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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매뉴얼(연재완료)/솔로부대탈출매뉴얼(시즌5)

더 늦기 전에 고백하려다 실수하고 만 남자 외 1편

by 무한 2016. 6. 15.

노랑이(새끼 고양이)가 하룻밤을 무사히 넘기긴 했는데, 여기서 더 나빠질 순 없을 거라 생각했던 것보다 상태가 더 나빠지고 말았다. 먹질 않으니 가죽은 더 후퇴할 곳이 없을 정도로 뼈에 달라붙었고, 그래서 얼굴은 마치 눈알이 튀어나오고 있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변했으며, 입을 벌린 채 겨우겨우 숨을 쉬고 있다.

 

어젯밤, 간헐적으로 박스를 긁어대는 소리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시끄러워서는 아니다. 아주 잠깐 긁어대는 거라 귀를 기울이고 있어야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소리인데, 그게 아파서 그러는 건지, 박스 안이 너무 어둡기에 무서워서 그러는 건지, 배가 고파서 인지, 목이 말라서 인지, 아니면 절박하게 필요한 것이 있어 부르려고 그러는 건지, 한 쪽으로만 기대고 있으니 몸이 아파 자세를 돌리려다 옆으로 넘어져 일어나려 그러는 건지 알 수 없어 소리가 날 때마다 노랑이에게 가서 확인했다.

 

고양이가 아플 땐 강제급여라도 해서 살이 계속 빠지는 걸 막으라고들 하기에, 수시로 가서 물 섞은 통조림을 수저로 떠 입에 갖다 대주고 있다. 그러면 녀석도 배가 너무 고프니 일단 혀로 핥긴 하는데, 입을 벌린 채로 가쁜 호흡을 하고 있으니 잘 넘기질 못한다. 두세 번 삼키고는 고통스러운지 고개를 돌려 버린다. 뽀얀 핑크 빛이던 살들이 탁한 색으로 변해가고, 동공은 크게 확장된 채 다시 작아지지 않고 있다. 손톱만큼 남은 힘으로 몸을 돌려서는 자꾸 구석을 파고들고, 그러다 균형을 잃어 옆으로 넘어지면 허공에 앞발을 휘저어가며 일어서려 한다.

 

노랑이도, 나도, 우리 가족도, 마음속에 주먹만 한 돌멩이가 하나씩 들어가 있는 것 같다. 밤 열한 시, 최소한의 조명만 밝히고 있는 대학병원 일 층 로비에 앉아, 어둠 속에 텅 비어 있는 ‘접수, 수납, 입·퇴원, 제증명’이란 이름들의 창구를 바라보고 있을 때의 기분이다. 병원이 아닌데도, 누군가 이동식 링거 거치대를 끌고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렇다고 또 마냥 가라앉아 있을 순 없으니, 매뉴얼 시작해 보자.

 

 

1. 더 늦기 전에 고백하려다 실수하고 만 남자.

 

5월 11일에 매뉴얼로 발행했던, 근수씨의 ‘그 다음 이야기’가 도착했다. 그 매뉴얼에서 내가 근수씨의 ‘중간고사 전전 말에 상대에게 연극 보러 가자고 제안했던 모습’을 지적하며 타이밍이 엉망이란 얘기를 했는데, 근수씨는 이번 고백을 또 ‘기말고사 전전 날’에 하고 말았다. 이쯤 되면 근수씨에게 무슨‘시험 전전 날 고백 못해서 죽은 귀신’이 붙은 건 아닌가 싶을 정도다. 매뉴얼이 아니라 부적이나 퇴마의식이 필요한 걸까.

 

내일 시험이 있어서 지금 문제를 풀고 있으니 할 말이 있으면 카톡이나 전화로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상대에게, 근수씨는 계속해서

 

“잠깐 할 말 있는데 잠시 시간 좀 낼 수 있어?”

“늦어도 되니까 아무 때나 편할 때 시간 좀 내줘.”

“물어볼 게 있는데 때를 놓칠 것 같아서….”

“저녁 안 먹었으면 같이 저녁 먹으러 가자 잠깐이면 되는데.”

