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먼저 고백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은, 근 10년 전부터 한 주에 두세 편씩 꾸준히 오는 것 같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난 그게
- 상대로부터 고백 받을 일이 없어서 먼저 고백하는 것.
이라는 치명적인 이유를 가지고 있다면, 먼저 고백하든 나중에 고백하든(응?)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누울 자리가 확보된 걸 확실히 보고 다리를 뻗어도 뻗어야지, 자리가 마땅치 않은데 아무렇게나 누워서 다리를 뻗으면 이후 계속 힘들 수 있다. 운좋게 ‘연인’이라는 간판까지 어찌어찌 걸었더라도, 이후 불편하고 마음 둘 곳 없는 연애를 할 수 있단 얘기다.
여하튼 그건 그렇고. 오늘 사연의 주인공인 N양 역시
“제가 연애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니고, 전 남친에게도 제가 고백을 했습니다. 그리고 전 워낙 돌직구적인 성격이 강해서 고백한다는 것에 거부감이 없습니다.”
라며 파이팅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패기와 열정은 잘 알겠으니 그만 넣어두고, 아래에서 이야기 할 것들을 점검해 봤으면 한다. 출발해 보자.
1. ‘연인’이란 간판을 걸기엔 관계가 빈약하지 않은가?
‘여자지만 먼저 고백’을 하겠다는 대원들의 경우, 고백을 해 승낙을 받으면 그 시점부터 모든 것이 달달하게 변할 거란 판타지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사실 둘의 관계는 이미 시작된 거고, 지금도 사귀자는 말만 안 했지 얼마든 연락을 주고받으며 만날 수 있는 건데, 그건 뒤로 미뤄 놓고 ‘상대의 승낙’을 받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고백할 준비 중이라는 대원들은 공통적으로
“이제는 대화할 소재거리도 많지 않아요.(그래서 빨리 고백해야 해요.)”
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그럴 때마다 난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이젠 나눌 말도 별로 남지 않는 것 같다고 여기게 되는 시점이, 과연 ‘고백할 타이밍’이 맞을까?
뭐, 사귀면서 서로를 알아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순 있겠지만, 할 말도 별로 없고 만나면 낯설고 불편한 상황에서 ‘사귀고 싶다’는 것 때문에 고백을 하면, 그게 연애로 이어지더라도 서로 ‘사랑하는 척’을 하는 연인 역할극이 될 확률이 높다. 연인이 되었으니 스킨십 진도를 나가려는 상대를 경험하거나, 연인이라는 간판은 걸었는데 혼자 좋아할 때와 별 차이 없는 까닭에 마음고생을 할 수도 있고 말이다.
N양의 말을 보자.
“(통화 시)별 영양가 없는 대화만 쭉 이어하다 서로 할 말이 없어져서, 이제 쉬시라고 저 먼저 들어가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N양은
“사실 솔직히, 이 사람이 나한테 마음이 없더라도 계속 만나고 싶네요. 장거리라도 괜찮고 만나기 힘들어도 괜찮고, 연락만 할 수 있다면, 내가 그 사람의 연인이 된다면 다 좋을 것 같네요. 나중에 힘들더라도 그건 나중에 생각하죠 뭐.”
라는 이야기도 하고 있다. 연애의 목적이 그냥 ‘사귀는 것’에 있다는 게 명확히 보이지 않는가?
늘 얘기하지만, 연애는 창업보다 경영이 중요하다. 당장 연인이라는 간판을 건다고 모든 게 해결되는 게 아니니, 목적을 연애가 아닌 상대에게 두고 좀 더 친해지는 게 좋을 것 같다. 지금 N양과 상대의 관계는, 간판을 버티지 못할 정도로 빈약하니 말이다.
2. 점점 망해가는 썸이 짜증나서 고백하려는 건 아닌가?
앞서 말했듯 N양은 ‘고백해서 승낙받아야 한다’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는 까닭에, 이상한 심술을 부릴 때가 있다.
- 연락이 줄면, 나만 상대를 좋아하는 건가 싶어 먼저 연락 안 하기.
- ‘날 안 좋아한다는 근거’를 애써 찾아가며 삐딱하게 바라보기.
- 상대가 애정 담긴 얘기가 아닌 자기 얘기를 꺼내놓으면 실망부터 하기.
‘상대’보다는 ‘연애’에만 관심을 두느라 보인 저런 모습들은, 결국 그 관계를 서서히 와해시키기 마련이다. 상대 입장에선 이쪽과 대화하고 싶어 연락한 건데,
“근데 오빠는 심심할 때에만 나한테 연락하는 것 같네요?”
라는 대답이 돌아올 뿐이니, 앞으로는 괜히 전화했다 핀잔이나 듣는 일 만들지 말자고 생각할 것 아닌가.
빨리 연애가 시작되지 않는다고 해서 이렇게 삐딱하게 바라보며 엉망으로 굴면, 딱히 어떤 갈등이 생기지 않아도 자연스레 멀어지는 법이다. N양의 말을 보자.
“썸타는 것 다운 대화를 좀 하고 싶은데, 그것 말고 그냥 자기 관심사나 좋아하는 것들 얘기, 미래에 하고 싶은 것들 얘기를 해요. 이런 게 정상인 건가요?”
당연히 정상이다. 어디서 어떻게 살아왔으며, 요즘은 어떤 생각으로 살고 있고, 미래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 아닌가. 이래야 정말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 알아가며 친해질 수 있는 거지, 자리 뜨고 나면 사라질
“맛있게 먹었어?”
“재미있었어?”
“힘들진 않았어?”
