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매일 접하는 게 우울한 사연들이다 보니, 나까지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내가 이별한 것도 아닌데, 사연을 읽고 나면 나까지 한참 울고 난 뒤 머리에 뇌 대신 심장이 자리잡곤 펌프질 해대는 것 같을 때의 기분이 된다.
그냥 세상이 다 싫고, 삶이 엎질러진 것 같고, 난 버려진 것 같고, 앞으로 살아갈 나날들이 그저 목숨을 부지해 나가는 지루한 의무처럼 느껴진다. 아직 뭘 즐기지도 않았는데 청춘은 이제 곧 문을 닫는다는 안내방송을 해대는 것 같고, 남들은 이런 기분같은 건 느껴본 적 없다는 듯 잘 살아가는 걸 보면서, 난 잘못 태어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된 건지 실마리도 전혀 찾을 수 없다. 인생이,
살기 위해 평생 그저 바닥이나 쪼아대야 하는 닭의 숙명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닭. 영어로는 치킨. 불어로는 르꼬끄. 아니면 말고. 닭을 생각하니 다시 살아갈 힘이 난다. 어쩌면 인생은 치킨을 시키기 위해, 또는 쿠폰을 열심히 모아 떨리는 목소리로 서비스 한 마리 주문을 하기 위해 주어진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매운간장과 매운양념의 축복을 받는 불금이 될 것을 기대하며, 묵묵히 쿠폰을 모으듯 매뉴얼을 써보기로 한다. 출발해 보자.
1. '믿어도 괜찮은지'가 확인 되면 믿겠다는 문제.
L양은 자동차 스페어타이어를 갈아 끼울 줄 아는가? 본네트를 연 뒤 냉각수를 어디에 집어넣어야 하는지 아는가? 방전이 되었을 때 점프선을 어떻게 연결해야 하는지 아는가? 스노우 체인을 끼울 줄 아는가? 계기판에 이상신호가 떴을 때 그 신호들이 무슨 뜻이며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를 전부 알고 있는가?
물론 다 알고 있으면 좋은 것들이긴 하지만, 저걸 몰라도 운전할 수 있고 운전을 하며 하나씩 배워나갈 수도 있다. 또, 자동차 정비사 자격증을 취득해 이제 차에 대해 모르는 게 없을 정도라고 해도, 주유소에서 주유원이 휘발유와 경유를 착각해 바꿔 넣거나, 제조사의 잘못으로 차가 운행 중 불타버리면 그건 또 이쪽의 철저한 준비와는 상관없이 곤란한 상황을 만들 것이다.
L양은 차를 몰진 않고 그저 세워둔 채, 열심히 차를 관찰하고 정비지식부터 쌓아가려는 타입이라고 할 수 있다. 차를 좀 몰아봐야 타이어 공기압에 따른 승차감 차이도 알 수 있을 텐데, L양은 누군가에게 부탁해 공기압이 완벽한지만을 체크하려 한다. 타이어 갈아 끼우는 법을 익힌 뒤에도 스페어타이어 하나로는 불안하다며 하나를 더 실으려 하고, 혹시 오일이 새거나 방전이 될 수도 있으니 그럴 때 필요할 물품 등을 전부 차에 실으려 한다. 그런 것들이 전부 다 갖춰지고 준비되면, 그때 차를 타고 어디든 가겠다는 말을 하며 말이다.
"저는 연애를 시작하면 결혼까지 생각하는 편이거든요. 부모님께서도 몇 년 전부터 결혼 안 하냐는 얘기를 하셨고요. 그래서 신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또 제가 믿어도 괜찮은지를 확인할 수 있어야 진지한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건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부분이다. 근 20년을 알고 지낸 좋은 이성친구와 사귄다 해도 친구일 때와 연인일 때의 모습이 달라 실망하게 될 수 있고, 부모님의 반대에 맞서 힘겹게 결혼을 한다 해도 신혼여행지에서 결혼을 후회하게 될 수 있으며, 10년 연애 끝에 결혼했다 하더라도 같이 살며 서로를 저주하게 될 수 있다. 이렇듯 곁에 두고 오래 보아오며 확신을 가진 상황에서도 후회할 수 있는 건데, 어떻게 아직 상대의 맨발도 본 적 없는 상황에서 '믿어도 괜찮은지'를 판단할 수 있겠는가.