 

라며 집요하게 ‘만나자’고 했다. 짜증이 난 상대가 전화를 걸어 “시험인데 왜 이렇게 신경 쓰이게 하세요.”라고 항의하자, 근수씨는 “그렇게 시험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줄 몰랐네. 미안해.”라는 말만 한 채 전화를 끊었다.

 

이러는 걸 막기 위해 내가 겨우 밥버거 따위만 먹어가며 열심히 매뉴얼을 발행하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남성대원들이

 

- 상대의 사정은 생각하지 않고 내 다급함만 최우선으로 둔 채 들이대는 모습

 

을 보이고 있다. 며칠 전에 발행한 매뉴얼의 남자 주인공 역시

 

“더 늦으면 영영 끝나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라는 핑계로 상대를 불편하게 만들고 말았다. 냉수마찰을 한 번 하고 차분하게 생각해 보자. 그 정도로 다급함이 느껴졌다는 건 이미 연락하기도 불편할 정도로 그 관계가 망가졌다는 걸 자각했기 때문일 수 있고, 아니면 그냥 성격이 급해서 무슨 답이든 얼른 들어야 마음이 놓이기 때문에 자신의 고민을 떠넘기듯 상대에게 던져버리는 걸 수 있다. 둘 중 어느 쪽이든, 과연 그런 상황에서 하는 고백이 성공적일까?

 

고백도, 좀 진짜 고백다운 고백을 한 거라면 나도 이해해 줄 수 있다. 하지만 위와 같은 태도를 보이는 남성대원들이 하는 고백을 보면,

 

“전에 내게 다가왔던 건 날 선배로 생각해서야, 아니면 남자로 생각해서야?”

“난 너도 내게 호감이 있어서 그랬던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야?”

“우리 지금까지 만나는 동안, 날 이성으로 생각해 본 적 없어?”

 

따위의 ‘부담스러운 질문’을 던져 상대를 떠보는 게 대부분이다. 고백을 할 거면 내 마음이 이러이러하다는 걸 밝히며 상대와 만나고 싶다는 걸 전해야 하는 건데, 이 대원들은 그저 상대의 마음이 어떤지를 물어보고 마는 것이다.

 

근수씨도 저 패턴을 벗어나지 못했다. 근수씨는 상대에게 ‘날 친한 오빠로 생각했던 건지, 아니면 이성으로 본 적도 있는지’를 묻곤, 상대가 ‘오빠’로 생각했었다는 뉘앙스의 대답을 하자,

 

“내가 착각했었나…. (침묵) 바쁘다며. 얼른 가 봐.”

 

라는 이야기만을 했을 뿐이다.

 

더 늦으면 안 될 것 같다느니, 지금 하지 않으면 영영 끝일 것 같다느니 하는 얘기들은, 결국 자기 혼자 시작해서 자기 혼자 기한을 정해 자기 혼자 끝내는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가 될 수 있다는 걸 잊지 말자. 저 대화를 끝으로 근수씨는 상대와 완전히 연락을 두절한 채 지내고 있다고 했는데, ‘사귈 거 아니면 남남’이라는 딱 두 가지 선택만 해야 하는 건 아니잖은가. 이번 방학에 뭘 할 예정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는 걸 두고, 혼자 “이 정도면 관계가 틀어진 거죠?”하며 마음대로 또 끝내진 말았으면 한다.

 

“저 혼자 별 짓 다 해놓고, 미련일지 집착일지는 모르겠지만, 알아가면서 점점 마음에 들던 사람은 처음인지라 자꾸 아쉽고 미안하네요.”

 

크고 넓게 생각하자. 학창시절만 해도 1학년 땐 같은 반이어도 잘 모르고 지내다가, 2학년 때 동아리활동을 하며 친해지는 경우도 있잖은가. 중학교 같이 다녀도 안 친하다가 다른 고등학교에 간 후 학원에 다니며 친해지는 경우도 있고 말이다. 근수씨의 경우 상대에게 좋은 첫인상을 보여줬지만 이후 머뭇거리고 집중도 별로 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 실망시키고 말았다. 하지만 여전히 연락의 창구는 열려 있으며 상대도 ‘근수씨가 집요하게 굴지 않는 한’ 대답도 충실히 해주고 있는 상황이니, 여기서 당장 인연 끊느냐 마느냐만 고민하지 말고 좀 길게 보며 가까워지길 권한다.

