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연애매뉴얼(연재완료)/솔로부대탈출매뉴얼(시즌5)

크리스마스 특집 묵은 연애사연 정리 1부

by 무한 2015. 12. 24.

계속 사연이 밀리다 보니, 제가 압박감을 느끼며 답답한 것도 답답한 거지만, 타이밍을 놓치는 사례들이 늘어갑니다.

 

"이번 주 토요일에 마지막으로 만나기로 했어요. 꼭 좀 도와주세요."

 

라는 사연을 다 읽고 매뉴얼을 쓰려고 보니…, 그게 지난 달 사연입니다. 가끔 댓글난을 보면

 

"제 사연이 이제야 다뤄졌네요. 참 제가 저때는 왜 그랬는지…. 지금은 좋은 사람 만나서 잘 지내고 있어요. 다 지난 일이긴 하지만, 여하튼 사연 다뤄주셔서 감사해요. 수고하셨어요."

 

라는 댓글이 달리지 않습니까? 댓글난엔 그런 댓글이 달리고, 또 제 메일함엔

 

"매뉴얼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 상황이 좀 바뀌었거든요. 글 쓰시느라 수고하셨을 텐데, 지금 중요한 건 현재 상황이니 이걸 좀 봐주시기 바랍니다. 최근 카톡도 같이 첨부합니다."

 

라는 메일이 도착하곤 합니다. 그래서 전 아예 얼마간 사연 접수를 안 한다는 공지를 하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또

 

"지금 사연을 안 받으신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제 상황이 급해서…."

 

라는 메일들이 날아듭니다. 그래도 저도 참 어떻게 하는 게 잘 하는 건지 고민할 때가 있는데, 가끔 한 번씩 '굵고 짧게' 요점만 짚고 넘어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준비해 봤습니다. 한 사연 당 서너 문단으로 끝내는 '묵은 연애사연 정리' 시작해 보겠습니다.

 

 

1. 무결점 남친과 헤어졌어요. 삶의 의욕이 없어요.

 

한용운 시인의 <복종>이라는 시에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라는 문장이 나오지 않습니까? K양 남친이 바로 저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K양 구남친이 정말 K양을 위해서 그렇게까지 헌신했다기보다는, 그게 그의 행복이었기에 헌신했다고 생각합니다.

 

K양 구남친의 헌신은 맹목적이었습니다. 그는 무조건 '을'의 자세만을 취했으며, K양을 기쁘게 해주는 것만이 자신의 사명인 듯 행동했고, K양이 말하는 건 모든 다 그대로 하려 자신의 처지도 돌보지 않은 채 헌신했습니다. 때문에 K양은 그런 사람이 또 없을 것이며 아무에게도 열지 않았던 자신의 마음을 그에게만 열었던 것이라 하셨는데, 이런 말씀 드리긴 좀 조심스럽지만, 다른 한 편으론 K양이 그의 헌신을 즐겼으며 그가 K양의 지시에 무조건 복종하니 그저 '무결점'이라고 생각했던 건 아닌지도 생각해 보시길 권하고 싶습니다.

 

철저히 이기적인 면을 가진 경우 문제가 되듯, 반대로 철저히 이타적인 면을 가진 경우도 문제가 됩니다. 그리고 이타적인 모습을 많이 지닌 사람은 누군가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하거나 이타적인 행동을 당연시 여기는 일을 겪는 까닭에, 그 맹목적 헌신에 유효기간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뭔가 아니다 싶거나 이제 더는 복종하고 싶지 않을 경우, 상상도 못 했던 차가운 모습을 보이며 등을 돌려버리는 겁니다.

 

그러고는 잔인하게 느껴지는 말들을 쏟아 부으며, 한편으론 자신이 복종할 새로운 상대를 찾곤 합니다. 그렇게 헌신하던 사람이 뒤늦게 뭔가를 깨우친 듯 "난 널 사랑한 적 없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있고 말입니다.(믿기 어렵겠지만 저 말이 사실일 수 있습니다. 그는 K양을 사랑하기보다는 자신이 헌신하고 있다는 그 행위 자체를 사랑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 또 없을 겁니다…."라며 상대의 헌신을 그리워만 하진 마시고, 지금은 다른 사람에게 헌신하고 있는 상대를 그만 내려놓으시길 권합니다.

