에 대한 내 마음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때, 네가 정말 인간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실수를 했다는 걸 처절히 깨닫길 바란다."
라고 말해버려. 아프겠지만, 그에게도 큰 도움이 될 거야. 자꾸 연락해서 불러낸 뒤, 헤어진 지금도 갑질하려는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좋은 방법이기도 하고 말이야. 이건 못 쓰게 되어버린 관계니까, 아까워하는 건 그만하고, 버리자고.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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