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연을 가지고 반나절 동안 고민하다가, 접어두었다. 사연은 '설명문'처럼 작성되어야 하는데, 그 사연을 주신 분은 '감상문'처럼 적어주셨기 때문이다. 교통사고에 비유하자면, 난 그 사고가 '언제,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왜'일어났는지를 알고 싶은 건데, 사연엔
"사고가 났습니다. 저도 잘 한 건 아니죠. 하지만 전 제가 다 잘못한 것처럼 말하는 상대방 때문에 더 화가 났습니다."
라고만 적혀 있었던 것과 같다.
그래버리면, 나도 "아, 정말 화나셨겠네요."하는 공감 정도야 해드릴 수 있겠지만, 무엇이 왜 문제가 되었고 앞으로 같은 사고를 방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말씀드리기가 불가능하다. 사연을 주신 분은
"세상엔 좋은 다른 남자도 많다는 식의 말씀 말고, 저의 단점과 다음 연애에서 또 저지르면 안 되는 일들을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남자보는 안목을 살릴 수 있는 해결책을 부탁드립니다."
라고 요청하셨는데, 이미 결론을 품은 채로 가공된 사연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남친이 잘 하기로 노력하겠다 말했지만, 그 노력이 진심으로 느껴지진 않았다'는 말에 대해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저, 연애 중에도 혹시 이미 결론을 다 정해 놓고 무슨 일이 벌어지든 그 결론에 끼워 맞췄던 건 아닌지 돌아보시라는 말씀만 해드릴 수 있을 뿐이다.
사연엔 가장 이상적인 남친상을 설정해 두곤 남친이 거기에 못 미칠 경우 감점을 하는 문제가 보였는데, 사연에 결론만 적혀 있는 까닭에, 남친이 정말 상식적인 기준에도 못 미쳤던 건지 사연을 주신 분이 단점만 보며 확대해석을 했던 건지는 나도 판가름하기가 어렵다. 다음에 다시 한 번 자세히 적어 사연을 주시길 부탁드린다. 자 그럼, 불금맞이 <금요사연모음> 출발해 보자.
1. 남자 앞에만 서면 머릿속이 하얘진다는 여자.
대인관계에서는, '큰 의미 없이 주고받는 말'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예컨대
"점심 드셨어요?"
라고 묻는 건, 정말 상대가 밥을 먹었는지 궁금하거나 안 먹었으면 함께 먹을 '확실한 목적'이 없더라도 그냥 할 수 있는 말이다.
설 연휴가 이미 지나긴 했지만, 만약 설 연휴 전이라면 '같이 밥 한 번 먹은 적 없지만 자주 보게 되는 사람들'에게 "명절에 뭐 하세요?"라든가 "명절에 고향 가세요?" 정도의 질문을 해도 된다. 같은 조를 이루어 함께하고 있는 사람이라든가 회사 동료, 아니면 머리 하러 갔다가 수다를 떨게 된 헤어디자이너에게 별 의미 없이 저런 질문을 해도 괜찮다는 얘기다.
"그러면 상대가 설 연휴에 만나자는 말로 받아들이거나, 관심이 있어서 그러는 걸로 오해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그런 생각 때문에 아예 입을 닫아버린다는 게 C양의 문제다. 전혀 아무런 오해도 생기지 않을 말을 하려는 것, 그런 얘기를 해도 괜찮은 사이라는 게 확인 된 뒤에야 대화를 하려는 것, 혹시나 내가 한 말을 상대는 다른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 아닐까 하는 고민을 하느라 아무 말도 안 하고 마는 것. 그래버리니 새로 친해지는 이성은 하나도 없으며, 오로지 아빠나 오빠, 또는 친척 등 '아무 오해도 없을 관계'에서만 마음 놓고 대화를 한다.
"저도 화나고 짜증나요. 남자친구도 사귀고 싶은데 대화 자체가 어렵고 어색하니…. 저 어떡하면 이런 게 좀 개선이 될까요?"
이건 자신을 계속 이성과의 대화에 노출시키며 '이불킥과 반성과 개'을 거듭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우선 인사만 잘 해도 절반은 해결되니 인사부터 시작하길 바라며, 사귀거나 더 가까워질 것 아닌데 안부 묻는다고 2년 이하의 징역이나 2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지는 것 아니니 걱정은 접어두고 일단 말을 걸어보길 권한다.