 

 

2. 남친의 부실한 행정처리 때문에 힘들어요.

 

그럴 땐 헤어지면 편해집니다, 라는 건 농담이고. 다수의 여성대원들에게 연애는 '육아 예행연습'이 될 수 있습니다. 원시시대부터 사냥감을 쫓아야 했던 남성은 주변을 돌보지 않은 채 사냥감을 쫓는 일에만 매달리는 습관이 박혔고, 그래서 화장실에서 볼일 보며 담배 피우는 걸 제외한 다른 멀티태스킹엔 약해지게 되었습니다. 믿기 어려우시면 남친에게 PC게임을 하나 플레이 시킨 채 3분만 통화를 해보시기 바랍니다. 중독성 강한 게임이 아니라 그냥 윈도우즈 기본 게임인 지뢰찾기나 카드놀이도 괜찮습니다. 남친의 말수가 현저히 줄어들며 "어? 뭐? 어. 어?"라는 멘트가 나오는 걸 발견하실 수 있을 겁니다.

 

목욕탕 여탕의 수건은 줄어들지만 남탕의 수건은 늘어난다, 라는 우스개가 아무 근거 없이 만들어 진 건 아닐 겁니다. 남자들은 집에서 가져온 수건마저도 목욕탕에 놓고 가는 일을 벌인다며 저런 우스개가 만들어지지 않았습니까? 건망증이 있다거나 그저 귀찮아서가 아닌, 설명하기 힘든 이유들로 그런 일들을 벌일 수 있습니다. 모든 남자가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돌봐주는 사람이 있어 모든 걸 위임한 채 살아왔거나 자신이 알아서 챙기지 않아도 나중에 대신 책임져주는 사람이 있는 경우 그 정도는 저 심해질 수 있습니다.

 

머리가 좋고 공감능력이 뛰어나고 논리적이고 뭐 그런 거랑 관련 없이, 자신의 통장에서 매월 얼마씩 빠져나가도 그냥 모를 수 있습니다. 최신 스마트폰 기종에 대해선 빠삭하게 알아도 자신의 지난 달 통신요금이 얼마였는지 모를 수 있고, 외국 축구 선수 이름은 줄줄 외우고 있으면서 자신이 가입한 보험 이름이 뭔지 모를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직구 방법 등을 연구해가며 뭔가 엄청 계산적으로 아끼며 사는 것 같은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제때 내야할 걸 안 내서 연체료 물거나 벌금으로 엄청난 돈 깨지게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완전한 해결은 불가능 할 거라 저는 생각합니다. 사실 H양 입장에선 이게 대단한 걸 바라며 하는 것도 아니고 곤란한 일 안 생기게 당연히 해야 하는 것들 해 달라고 말하는 건데, 하다면 괜히 잔소리 하는 것 같고 남친 다그치는 것 같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 다 지나가고 난 뒤 남친이 안 한 것들 뒤처리를 대신 하지 마시고, 요즘 좋은 캘린더 앱 들도 많으니 거기에 '해야 할 일'을 적어 공유하시길 권합니다. 알람 기능을 사용하시면, H양이 남친에게 그때그때 계속 뭐 하라고 압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중요한 일이라면 '오늘 꼭 해야 하는 일'이라는 리스트 만들어 상대에게 전송해 주셔도 좋습니다.

 

 

3. SNS를 통해 연락해 온 여자애가 있는데요.

 

A군을 여린마음동호회 간부로 임명합니다. 이렇게까지 걱정을 많이 하는 사람을 보는 건 오랜만이라, 여린마음 동호회 회장으로서 참 반갑습니다. A군 혹시 버스 탈 때에도 참 많은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어느 시점에 손을 들어야 하나, 그냥 가만히 있으면 저 기사님이 알아서 세워주시려나, 아니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으니 몇 발자국 앞으로 나가는 시늉을 해야 하나, 뭐 이런 생각들 말입니다. 그러고선 버스가 저 멀리 보이면 서둘러 교통카드를 찾으며 미리 교통카드 찍을 준비를 하지 않습니까? 여하튼 반갑습니다.

