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는 물금이고 하니, 오늘은 요점만 짚으며 쭉쭉 치고 나가는 '사연모음'을 발행하기로 하자. 일반적인 매뉴얼이 첨삭이라면, 사연모음은 원 포인트 레슨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오늘은 한 매뉴얼에 네 개의 사연을 다룰 예정이라 갈 길이 머니, 마중글은 이쯤하고 바로 출발해 보자.
1. 소개팅 후 세 번 만났는데 친해지지 않는다는 여자.
J양이 상대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표현을 하지 않으니 친해지지 않는 거다. 그리고 J양은 'YES OR NO'로 대답하는 치명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는데,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만나도 일정 수준 이상으로 친해지긴 어려울 수 있다.
대화를 보자.
ⓐ
남자 - 난 이제 끝났어. 자려나?
J양 - 웅
남자 - 자는데 대답을 하네 ㅋㅋㅋ 알았어. 잘 자~
J양 - 응응
ⓑ
남자 - 퇴근 잘 했어? 우리 내일 몇 시에 만날까?
J양 - 내일? 5시?
남자 - 오키. 그럼 다섯 시에 신촌에서 만날까?
남자 - 신촌 가깝지?
J양 - 응 가까워용
저건 여자가 남자를 '쏘쏘' 정도로 생각하며 '찔러대면 반응해주긴 하겠다'의 태도를 가졌을 때 하는 행동이다. 내가 J양의 썸남이라 해도, 굳이 저런 반응밖에 하지 않는 J양에게 계속 만나자고 하거나 영화를 보자고 하는 말을 하긴 힘들 것 같다. 되묻는 일도 거의 없고, 매번 남자 쪽에서 인터뷰 하듯 물어 짧은 대답 정도만 듣는 까닭에 흥도 나지 않을 것 같고 말이다.
우리가 말을 못하는 까닭에 소리만 내가며 의사소통을 해야 하는 동물이 아니니, "넵, 넹, 옹, 오, 아니, 웅웅, 아, 얍."하는 말들로만 대화하지 말길 권한다. 길게 말하고, 상대가 J양의 안부를 물어보면 J양도 상대의 안부를 묻고, 문자로 대화하는 것에 자신이 없어서 그러는 거라면 차라리 전화를 걸어 통화하길 바란다.
2. 남친이랑 매주 싸우게 돼요. 제가 이상한가요?
N양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100% 남친이 잘못하는 것이며, 그가 사람 간에 지켜야 할 아주 기본적인 부분마저 지키지 않기에 갈등이 생기는 것이다. 굳이 N양의 잘못을 따지자면 자신의 기분이 지금 어떤지를 숨긴 채 '이해하는 척' 해준다는 것인데, 참고 참다가 속마음을 꺼내면 남친이
"난 너를 힘들게만 하는 것 같네. 더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 헤어지자."
라는 이야기를 하기에, 이것 역시 손 쓸 방법이 거의 없다고 말해주고 싶다.
N양의 남친은 즉흥적이고, 무책임하고, 우유부단하고, 확실하게 말하지 않고,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이랬다저랬다 말을 바꾸는 치명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다. 아직 어린 까닭에 그러는 것일 수 있지만, 나이를 감안해 일정부분 이해한다 해도,
- 언제나 외부의 일이 먼저. 내부 사람에게는 이해와 양보를 구함.
- 분명 자신이 잘못한 일로 갈등이 생기면 헤어지는 것으로 답을 내려 함.
- 친구들에겐 100% 다 말하지만 여자친구에게는 50%만 이야기를 함.
등의 부분은 상대 성격상의 문제일 수 있기에 위험하다. 한 가정의 가장인 사람들 중에도, 늘 바깥일에 먼저 충성하고 가족들에게는 희생과 양보와 이해를 구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특히 N양의 남친이
"너와의 약속 때문에 친구들과 만나다 일찍 가봐야 하거나, 그 만남에 참여하지 못하면 친구들을 볼 면목이 없다."
라는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 그에겐 대체 N양과 연애가 무슨 의미인 것인지 의문스럽기까지 하다.