2. L양이 진짜 걱정해야 하는 부분.
L양이 걱정해야 하는 건 '상대가 정말 믿어도 괜찮은 사람인지'가 아니라, L양이 상대를 '내 사람'으로 설정하는 순간 상대에게 모든 권한을 주고, 이별 따위는 생각하지 않으며 영원을 약속받으려 한다는 지점이다. 그렇기에 L양은 그 누구보다 신중하고 철저하게 상대를 관찰하고 그의 진심을 알아내려 하지만, 상황이 바뀌면 사람은 변할 수 있고, 누구라도 어제까진 간절하던 것이 오늘은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치명적인 함정이 있다.
난 L양의 이전 연애도 알고 있는데, 약속과 맹세라는 게 얼마나 의미 없어질 수 있는지는 L양도 그 연애를 통해 배우지 않았는가. 영원한 행복이 되어주겠노라고 하던 사람이 시간이 지나자 자신은 독신주의인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고, 그래서 헤어졌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가 다른 여자와 만나다 결혼한 것. 그 연애엔 L양이 사람을 잘못 골랐다는 문제도 있긴 했지만, 그것보다 심각했던 문제는 시작부터 L양이 올인 한 까닭에 둘 사이의 긴장감이 완전히 사라졌으며, 동시에 상대는 그 관계에서 책임과 의무밖에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현재 L양이 썸인지 아닌지를 고민하는 상대와의 관계에서도, L양은 빨리 올인 해야 하는데 상대를 믿어도 좋은지를 확실하게 알 수 없어 애태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단 사귀게 되면, L양이 먼저 헤어지자고 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란 어떤 결의 같은 걸 불태우고 있는 것 같다.
연애를 시작했다고 해서 상대에게 L양의 인생을 통째로 다 맡기려 하지 말자. 또, 상대가 점점 무례하고 무성의한 태도를 보임에도 불구하고 L양은 변함없이 사랑하고 충성하겠노라고 맹세하진 말자. 그건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지고지순한 것도 아니다. 그저 일종의 맹신이며,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 계속 그러고 있는 것일 뿐이다.
상대와 만나다 이 사람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면 L양도 헤어지자고 할 수 있는 건데, 지금도 L양은 이것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은 채
"상대와 사귀게 되더라도 혹 1, 2년 사귀다가 헤어지면 제가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버림받게 되는 상황이 올까봐 그게 너무 두려운 것도 사실이고요."
라는 이야기만 하고 있지 않은가.
운전을 떠올려 보자. 한 번 주유하면 평생을 걱정 없이 탈 수 있다거나, 구입 후 영원히 고장 한 번 안 나는 차는 없잖은가. 고장 나면 고치면 되고, 고쳐서 안 될 것 같으면 어쩔 수 없이 폐차를 선택할 수도 있으며, 간단한 고장을 혼자 처리할 수 없을 땐 주변에 묻거나 도움을 청할 수 있다. 그러니 차를 몰고 나가는 것에 너무 겁먹진 말길 권한다.
3. L양은 왜 L양이 바라는 남자를 못 만날까?
L양은
"저는 이제 저를 많이 좋아하고, 따뜻한 심성에 부드러운, 신뢰가 가는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
라고 말하는데, 내 생각엔 그게 쉽지 않을 것 같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두 가지 큰 이유는 아래와 같다.
ⓐ L양이 정해둔 '썸남'의 커트라인.
L양은 자신이 관계를 중요시 여기며 가볍고 얕은 관계는 싫어한다고 했는데,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아직 친하지 않은 사람, 특히 친하지 않은 이성에게는 곁을 잘 주지 않는다. 현재 썸남과의 대화를 봐도, L양은 초반에 사무적인 대답을 할 뿐 딱히 친밀하거나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러다 상대가 계속해서 장난을 치고 농담을 하자, 그제야 서서히 L양도 그에게 반응하며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뭐, 정열적이고 능청스러운 남자라고 해서 따뜻한 심성이나 부드러운 면이 없는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L양은 상대가
"오빠 정도면 어디 가서 빠지지 않지."