 

이건 뭐, 제가 더 보탤 말이 없는 관계이긴 합니다. 상대가 먼저 A군에게 연락을 했고, 현재 선톡을 보내주기도 하며, A군이 '만나자고 말 할 타이밍'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것과 달리 실제로 그냥 날짜와 장소만 정하면 만나는 건 일도 아닌 게 될 테니 말입니다. 그래서 "고민 그만하고 나가서 같이 호빵 드세요."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A군이 부탁했으니, 두 가지만 이야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너무 교과서처럼 완벽하게 상대를 대하려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경직된 상태로 담임선생님이 학생 대하듯 할 필요 없습니다. A군이 좋아하는 거, 즐기는 거, 재미있게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풀어 놓으시면 됩니다. 그러면서 상대는 어떤지 물어봐도 되는 것이고 말입니다. 둘째, 상대를 짝사랑하는 입장이 되려 하는 자신을 막으시길 권합니다. 제가 보기에 상대는 A군에게 궁금한 것들이 많아 보이는데, A군은 상대가 호감을 표현하자 상대를 짝사랑하는 입장이 되어 인터뷰를 하려 듭니다. "뭐해?"라고 묻지만 마시고, "난 이거 하고 있어."라며 자신을 소개해 나가시길 바랍니다. 조만간 들려주실 좋은 소식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4. 펜팔 사이트에서 만난 홍콩 남자가 한국 온대요.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얘기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J양이 신청서에 적어주신 이야기의 93.7%가 J양의 상상이고 나머지 6.3%가 현실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연애할 여력이 없는데 상대가 한국에 온다니 어쩌냐는 걱정은 넣어 두셔도 좋습니다. 아니, 넣어두셔야 합니다.

 

상대와 J양 사이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외국인 친구'라는 것을 제외하곤 정말 아무 것도 없는 겁니다. 상대는 전혀 J양을 유혹하고 있지 않으며 J양을 이성으로 느껴 당장이라도 연애하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그가 12월에 한국에 오는데, 두 달 정도 J양과 펜팔을 하며 대화를 나눴으니, 겸사겸사 J양도 보려고 하는 겁니다. 그의 여행 중 J양과 일정을 맞춰 보려는 거지, J양을 목적으로 한국을 방문하는 게 아니란 얘깁니다.

 

"저를 만나려는 목적이 아니라면, 왜 제가 가이드 가능한 이틀을 말했을 때, 그는 좀 더 당길 수 없냐고 물어본 거죠?"

 

3일의 휴가 중 출국일을 제외한 반나절 밖에 못 보니까 그런 겁니다. 하루 당기면 이틀을 전부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저를 만나려는 목적이 아니라면서요? 그런데 왜 이틀을 전부 보려고 하는 거죠?"

 

'외국인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J양은 자꾸 이걸 연애와 연결시키고 또 운명적인 뭐 그런 것과 연결시키려고 하는데, 실제 둘의 대화를 보면 J양의 말대로 그가 J양에게 스며들려고 하는 게 아니라 J양 역시 계속 그에게 말을 건다는 걸 볼 수 있습니다. J양이 이걸 '우정'으로 생각하신다면 저는 참 젠틀하고 아름다운 우정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여기다 상상의 살을 더 계속 붙이실 작정이라면 저는 말리고 싶습니다.

 

김칫국을 복용하지 않은 채 보면 정말 전혀, 아무 의심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외국인 친구와의 대화'입니다. 동성과의 대화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니, 상대가 품고 있는 속마음을 읽어내려는 일은 이제 그만 두시길 바랍니다. 상대의 속마음을 알 수 없기에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 게 아니라, 그런 속마음 같은 게 없는데 거기서 의미를 찾으려 하니 알 수 없는 겁니다. 기대하신 답변이 이게 아닐 텐데, 죄송합니다.

 

 

5. 이 오빠 뭐죠? 저한테 호감이 있는 게 맞나요?