여자친구와 만나기로 한 날 친구에게 일이 생겼다며 친구에게 간 것, 자신이 먼저 주말에 여행 가자고 해놓곤 그걸 깜빡했다고 말하는 것, 앞으로 타 지역으로 갈 계획을 다 세워놨으면서 N양에게는 '아직 모른다'고만 말하는 것, N양과 선약을 하고서도 다른 일이 생기면 N양에게 양보와 이해를 구하는 것 등을 보면, 이런 남자와의 연애는 그 미래가 깜깜하다고 할 수 있다.
저녁 식사시간에 만났는데 자신은 밥을 다 먹고 와서는 "난 밥 먹어서 배부른데…. 그냥 카페나 가지 뭐."라고 말하는 남자와는, 그를 좀 변화시켜 어떻게든 더 만나려 노력하는 것보다는, 그냥 하고 싶은 거 마음껏 하며 살라고 놔둔 채 헤어지는 게 좋을 것 같다.
3. 처음으로 진지한 썸을 타는 중입니다.
그렇게는, 썸 타기 힘드실 텐데요? 본래 H양의 모습과는 다른 좀 더 '좋은 모습'을 살짝 더 보여주려 하는 건 괜찮지만, 완전히 다른 형태의 어떤 '완벽한 사람'을 연기하려 하면 결국 힘들 수밖에 없어요.
H양이 어떤 사람이지를 보여줘야죠. 그래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H양은 혹시 전부 보여줬다가 상대가 실망하거나 어떤 부분에 불쾌함을 느끼진 않을까 하는 걱정부터 하거든요. 그래서 되도록이면 좋은 모습만, 그리고 최대한 흠으로 보이지 않을 태도로만 상대를 대해요.
그럴 경우 발생하는 문제가 뭐냐면, 진심이 안 느껴진다는 거예요. 그건 누구든 바로 알아채요. 상대가 H양에게 한 얘기를 보세요.
"근데 전에 대화할 땐, 네가 막 딴 거 신경 쓰는 듯한 느낌은 들었어."
두 사람이 그 시간에 정말 완벽히 빠져 30분 대화하는 거랑, 뭐가 어떻든 그냥 계속 웃고 호의적인 태도로 대답해주며 3시간 대화하는 거랑, 분명 다르거든요. 또, 후자의 대화를 하면 흠 잡힐 일은 없겠지만, 그만큼 가까워지기도 힘들어요. 다른 음들이 만들어 내는 하모니가 아니라, 계속 '솔' 톤으로 응대하는 모습이 되어버리니까요.
전 H양의 사연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지만 그 이야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어요. 이미 H양의 입장에서 철저하게 수비가 된 글이었거든요. H양에게 불리할 수 있는 부분은 빼버린다든가, H양은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는 식의 변명을 적는 것으로 완성이 되어 있어요.
H양도 답답해서 제게 사연을 보낸 상황에서 이렇게 작성한 걸 보면, 이건 무의식적이거나 습관적인 방어일 거예요. 어떤 행동을 하기 전에 이미 자신에게 유리한 변명을 모두 찾곤 시작하는 거예요. 지금 썸남과의 관계도 그래요. 그와의 관계가 틀어지면 그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들이 이미 다 정해져 있어요. 그런 와중에 H양은 실수하거나 흠이 될 일 저지르지 않으려 애쓰고 있는 거고요.
사공도 너무 많아요. H양의 아버지, 어머니, 친한 언니, 지인 뭐 여러 사람들이 이미 다양한 예상과 평가를 하고 계시거든요. 때문에 여기서 보자면, 상대는 H양과 썸을 타는 게 아니라 마치 'H양과 관련된 사람의 집합체'와 썸을 타는 것으로 보여요. 그 분들은 상대가 호의를 보인 것에 대해 꿍꿍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짐작을 하시거나, 지금의 상대 보다는 이전의 상대가 더 나았다고 말씀하시기도 하시는데, 현실에서 H양과 상대는 아직 손도 한 번 안 잡은 사이잖아요.