따위의 이야기나 수 천 번 나누면, 당장은 달콤하고 챙김 받는 것 같아 좋겠지만, 나중 되면 몇 년을 만나도 서로에 대해 아는 게 없는 사이가 될 수 있다. 게다가 이렇게까지 멍석이 깔렸는데 이걸 두고 또 못마땅해 하며 다른 것만 기대하고 있으면, N양에게 남는 거라곤 실망과 서운함밖에 없을 것이고 말이다.
상대가 당직을 선 날 두 사람이 통화한 것도 보자. N양은 상대가 당직을 서는 날 새벽에 연락해 한 시간 넘게 통화해 놓곤, 통화 끝부분에 피곤한 상대가 목소리 쩍쩍 갈라지다 말 수를 줄이자, 그걸 두고
“제가 귀찮아서 그러는 건지 뭔지,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라는 이야기를 했다. 늦은 시간에도 상대가 전화를 받아 길게 통화를 했다는 커다란 긍정의 증거가 있는데, N양은 왜 피곤하고 졸린 상대가 통화를 힘겨워 하는 걸 두고 ‘날 귀찮아하는 것’이라는 부정적 해석만 하고 있는가.
이렇듯 분명 긍정인 신호들도 부정적으로 해석하고, 그런 마음으로 상대를 대하니 점점 관계는 와해되며, 나아가 기대와 달리 계속 멀어지니 ‘고백’으로 승부를 보려 하는 건, 그 결과가 잿빛일 가능성이 높다는 걸 기억해 뒀으면 한다. 이제 해볼 수 있는 게 고백 밖에 남지 않았다며 고백하려 하지 말고, 스스로를 도와가며 주어진 상황에서 상대에게 다가가 보길 권한다.
3. 고백 전후로 주의해야 할 것은?
흐르는 세월을 막을 수 없듯, 고백하겠다는 강렬한 의지로 불타고 있는 N양을 막을 수 없을 것 같다. 어쩌면, 이 신청서를 보내고 매뉴얼을 기다리는 동안, N양은 이미 고백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이미 고백을 했고, 그 결과가 좋지 않다면, 아래에서 이야기 할 것들을 살펴봤으면 한다. N양처럼 일단 상대에게 다 맞춰주고 호감을 내보인 뒤 고백까지 했지만, 그 결과가 좋지 않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나쁜 사례들이다.
먼저, 자신에게 N양이 반했다는 걸 눈치 챈 상대가, 팬서비스 하듯 얼마쯤만 집중을 하며 연애하듯 지내려 하는 건 아닌지를 보길 권한다. 상대가 자신의 마음이 울적하고 답답할 때 산에 올라가 소리 한 번 지르진 않고, N양을 심심풀이로 생각하며 연락하는 건 아닌지를 보자. 이건, 상대가 원할 때에는 연락하거나 만날 수 있지만, 반대로 N양이 원할 때에는 그럴 수 없다는 걸 살피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 다음으로는, 상대가 ‘어쩌면 사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만을 내비치며, 썸 탈 때의 달콤한 분위기만을 즐기거나 자신에 대한 N양의 호감만을 확인하고 돌아가 버리는 게 아닌지를 보길 바란다. 자신에게 고백을 했던 이성을, 그저 ‘자신감 충전소’처럼 생각하며 지내는 사람들이 꽤 있다. 그들은 충전이 필요할 때 와선,
“가득이요.”
라는 이야기로 자신감을 충전한 뒤 돌아간다.
그러면 고백을 했던 쪽에선 이게 ‘또 다른 가능성’인 줄 알고 버선발로 달려 나가 맞이하게 되는데, 이게 습관화 되어버리면 거기서 떡밥만을 기다리며 2년, 3년 보내는 건 일도 아니게 될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다음 주 수요일에 보자’는 식의 말을 던져 희망을 품게 한 뒤, 그 떡밥에 대한 대가로 호감도 확인하고 관심도 받아 만족한 뒤, 그 뒤로 연락을 안 하거나
“수요일에 힘들겠다. 담에 보자.”
라는 식으로 손 털고 나가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일을 두세 번 겪고도 전혀 상황파악을 하지 못하는 대원들도 꽤 많은데, N양은 그러지 말았으면 한다.
고백은 이쪽이 상대에게 호감을 느꼈으며, 그렇기 때문에 좀 더 가까이에서 오래 만나보고 싶다는 마음을 전달하는 게 되어야 한다. 사귀기만 하면 전부 다 저절로 해결되며 상대는 다정하고 자상하며 충성스런 남친이 되고, 또 이쪽의 외로움과 심심함과 지루함이 모두 사라질 거라 생각하며 하는 고백은 실망과 후회와 번민을 낳기 마련이다.
사실 상대와 가까워질 수 있는 많은 기회들은 이미 앞에 펼쳐져 있고, 고백하려는 용기의 반만 그 기회들을 붙잡는 것에 쓴다면 가까워지는 건 쉬운 일이 될 수 있다. N양 역시 상대와의 관계가 기대대로 잘 풀리지 않으며 이제 남은 건 고백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 즈음에야
“이 날 제가 처음으로 먼저 전화를 했습니다.”
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러지 말고 분위기 좋을 때 전화를 많이 하길 권한다.
또, N양은
“아직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서, 사적인 이야기나 깊은 대화는 나누지 않았습니다.”
라고 했는데, 그런 대화는 지금 나눠도 된다. 아니, 지금 나눠야 한다. 썸이라는 게, 연애라는 출발선을 지나기 위해 대기실에서 아무렇게나 앉아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니다. 이미 두 사람의 관계는 진작부터 시작되었으니, 기다리고 기대하느라 가만히 있지 말고, 얼른 부지런히 상대 곁으로 가 걸어보길 바란다. 자 그럼, 다들 즐거운 주말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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