 

L양, 혹시 '여우 위에 너구리 있다'는 말 들어보셨습니까? 못 들어보셨을 겁니다. 제가 지금 만든 말이니 말입니다.

 

그냥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인연을 끊는 게 몸과 마음 모두에 좋은 남자가 있는데, 그건 바로

 

- 잊을만하면 연락해서 남자친구 생겼냐고 묻는 남자.

- 심심할 때, 또는 자기 생각날 때 연락하라고 하는 남자.

 

입니다. L양은 연애에 자신이 있는지 본인도 알 거 다 알고 바보가 아니라고 하지만, 제가 보기엔 그냥 참 귀여워 보일 뿐입니다. 설마 정말, 남자들은 그런 걸 전혀 모를 거라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나를 알아주는 대학 오산대학입니다.(응?)

 

여자가 뭔가를 의도하며 행동할 때, 남자도 그걸 압니다. 특히 이십대 후반이며 연애 경험이 많은 남자가 그걸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여우짓'에 넘어가는 척 하는 건, 몰라서가 아니라 그냥 그걸 좀 즐기려고 하는 겁니다. 정말 넘어간 거라면 L양이 지금처럼 크리스마스에 만나자고 먼저 연락해볼까 고민할 일 없을 겁니다. 먼저 연락이 왔을 테니 말입니다.

 

벌써 네 번째 문단이라 끝날 때가 가까워졌으니, 간단히 정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L양의 열 평짜리 어장 밖에 상대의 서른 평짜리 어장이 있습니다. 저는 L양이 "저도 바보가 아니라 상대가 끼 부리는 게 어떤 건진 알아요. 그런데 아직 상대가 끼 부리는 걸 본 적 없어요."라고 말한 부분에서 저는 삼촌미소를 지었습니다. 삼촌들은 대개 좀 이상한 구석이 있지 않습니까? 바로 그런 미소를 지었다는 얘깁니다. 자기가 잘 생기고 인기 많다는 걸 아는 이십대 후반의 너구리가 어장에 들어가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라 저는 생각하니, 이쯤에서 너구리 포획은 단념하시길 권하고 싶습니다. 이거 길게 끌고 가봐야 서로 간만 보며 서로를 보험이라 생각하는 관계가 될 확률이 높으니 말입니다.

 

 

간만에 좀 경쾌하게 쓴다고 써봤는데 어떠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막

 

"신에게는 아직 열 두 그릇의 김칫국이 남아 있습니다."

 

같은 드립을 치고 싶은데, 사연을 읽고 나면 그 주인공과 친해진 느낌이 들어서 저런 드립을 치기가 어려워집니다. 다들, 남의 사연엔 저런 드립을 쳐도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본인의 사연만은 세상에서 가장 진지하고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여 주길 바라는 까닭에 또 어렵고 말입니다.

 

여하튼 크리스마스이브입니다. 크리스마스인데 약속도 없고 할 일도 없다고 메일을 주신 분들이 계셨는데, 그럴 때일수록 크리스마스에 바빠야 합니다. 크리스마스를 구실로 어떻게든 만날 약속을 잡으려하기보다는 일단 안부부터 물으며 대화의 물꼬를 터야 하고, 인연의 끈이 느슨해진 사람들에겐 즐거운 성탄절 보내라는 인사도 해야 합니다. 또 현관문 밖의 사람들만 챙길 게 아니라 현관문 안의 가족들에게 장갑이나 목도리를 선물하며 챙길 수 있어야 하는 거고 말입니다. 그게 공사로 치자면 기반을 닦는 것 같아서 티는 별로 안 날 수 있겠지만, 훗날엔 건물을 높이 올려도 안전하게 지지해 줄 수 있는 바탕이 될 것입니다.

 

자 그럼, 메리 크리스마스!

 

카카오스토리에서 받아보는 노멀로그 새 글! "여기"를 눌러주세요.

 새 글을 편하게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 공감과 좋아요버튼 클릭은 크리스마스 선물입니다. 감사합니다.

 

카카오뷰에서 받아보는 노멀로그 새 글과 연관 글! "여기"를 눌러주세요.

 새 글과 연관 글을 편하게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