상황이 이런 까닭에, 저도 별로 드릴 말씀이 없어요. 굳이 뭔가를 얘기해야 한다면, 이게 비즈니스가 아니라 연애니까, 그냥 좀 H양의 마음 가는 대로 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연애라는 게, 서로에게 아무 허물도 보여주지 않거나 작은 실수도 하지 않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상대의 허물을 덮어주거나 실수에 대해 사과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관계가 단단해지는 거거든요. 완전하게 안전한 온실을 구축하는 게 아니라, 같이 비바람 맞고 볕도 쬐면서 함께하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10년 째 연애 중인 저도 싸울 때 있고, 삐칠 때 있고, 눈물 흘릴 때 있어요. 그러니 아직 손도 한 번 안 잡은 상황에서 그 관계를 '오래오래 행복하게만 살았답니다'로 만들려고 하지 마시고, 그냥 만나보셔요. 이거 막 비즈니스 하듯 '상대의 도움에 대해선 제가 이러이러한 것으로 보답했습니다' 하며 만날 필요 없어요. 더 가까이 다가가시고, 즐기세요. 바보 같은 일까지도 함께 하며 정 들게 되면, 작은 실수 하나 했다고 등 돌리거나 관계를 끊는 일은 생기지 않을 테니까요. 손도 마음껏 잡으시고, 뽀뽀도 마음껏 하세요. 그래도 괜찮아요.
4. 썸인 줄 알았는데, 그녀에게 남친이 생겼다네요.
라형, 세상 끝난 게 아니잖아. 그러니까 너무 상심한 채 세상을 잿빛으로 보지 말고, 자신이 가련한 것 같다는 생각에 술에 기대려고도 하지 마. 그런 '인생무상 모드'에 빠지게 되면 최소 한 반년쯤 그냥 가버리거든.
내 지인 중 하나도 라형과 같은 레퍼토리로 한 8년을 보냈어. 한 여자에 대한 건 아니고 여러 여자에 대한 감정이긴 한데, 여하튼 지인도 '짝사랑 기능장'의 모드로 이십대를 다 보냈거든. 편의상 A군이라고 지칭할게.
A군이 대학에 입학하니까 동기 중에 퀸카가 있는 거야. 그래서 그녀를 좋아했는데, 그녀는 동아리 선배랑 사귀었지. 그 이후로 어학원, 교회, 동호회, 심지어는 운전학원에서 까지 비슷한 방식으로 짝사랑을 했어. 그렇게 반 년, 일 년, 일 년 반 정도씩 짝사랑을 하다 보니 서른이 되고 말았고. 물론 A군은 현재 다섯 살 연하의 여자친구와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긴 한데, 언제가 내게
"내가 왜 그렇게 살았었는지 이해가 안 간다. 그럴 필요 없었던 건데, 내가 만든 내 감정에 완전히 갇혀 있었던 것 같아. 와 진짜, 걔들이 뭐라고 내가 그 시간들을 다…."
하는 이야기를 하더라고.
A군이 막 소심하게 뒤에서 바라만 보거나, 아니면 아무 교류도 없는 사람에게 구애하며 지냈던 건 아니야. A군도 사실 'A군이 좋아하지 않는 여자'들에게는 인기가 있었거든. 저 위에서 말한 동호회가 취미로 음악을 하는 사람들의 동호회인데, A군은 노래도 잘 부르고 피아노와 기타도 칠 줄 알아. 능청스럽게 장난도 칠 줄 알고, 재치 있는 말을 해서 사람들을 웃길 줄도 알았어.
그런데 치명적인 단점이 뭐였냐면, A군은 자신이 호감 가는 여자에게는 자신이 무슨 교장선생님이 된 것처럼 굴었다는 거야. 왜 연예인들의 사생활에 관련된 이야기를 듣다 보면, 평소에는 진짜 다른 연예인들 배꼽 빠지게 만드는 사람이지만, 카메라만 들이대면 재미없어진다는 누군가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잖아. 그래서 그는 신들린 애드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프로그램에 출연하면 병풍역할만 하다 돌아간다고 하고 말이야.
A군의 캐릭터가 딱 그런 캐릭터였어. 호감 가는 이성에게는 이상하게 '날 안 좋아한다는 증거'부터 찾으려고 하고, 필요 이상으로 진지하게 굴며, 일단 이렇게 친하게 지내다가 나중에 사귈 거라는 확인부터 받으려고 했거든.
아니, 상대는 인기 많은 여자니까 다른 '아는 오빠'나 '아는 남자'가 있을 수 있는 거잖아. 연애 경험이 있으면 구남친이 있을 수도 있는 거고 말이야. 그런데 A군은 상대가 다른 이성과 통화하면 거기에 팍 기분이 상해서는, 누구냐고 캐 묻거나 그 남자를 이성으로 좋아하는 거냐는 식의 질문까지를 해버리는 거야. 그러고는 거기에 대한 소심한 복수를 하려 들거나, 뜬금 없이 둘 사이에 찬바람 부는 것처럼 분위기를 만들고 말이야.
