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한 H양이 상처 받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말하는 게 좋을까.
“아무래도, 오프라인에서의 첫 만남 이후 상대가 차게 식은 것 같습니다.”
라고 말하면 충격과 공포에 휩싸일 수 있으니,
“큰 기대를 가지고 있다가, 실제로 만난 이후로는 기대를 내려놓게 된 것 같습니다.”
정도로 말하면 되는 걸까.
H양은 23일부터 상대의 반응이 식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 내가 두 사람의 카톡대화를 읽으며
‘혹시 이거, 남자가 다른 사람한테 폰을 넘긴 건가?’
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급변하는 걸 느낀 건 16일 부터다. 그때부터 남자는 H양에게 묻던 질문들을 모두 거두었고, H양이 말을 걸면 겨우 짧게 대답만 할 뿐이었다. 종종 긴 문장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그건 그가 자기 얘기만 늘어놓다 이모티콘 하나 던지고 사라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H양이 이야기 하는 ‘23일’은 그때부터 남자가 카톡 확인도 제대로 안 하기 시작한 날이며, 그 이전부터 분명 징후가 있었다.
1. 어플로 만남 썸남, 이젠 저 혼자만 좋아하는 것 같아요.
이건 H양의 문제라기보다는, 애초에 상대가 ‘둘러보고 온다’는 마음으로 관계에 임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상대가 H양에게 했던 이야기들은 처음 만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할 만한 의무적인 질문이었고, 절반은 그냥 자기소개였다. 두 사람이 시간가는 줄 모르고 나누는 긴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니었고, 다음 날 또 대화하고 싶어서 들뜬 마음에 서로를 찾은 것도 아니었다. 어플로 만나 지금까지 연락을 이어오고 있는 두 사람이 이렇게까지 밋밋하기도 쉽지 않은 일인데, 여하튼 둘은 서로가 ‘낯선 사람’이기 때문에 호기심 반 기대 반의 마음을 가지고 한두 마디씩을 나눴을 뿐이다.
오프라인에서 만나게 된 것 역시, 참 뜬금없고 부자연스러운 형태로 제안이 이루어졌다. 마치 친구들끼리 대화할 때, 아무 얘기나 막 주워섬기다가
“아, 참. 그때 얘기했던 그 식당 이름 뭐였지?”
라고 묻듯, 두 사람은 매번 나누는 비슷한 패턴의 안부 인사를 하다가
“아, 참. 언제 시간 되시나요?”
라고 상대가 물었을 뿐이다. 저런 질문을 할 때에는 흔히들 이번 주말에 뭐 하냐고 묻거나, 아니면 요즘은 좀 한가해졌냐는 이야기를 하기 마련인데, 정말 저 질문이 등장할 거라곤 전혀 예상도 못한 타이밍에 상대는 저 질문을 했다. 저 질문이 나오기 전까지 상대는 H양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내색을 전혀 비추지 않았었다.
그래서 난 이게, 어플에서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인연 닿는 이성들과 연락하며 지내던 남자가, 그냥 H양도 한 번 만나본 것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직 연애경험이 없는 H양은 그걸 젠틀한 접근으로 받아들였고, 상대가 ‘가늘고 길게 아는 사이로’ 지내고자 하며 지속적으로 하는 연락을 H양은 ‘꾸준한 관심’으로 오해한 것 같다.
묻는 말에만 대답할 정도의 관심 밖에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선, 이쯤에서 로그아웃하길 권하고 싶다. H양은 그래도 상대가 아예 연락을 끊은 건 아니니 내게
“‘우리 만난 지 한 달이 넘었는데 왜 이 이후로는 만나자는 말을 안 하는지’를 부드럽게 물어 볼 방법이 없을까요?”
라는 질문을 하고 있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만나봐야 아무 의미 없을 가능성이 98.72% 이상이다. H양이 뭘 잘못해서 이렇게 된 것 아니고, 또 H양만 예민해서 상대가 변했다고 느끼는 것 아니니, 겨우 ‘답장은 온다’는 것을 희망삼아 길 없는 곳으로 더 가지 말고, 여기서 그만 유턴하길 바란다.
2. 연하남과의 장거리 연애, 헤어지는 중입니다.
장거리 연애라고 해서 다 같은 장거리 연애는 아니다. 난 사귀던 중 한 사람이 먼 곳으로 떠나게 된 경우를 A타입, 이전부터 친분이 있다가 한 사람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 연락을 해와 가까워 진 것은 B타입, 그리고 서로의 존재도 모르고 지내다 어떤 계기로 알게 되어 연락하며 지내게 된 사이를 C타입으로 분류한다.
K양 커플은 C타입의 롱디커플이다. C타입에서 흔히 나타나는 문제로는
- 대부분 글이나 목소리로만 서로를 만날 수 있기에 의미부여를 하기 쉽다는 문제.
- 상상력이 120% 발휘되어 서로 대본 쓰듯 연애할 수 있다는 문제.
- 상대를 주변 현실에 있는 이성과는 전혀 다른 생물처럼 볼 수 있다는 문제.