 

 

2. 한 달 사귄 남자친구. 그와 계속 사귀어야 할까요?

 

우선, ‘멘토’라는 것에 큰 의미를 둔 채 거기에 의지하는 것에서 좀 벗어나셨으면 합니다. 꼭 멘토가 필요하다면, 이미 죽은 사람 가운데 한 명을 골라 멘토로 삼으시길 권합니다. 그러면 최소한 사람에게 사람 이상의 것을 기대했다가 실망하고 상처 받는 일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L양이 현재 고집하고 있는 태도는, 몇몇 여성대원들이 열일곱, 열여덟살 정도에 보이곤 하는 행동과 비슷합니다. ‘키다리 아저씨’를 두곤 그가 자신을 보호해주며 옳은 길로 이끌어줄 거라 믿어버리는 건데, 나중에 뚜껑을 열어보면 그 ‘키다리 아저씨’가 범인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들은 궤변을 늘어놓아 조종하려 들거나, 이쪽이 어떤 말에 겁을 먹을지 잘 알고 있으니 그 부분을 교묘하게 이용하기도 합니다.

 

L양의 멘토라는 사람이 하는 짓거리를 보시기 바랍니다. 치팅데이? 그는 L양에게 사귀는 것은 아니지만 잠시 사귀는 것처럼 스킨십도 하며 연인처럼 지내는 날을 갖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가 분위기 잡으며 워낙 교묘하게 말하니 그럴듯하게 들렸을지 모르겠지만,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을 전문 용어로 ‘쓰레기’라고 합니다. 그가 어른인 척 하며 L양에게 조언을 해주고 챙겨줬던 건 다 그런 목적이 있기에 잘 해줬던 거지, 멘토로 지내다 보니 자연히 연인의 감정이 싹튼 게 아닙니다.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않은 채, L양의 두 다리로 먼저 설 수 있었으면 합니다. 먼저 이게 되어야 비로소 두 사람이 서로의 ‘동반자’라고 할 수 있는 연애가 되는 거지, 지금과 같은 방식이면 계속 ‘내 기댐을 받아줄 사람’만을 찾게 됩니다. 자신에게 기대라는 사람이 나타나면 덥석 믿곤 기댔다가 상대가 발 빼면 넘어질 수 있고, 동등한 입장에서 만났다가도 L양이 계속 본인 안에 있는 상처와 어둠을 털어 놓아 상대가 부담을 느끼게 될 수도 있습니다.

 

처음 만나면 L양은 조용하고 도도한 모습, 그리고 어느 때는 활발하고 유쾌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만나서 가까워지다 보면 L양은 상대에게 기대기 위해 자신의 아픈 부분, 자신의 힘든 부분, 자신의 어두운 부분들을 모두 얘기합니다. 당장이야 상대가 그것에 다 공감하고 앞으로 자신이 보살펴주겠다 얘기할 수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 그렇게 계속 듣게 되는 부정적인 이야기들은 상대를 고장 난 사람처럼 보게 만들며, 한쪽이 일방적으로 의지하게 되면 자연히 그 관계의 권력도 기울기 마련입니다.

 

제가 L양의 남자친구가 된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점점 버거워 할 것이고, 평생 자신에게 힘이 되어줄 거냐고 묻는 L양에게 확답을 해주긴 어려울 것입니다. L양은 제가 L양에게 힘이 되는 사람이라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제겐 L양이 짐이 되는 사람으로 느껴질 수 있으니 말입니다.

 

L양의 문제로 인해 모든 게 끝장난다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L양이 두려워하는 부분, 그리고 L양이 바라는 부분들을 저 역시 가지고 있습니다. 저도 새로 알게 된 누군가와의 관계가 계속해서 좋게 유지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고, 또 오랜 시간 지나도 내게 실망하거나, 날 하찮게 생각하거나, 나보다 다른 사람과 더 친하게 지내며 뒷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내 얘기에 귀를 기울여주는 사람이 계속해서 나를 좋아해줬으면 좋겠고, 내가 좀 모자란 모습을 보여도 여전히 날 응원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삽니다. 그렇기 때문에 임재범이 <여러분>을 부르는 걸 보며 라면국물 같은 눈물을 흘렸던 것이고 말입니다.