하나 더. 저런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상대에게 최소한의 관심이 꼭 있어야 한다는 걸 기억하자. 상대에 무엇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걸 알거나, 상대의 옷이나 신발, 헤어스타일이 바뀌었을 때 눈치 챌 수 있거나, 상대가 했던 말을 기억할 수 있거나 하면 대화가 수월해진다. 지난 주 상대가 '주말에 자격증 시험이 있다'는 이야기를 한 걸 기억하고 있어야, 다음 주에 만났을 때 시험 잘 봤냐고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최소한의 관심도 없다면, 상대와는 우연히 버스 옆자리에 앉게 된 사람처럼 오히려 서로를 쳐다보는 게 이상해질 수 있으니, '무에서 유를 창조'하려 하지 말고 관심을 둔 채 화제를 마련해 두길 바란다.
2. 남친이 제 연애 과거사에 대해 신경 쓸까요?
지금 M양이 남친에게 묻고 있는 대로 계속 묻는다면, 신경 쓸 수밖에 없다는 얘기를 해주고 싶다. 더는 M양의 과거 연애사에 대해 얘기도 하지 말고, 남친에게 M양이 말한 과거가 신경 쓰이냐고도 묻지 말길 바란다. M양의 그런 태도는, 차를 몰아 역주행을 하고 있으면서
"아직까지 사고가 안 났는데, 사고가 날까요? 제가 역주행을 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어서 그런데, 이렇게 역주행을 하다 보면 위험한 상황이 생길까요?"
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제가 연애 초반에 물어 봤을 땐 남자친구가 제 과거에 대해 신경 안 쓴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아무래도 그때는 연애 초반이니까 그렇게 대답한 거고, 사실은 신경을 쓰지 않을까 싶어요. 그래서 종종 물어보고 있는데요, 남친은 그런 인연들을 거쳐 어쨌든 자신과 만나게 된 거니 좋게 생각한대요. 좋다는 표현까지 쓴 걸 보면 정말 신경 안 쓰는 것 같기도 한데, 제가 신경이 쓰여요. 주변 친구들과도 상의해봤는데, 주변 친구들도 신경이 아예 안 쓰일 수는 없을 것 같다고 해요."
대체 왜?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까지 '자신의 과거 연애사를 남친에게 이야기 한 것'에 집착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것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당사자인 남친은 '그런가보다'하고 있는 상황인데, 여기서 왜 자꾸 그 부분을 긁어 탈이 나게 만들려 하는가.
"그건, 남친에게 더 자세한 얘기들을 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과거의 일들을 말해야 할 때가 있거든요. 과거에 대해 설명해야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어요."
나도 연애사연을 한두 해 받아온 게 아니라서 M양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안다. 아는데, 정말 그 이야기를 안 해 두 사람 사이에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하는 거 아니라면, 그 얘기가 뭐든 절대 하지 말길 권한다. 내가 만약 M양 남자친구인데, M양에게
"내가 구여친이랑 연애를 할 때, 구여친은 자기 살 거 다 사면서 연애엔 돈 한 푼 안 썼어. 그래서 데이트비용을 거의 다 내가 지불했는데, 그것 때문에 데이트비용에 대한 트라우마가 좀 있어. 걔가 부모님이랑 싸우고 내 자취방에 와서 살 때에도, 난 두 사람 몫까지 다 내 돈으로 부담하느라 정말 힘들었어."
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해보자. M양은 저 애기를 듣고 어떤 기분이 들겠는가?
저 얘기를 한 나는 속 시원하고 편하며 이제 다 털어 놓았다는 해방감이 들지 모르지만, 반대로 M양은 앞으로 돈을 내는 문제가 있을 때마다 저 이야기가 떠오를 것이고, 더불어 내 과거 연애사를 듣고 생긴 나에 대한 이미지 때문에 관계에 온전히 집중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렇듯 이유가 무엇이든 M양의 과거 연애사를 상대에게 말하는 건, 상대로 하여금 이중고를 겪게 할 수 있다. 그러니 자꾸 "괜찮아? 더 얘기해도 괜찮아? 진짜 신경 안 쓰는 거지?"라는 확인을 해가며 역주행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 옆에 있는 상대와 미래를 향해 정주행 하길 권한다. 누구나 가슴에 묻고 있는 사연 하나, 힘들지만 감당하고 있는 비밀 하나씩은 있기 마련이다. 그걸 다 털어 놓는다고 무조건 상대가 M양을 더 잘 이해하게 되는 건 아니니, M양이 감당해야 할 부분은 M양이 감당했으면 한다.
3. 결정적 한 방이 없다는 게 무슨 뜻이죠?
이십대 초중반에 연애하던 방식을 고집하시는 '인기 많았던 여자' 분들은, 대략 28세, 29세부터 연애에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B양도 이전까지는
"애프터에 대한 고민? 그게 뭔가요? 소개팅 하고 나선 당연히 남자가 다음번에 또 만나자고 연락하는 거 아니었나요? 전 어떻게 하나 거절만 해봤지, 애프터가 없어서 고민해 본 적은 없네요."