"오빠 말을 잘 들어. 그러면 자다가도 떡이 생겨."
"어허 쪼꼬만 게."
류의 장난과 농담을 던져야 일단 자신의 '썸남' 커트라인을 통과시키기에, 아무래도 그 라인을 넘은 사람들은 약간의 자뻑에 빠져 있거나, L양을 놀리거나, 적극적이지만 그다지 진중하진 않은 태도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
L양의 전남친과 이번 썸남의 태도가 비슷하다는 것에 주목하길 바란다. 단순히 보면 '나는 왜 만나도 이런 남자들만 만나게 되나'하는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자세히 보면 L양의 커트라인 문제로 인해 그런 남자들만 만나게 되는 것일 수 있다. 상대가 일단 급한 마음으로 들이대거나 계속해서 드립을 치며 다가와야만 커트라인을 통과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 커트라인이 L양이 수동적으로 기다리고 있기 편한 것에만 최적화 되어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 보길 권한다.
ⓑ 여리고 눈물 많은 대학 새내기의 느낌.
L양은 나이가 적지 않음에도, 대학교 새내기가 4학년 복학생 오빠를 대하듯 썸남을 대한다. 대화에 임하는 태도를 보면 눈물 많고 마음 여릴 것 같은 소녀 이미지가 풍기는데, 그게 꼭 좋기만 한 건 아니라는 얘기를 해주고 싶다.
우리끼리니까 하는 얘기지만, 살짝 좀 상상과 낭만의 영역에 가 있는 느낌이 든다. 만약 내가 L양과 썸남만큼 친해져 대화를 나누게 된다면, 나 역시
"잘 자~"
보다는
"잘 자렴~"
이라고 말하게 될 것 같다.
꼬꼬마시절부터 문학소녀였던 내 지인들이 종종 연락을 해올 때가 있는데, 그녀들은 L양과 비슷하면서도 한 발짝 더 깊이 들어가 있는 대화법을 사용하곤 한다. 소개하자면 아래와 같다.
지인 - 무한. 곧 봄이라는 말에. 네 생각이 났어.
무한 - 요즘 약 같은 거 하나?
지인 - 여전해. 그래서 생각이 났나봐. 너는 그대로일 것 같아서.
무한 - 한강에서 뺨 맞았구나?
지인 - 언제 술 한 번 사주면. 은혜는 잊지 않을게.
무한 - 그런 거 하지 말라고. 그러니까 자꾸 술 먹을 일 생기는 겨.
지인 - 쿡쿡.
무한 - 그런 거 하지 말라니까. 그냥 웃으면 되지 무슨 또 쿡쿡이야. 밥솥도 아니고.
나도 가끔 감수성이 폭발하는 날엔 저런 선문답 같은 대화를 즐기곤 하지만, 가끔 저러는 게 아니라 계속 저러면, 현실에 발 딛는 것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연애 중 저런 태도를 계속 유지하면 연애가 슬픈 연애소설화 되거나, 상대가 아무렇게나 대답을 해도 알아서 의미부여를 하는 까닭에 또 다른 의미의 '답정너'가 될 수 있고 말이다.
L양은 저렇게까지 심각한 대화법을 사용하지 않아 다행이긴 하지만, L양이 바라는 대로만 해석하거나 의미부여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위험하긴 하다. 이런 와중에 L양의 '올인 하는 연애법'까지 더해지게 되면, 그 관계의 기반은 현실이 아닌 낭만과 상상의 영역에 있게 될 수 있다는 걸 잊지 말길 바란다.
오늘 준비한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불금인 오늘 저녁부터 설 연휴를 시작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 같아서, 미리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는 인사를 드릴까 한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난 이번 주 빼먹은 매뉴얼들이 있어 주말과 연휴에도 매뉴얼을 발행할 수 있도록 노력해 볼 예정이다. 자 그럼, 다들 불금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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