 

저 역시 겁이 많고, 마음이 여리고, 정에 굶주려 있고, 때로는 말 없는 짐승들이 더 좋기도 하고, 사람과의 관계가 무섭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날 알아줄 이, 날 사랑해줄 이’만 찾아 구걸하듯 구애하는 것으로 삶을 다 보낼 순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누군가를 믿고 의지했다가 그가 날 하대하는 것을 실시간으로 목격하며 상처만 받을 순 없는 거고 말입니다.

 

누가 내 대신 알아서 뭘 좀 해주길 바라기만 하다 보면, 또 내 의지로는 어려우니 누가 날 옆에서 도와 잘 할 수 있게 협력해주길 바라기만 하다 보면, 처음엔 무릎 꿇고 이쪽에게 구애했던 상대도 점점 오만해지거나 무시가 담긴 태도를 보일 수 있다는 걸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L양이 혼자서도 갈 수 있는 길을 상대와 함께 가는 게 연애인 거지, 상대가 없으면 못 가는 길을 상대 덕분에 쫓아갈 수 있는 게 연애가 아닙니다. 다른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인 거고 말입니다.

 

현남친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 없이 왜 이런 이야기만 적어두었는지 의아해 하실 수도 있는데, 현남친 역시 시간이 지날수록 온 몸으로 기대오는 L양에게 부담을 느끼게 된 것 같습니다. 때문에 이 관계에 깊이 빠지거나 미래를 약속하려는 일 같은 건 하지 않으려는 것 같고 말입니다. 그런 와중에 L양은 계속해서 상대에게 진지하고, 발전적이며, 희생과 헌신을 할 수 있는 관계를 맺어갈 의사가 있는지를 확인하려 드니, 그럴수록 그는 뒷걸음질을 치게 된 것 같습니다.

 

만나 보다 이 사람은 정말 아닌 것 같으면, 그땐 헤어지면 되는 겁니다. L양은 이별을 자신이 버림받는 일이라고만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상대가 공수표만 발행할 뿐 지키지 않으면 그에게 실망해 관계를 정리할 수 있는 거고, L양이 안 볼 때 이상한 짓을 하고 다닌다면 잘라낼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L양은 그런 순간이 와도 오히려 상대에게 해명을 요구하며 그가 순간의 위기를 넘기려 한 이야기들까지 믿어버리고 마니, 훗날 더 큰 배신이나 배반을 당하고 나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는 건 예약된 일일 수 있습니다.

 

지금 친구를 한 명 사귀게 되었는데, 그 친구에게 “넌 평생 나랑 친구할 거지?”, “날 배신하지 않을 거지?”, “내가 실수해도 용서해 줄 거지?”, “늘 나에게 힘이 되어줄 거지?”라는 이야기를 한다면 그 친구가 손사래를 치며 뒤로 물러서지 않겠습니까? 저 말들에 모두 긍정적인 답을 받아도 그게 지켜지지 않으면 의미 없는 것이고 말입니다. 또, 그 친구에게 도벽이 있어서 L양 집의 물건을 훔쳐가는 건 아닌지, 다급한 순간에 자기만 살겠다고 L양을 대신 희생시키려 드는 건 아닌지를 아직 알 수 없으니, 완벽하게 안전한 관계인지를 알아보려는 것에만 목숨을 걸지 마시고, 만나 보며 판단하시길 권합니다.

 

아직 상대와 여름을 함께 보낸 적도 없는데 그를 향한 편도 티켓만 가지고 먼 여행을 떠나려 들지는 말았으면 합니다. 어딜 가든, 돌아올 표는 꼭 마련해 두셨으면 합니다. 그 표는, 거기 가서 정말 남은 생을 거기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찢어버리거나 돌아오는 비행기를 안 타면 저절로 없어지는 것이니, 그 전까지는 꼭 지니고 계시길 바랍니다.

 

 

글을 쓰는 중간중간 노랑이를 챙기다 보니, 벌써 하루가 지나버렸다. 매뉴얼 올려두곤 또 통조림 먹이러 가야 하니, 오늘 배웅글은 생략하기로 하자. 다들 즐거운 수요일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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