내가 A군을 유심히 관찰한 적 있는데, 가만히 보니까 그는 호감이 가는 상대에겐 일단 100점을 부여하곤, 그 다음부터 오로지 감점만을 해나가.
상대가 긍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 현 점수 유지
상대가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 감점
저러니까, 한 세 달 가깝게 지내고 나면 상대 점수는 10점대가 되고 마는 거야. 처음부터 혼자 상대의 완벽한 이미지를 만들어 놓고, 현실에서 그것과 다른 모습을 보이면 삐치거나 서운해 하거나 실망하는 거야. 이러니 뭐가 될 리가 없는 거잖아. 상대가 부담을 느끼거나 거리를 두려 하는 건 필연적인 일이고 말이야.
내가 보기엔 라형이 현재 하고 있는 행동이, A군이 과거에 벌였던 저런 일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A군은 자신이 짝사랑하던 상대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하니,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자신의 마음을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늦은 고백을 했다가 차인 적이 몇 번 되거든. 난 혹시 라형도 그 전철을 밟지 않을까 싶어서 좀 걱정이 돼. 여기서 보자면 이제 둘은 서먹서먹하게 대화하고, 얼굴 봐도 웃지 않으며, 괜히 한숨이나 쉬는 중인데, 이런 와중에 늦은 고백한다고 뭐가 될 리가 없는 거거든.
그러니까 일단은 상대를 '호감 가는 여자'에서 '아는 여자'의 카테고리로 옮겨 봐. 둘이 대화하게 될 때마다
'쟤가 나한테 이렇게 웃으며 말하는 건 무슨 의미일까. 쟤는 남자친구도 있으면서 왜 나한테 그러는 걸까. 앞으로 그런 얘기는 남친이랑 나누라고 한 번 말해버릴까. 쟤는 나를 어장에 넣어둔 채 희망고문 하려는 걸까. 쟤도 내가 마음 있다는 거 알고 있으면서 왜 잔인하게 이러는 걸까.'
라는 생각을 하며 슬프고 억울하게만 생각하지 말고, 나중에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사이이며 지금 둘이 농담한다고 잘못을 저지르는 거 아니니까, 계속해서 부정적인 의미만 부여하는 라형의 마음을 좀 멈춰 세워봐. 지금 라형이 말하는 "짝사랑한 게 죄겠죠.", "그녀는 이제 남친에게 웃는 모습을 보여주겠죠."따위의 말은 할 필요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거야.
지금 라형이 해야 할 건 자학과 상상이 아니라 현실에 발 디디는 거니까, 라형 혼자 만든 감정의 감옥에서 얼른 걸어 나오길 권할게. 바로 다음 주나 다음 달에 다른 사람과 새로운 썸을 타게 될 수도 있는 거고, 사귀다 헤어진 상대가 라형에게 노크할 수도 있는 거니까, 패배한 마음으로 무기력하게 있는 건 그만하고 내일이라도 당장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준비를 해두자고. 기죽은 채 있다가 어느 날 너무 분하다며 상대에게 심술부리면, 그땐 진짜 방법이 없는 거야. 잊지 마. 알았지?
빠르게 요점만 짚어보며 내려왔어야 하는데, 3번 사연에서 휘청하더니 4번 사연에서 완전히 실패하게 된 것 같다. 짧고 간결하게 네다섯 문단으로 끝냈어야 하는데…. 넘친 문단들은, 사연에 마음이 쓰여 딱 그만큼만 적을 수는 없었던 정이라고 생각해 주셨으면 한다.
빨리 소개되지 않아 "헤어졌습니다. 매뉴얼로 다뤄주실 필요 없을 것 같아요."라는 메일이 오기도 하는데, 타이밍을 다 놓치기 전에 부지런히 더 다룰 수 있도록 하겠다. 주말에도 매뉴얼을 발행하려면 난 지금 또 사연을 읽으러 가야 하니, 배웅글은 이쯤에서 끝내고 우린 내일 다시 만나기로 하자. 즐거운 금요일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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