라는 이야기를 하셨을지 모르지만, 이젠
"제가 의식적으로 많이 웃고, 리액션도 열심히 하고, 적극적으로 이야기도 많이 했는데…. 그걸로 끝. 이거 왜 이러는 거죠? 이해가 안 가서 주선자에게 물어보니, 동안이고 예쁘고 말도 잘 통했지만 '결정적 한 방'이 없었다네요. 결정적 한 방이 뭐죠? 친구들은 아직 인연을 못 마나서 그러는 거라고 위로하는데, 저 지금 심각해요. 결정적 한 방은 어떻게 생길 수 있는 거죠?"
라는 이야기를 하게 되셨을 겁니다.
그건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니 너무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작년인가 재작년만 해도 허니버터칩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지 않았습니까? 저희 동네에서는 허니버터칩 하나에 다른 과자 두 개를 더 붙여서 5천원인가에 팔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팔아도 가게 문 열 때 가지 않으면 살 수 없을 정도였고 말입니다.
하지만 허니버터칩에 대한 기대와 환상이 모두 깨진 요즘은, 마트 과자 코너에 수북히 쌓아 놓아도 별로 줄질 않습니다. '1인 최대 3개 구매'이라는 문구가 괜한 걱정처럼 느껴질 정도고 말입니다. 바로 이런 현상이 연애에서 나타난 거라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십대 끄트머리에 서 있는 B양은 삼십대 남자들을 만나시게 될 텐데, 그들 대부분은 여자나 연애에 대한 환상이 깨진 상태입니다. 그래서 단순히 소개팅에 나온 여자의 미모가 뛰어나다고 해서 충성을 다짐하며 그녀를 모실 생각을 한다거나, 리액션은 잘 하지만 그게 연기라는 게 수동적인 연락에서 드러나는 여자에게 구애할 생각을 하진 않습니다. 더불어 그 나이쯤이면 결혼까지를 염두에 두고 만나야 하는 거라, '여자친구'로서만 괜찮은 사람인지 '동반자'로서도 괜찮은 사람인지까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바로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B양은
"제가 먼저 고백해서 사귄 적은 없습니다. 상대들이 날 좋아했고, 고백을 받는 쪽이였죠. 얼마 전까지도 연애나 썸이 어렵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제 자신이 나름 매력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B양이 매력 있는 사람이고 상대방은 B양의 매력에 빠져 벌꿀처럼(응?) 날아드는 거라 생각하니 상대는 미지근한 마음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B양은 제자리에 꼼짝하지 않고 있으며, 상대의 매력을 볼 생각도 하지 않으니 말입니다.
만났을 때 분위기 좋았으니 앞으로 상대가 구애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B양도 그 관계에 바짝 다가앉으시길 권합니다. 상대가 취향을 물어보면 대답만 할 게 아니라 B양도 상대의 취향을 물어보시고, 만남 후 상대가 집에 데려다 줬다면 잘 들어왔다는 연락만 하고 끝낼 게 아니라 상대도 집에 잘 들어갔는지 까지를 확인하시면 됩니다. 상대에게 먼저 연락하면 지는 거라고 생각한 채 주선자에게만 확인을 부탁한다거나, 계속해서 그저 대답만 하며 상대가 리드하길 기다리진 마시길 바랍니다. 상대가 아침에 안부를 물으며 연락했으면, 점심엔 B양이 점심 잘 먹었냐고 연락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결정적 한 방'이라는 건, 무슨 특별하고 대단한 게 아니라, '상대도 나에게 호감이 있으며 함께 인연을 만들어갈 생각이 있다'는 걸 표현하는 겁니다. 상대는 어제 자신이 오늘 야근한다는 걸 말했으면, 그걸 기억해 야근 중이냐고 묻는 여자에게 호감을 갖게 됩니다. 어제는 분명 "와, 야근 너무 힘들겠다 ㅠ.ㅠ"라고 리액션을 해놓고는, 오늘 야근한다는 걸 기억도 못 하는 여자보다 말입니다. 이제는 상대가 더 혹할 수 있는 무언가를 내보이는 것보다, B양이 다가가는 게 필요하다는 걸 잊지 마셨으면 합니다.
불금이다. 난 오늘 치맥을 먹을 예정인데, 마트에 가서 사다 먹을 거라 얼른 나가봐야 한다. 늦게 가면 다 팔리고 없다. 제발 남아있길 간절히 기도한다. 그러니 오늘 배웅글은 생략하고, 노멀로그 옐로아이디를 다시 한 번 소개하며 마치도록 하자.
옐로아이디 - @무한의노멀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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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불금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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