등이 있다. 안타깝게도 K양 커플에게선 저 세 가지 문제가 모두 보인다. 그래서 난 K양 커플이 서로를 도피처로 삼으며 현실의 걱정을 잊는 진통제처럼 연애를 사용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사귀는 사이라서 주고받는 ‘연인의 대화’는 있지만, 두 사람 모두 마음 한편으로는 이 관계가 깨고 나면 사라질 꿈같은 건 아닐까 걱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K양 남친이 했다는 '우린 여기까진가 보다'는 이야기 역시, 괴상하며 비현실적이다. K양은 그와 하룻밤 연락이 안 될 때 온갖 나쁜 상상을 하게 된다는 걸 말했는데, 그런 얘기를 듣고 잘 해볼 생각이 있는 남자라면 당연히 ‘앞으로는 꼭 연락 하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지키기 마련이다. 하지만 K양의 남친은 그걸 자신의 연애경험이 없는 탓으로 돌리거나, K양이 화를 내니 괴로워하며 잠수를 타거나 헤어지자는 결론을 내미는 것으로 해결하려 든다.
지금 K양에겐 불안과 다급함만이, 그리고 상대에게는 죄책감과 책임감만이 남아있는 게 아닌지를 살펴보길 권하고 싶다. 나도 이렇게까지 말하고 싶진 않은데, K양이 더 진통제만 맞고 있을 상황이 아니라서 어쩔 수 없다. 삼십대 중반에 만나 ‘나중에 뭐 어떻게 잘 되겠지’하는 생각으로 삼 년을 만났고, 그 결과 남은 거라곤 삼심대 후반이 되었다는 것밖에 없지 않은가.
이 관계는, 과거 채팅하던 시절에 타 지역에 살던 사람과 연을 맺고 지내는 ‘투명친구’정도의 관계로 유지되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처음부터 두 사람 사이에 어떤 특별한 감정이나 서로에 대한 깊은 관심이 있어서 시작된 연애라기보단, 그냥 우연히, 어쩌다보니, 하는 것들이 모여 덜컥 시작한 연애와 같기 때문이다.
시리도록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둘 모두 맺고 끊지 못하며, 서로가 아니라면 당장 대안이 없고, 나중 일까지 고민할 것 없이 두 사람만 마주보면 되니 지금까지 관계를 이어왔던 것 같다. 두 사람은 3년을 사귀었지만, 서로의 지인을 본 적도 없고, 서로의 가족들과 인사를 한 적도 없으며, 결혼에 대해서도 이야기 한 적 없다. 그런 얘기들을 꺼내면 고개를 돌려 현실을 봐야 하니 안 꺼낸 것 같기도 하고, 둘 다 이 관계의 미래까지 볼 자신이 없었기에 못 꺼낸 것 같기도 하다.
뭘 어떻게 하자는 것에 대해서도, 누구 하나 뚜렷하게 말하는 법이 없다. 헤어짐에 대해서도, K양은
“남친이 단호하게 헤어지자고 한 건 아니지만 헤어짐을 암시하는 말을 했습니다.”
라는 이야기를 할 뿐이다. 두 사람이 비행기를 타고 가야 만날 수 있는 곳에 사는 것도 아니고, 둘 사이에 38선이 그어져 있는 것도 아닌데, KTX타고 잠깐 졸다 보면 가서 만날 수 있는 곳에 살면서도 그냥 딱 이렇게만 있을 뿐이다. 이전에도 이러다가 어느 날 남친이 연락을 해오고, 그렇게 남친이 돌아오면 K양이 받아주었다고 하는데, 이번에도 재회하게 된다면 비슷한 형식일 것 같다. 둘 중 하나가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바다에서 표류하고 있는 듯한 연애는 이제 그만 둬야지.”
하는 마음을 먹지 않는 이상, 다음에도, 그 다음에도 비슷한 방식으로 헤어졌다 만났다 하게 될 수 있을 것 같고 말이다.
“제가 마지막 전화할 때 전화 나중에 해도 되냐고 물었는데, 남친은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하면서 대답을 안 하고 잘 지냈으면 좋겠다고 울먹이며 끊었습니다. 전 그게 이별통보 같아서 걱정하고 있습니다.”
난 제발 지금 둘 중 누구라도 확실하게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다. 둘이 연인이라면서 왜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대화하지 못하고, 이렇게 짐작하고 예상하고 기대만 하는가. ‘결혼’이나 ‘이별’이라는 단어를 말한다고 누가 며칠 안에 죽는 것도 아닌데, 둘 사이에선 그런 확실한 단어들이 볼드모트의 이름을 이야기 하는 것처럼 여겨지며 그것과는 아주 먼 이야기들만 빙빙 돌려 말하고 있지 않은가.
K양의 분노를 뒤집어 쓸 각오를 하고, 난 이 연애를 ‘3년의 역할극’이라고 말하고 싶다. 무슨 암시를 하고 잠수를 하고 또 다시 돌아오면 불문율처럼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고 만나기를 반복하는 건, 건강한 연애가 아니다. 이렇게 지내다 다시 또 상대에게서 연락이 오면 둘은 연인처럼 지낼 수 있겠지만, 그렇게 3년을 더, 그 다음 3년을 더 만난다고 해서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길 권한다.
소설가 한강이 <채식주의자>로 맨 부커 인터내셔널 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직 안 읽어 본 소설이라 읽으러 가야 하니, 오늘 배웅글은 생략하기로 하자. 다들 즐거운 화요일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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