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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매뉴얼(연재완료)/솔로부대탈출매뉴얼(시즌5)

시험에도 떨어지고 심남이도 잃고, 총체적 난국입니다.

by 무한 2016. 10. 22.

고시를 준비할 땐 ‘두더지 모드’에 빠질 수 있다. 찬란한 햇살도 내 것이 아니며 내게는 그저 눈만 부실 뿐이고, 나는 본편에서 물러선 잉여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 수 있으며, 먼저 합격했거나 다른 분야에서 이미 자신의 몫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대단해 보일 수 있고, 그러다 시험에까지 불합격할 경우 난 여기에 소질이 없는 건지, 기억력이나 응용력 같은 뇌의 문제가 아닌지 하는 생각까지를 하게 될 수 있다.

 

또, 고시생활이란 나 홀로 일궈가는 외딴 섬에서의 생활과 같기에, 어쩌다 사람이 나타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같은 고시생인데 가까워질 경우, 동지애나 전우애 뭐 그런 감정까지를 느껴가며 비비고 싶어진다. 함께 밥을 먹으며 시험 볼 과목에 대해 토론을 할 땐, 이미 그 시험에 합격해 원로가 된 기분까지를 느끼게 된다. 결전의 날만 오면 이제 합격하곤 금의환향할 일만 남은 것 같다는 자신감도 좀 붙는데, 그러다 상대만 합격하고 나는 떨어지면, 노래방에 가서 59871번의 노래를 예약하게 된다.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늦어버린 것이 아닐까. 흘러버린 세월을 찾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좋을까.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난 참….”

 

사연의 주인공인 H양도 현재 위와 같은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중인데, 오늘은 H양이 이 시기에 생각해 볼만한 것들을 함께 살펴볼까 한다. 출발해 보자.

 

 

1. 시험결과 물어볼까봐, 사람들도 피해 다니고 있어요.

 

H양이 10년 전 알고 지내던 사람들 중 지금까지 연락이 닿는 사람은 몇이나 되는가? 아마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들 중 대다수와 연락이 끊겼을 것이다.

 

그럼 현재 알고 지내는 사람들 중에서, 10년 후 H양과 계속 연락하며 가깝게 지내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모르긴 몰라도, 10대에서 20대가 되었을 때 주변에 남아 있는 사람과, 20대에서 30대가 되었을 때 주변에 남아있는 사람의 차이는, 제곱해도 무리가 아닐 정도로 후자가 적을 것이다. 고만고만할 땐 동네라도 같으니 자주 볼 수 있겠지만, 취직과 결혼 등으로 갈리게 될 경우 한때 서로가 알고 지냈다는 흔적만 남아 있는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에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데.(중략)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라는 가사가, 삼십대를 코앞에 둔 사람들의 마음을 흔드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시험에 불합격했는데 사람들이 결과를 물어볼까봐 그들을 피해 다니는 건, 일산에 있는 마두도서관 계단에서 앞구르기를 해 무릎에 피가 철철 나던 한 여자가, 이제 모두들 자신을 비웃을 거라 생각하며 도서관과의 인연을 끊는 것과 비슷한 거다.

 

남들은 사실, 누가 뭘 어찌했든 크게 관심을 갖지 않으며, 아무리 엄청난 일이 벌어진 거라고 해도 결국은 잊히며, 조용한 강의실에서 항문으로 슬피 울었던 날카로운 기억을 남긴 것도 아닌 ‘시험에 떨어진 것’정도를 두고두고 기억하지 않는다. 3년 후라면, 3년 후 그때 어디서 무엇을 하는 어떤 사람인지가 중요한 거지, 3년 전 어느 시험에서 H양이 떨어졌다는 걸 기억하며 그때까지도 수근 댈 사람은 없다.

 

그리고 시험에 낙방한 건, H양의 염려와 달리, 오히려 가까운 사람들에게 허심탄회하게 털어 놓으며 속상하다는 이야기를 해야 마음이 가벼워진다. 정말 진부하고 틀에 박힌 ‘괜찮아’, ‘힘내’, ‘잘 될 거야’같은 말이, 혼자 전전긍긍하며 누가 건드리기만 해도 울음이 터질 것 같던 긴장을 녹여준다.

 

H양은 그 시험 하나로 H양이란 사람이 평가를 받는 거라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게 혼자 다 버티며 감당하고 있던 생각들이, 친구나 지인이 해주는 ‘나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들로 가벼워질 수 있단 얘기다. 고시생이라는 게 H양의 전부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걸, 그런 방식으로 분명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걱정과 생각이 많아질수록 H양은 더욱 경직될 수 있으니, 스스로를 사람 없는 곳으로만 몰지 말고, ‘지인찬스’, ‘친구찬스’를 이럴 때 사용하길 권한다.

 

 

2. 낙방으로 인해 피폐해진 삶을 다시 어떻게 가꾸죠?

 

인생은 영원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유한하다. 인생까지 갈 것 없이 ‘청춘’만 하더라도 그렇다. 앞으로 H양이 10년만 더 살아도 H양은 아이 학교 보내는 것에 우왕좌왕하고있는 ‘누구엄마’일 수 있고, 20년을 더 살면 자식을 대학에 보내는 것 때문에 고민, 30년을 더 살면 자식 결혼시키는 것 때문에 고민, 40년을 더 살면 나라에서도 노인으로 인정해 노령연금을 줄 것이다.

 

전에도 한 번 이야기 한 것 같은데, 난 치매에 걸린 고위공직자를 본 적이 있다. 처음엔 그냥 아픈 할아버지라고 생각했는데, 그 분이 어떤 분이었는지를 듣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높은 자리에 있던 분이, 말년에는 요양원에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채로 계신다는 걸 보며 참 뭔가 다 부질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를 했다.

 

H양이나 나도, 늙고 병들면 그 분과 별반 다르지 않는 상황에 놓이게 될 수 있으며, 그건 100년, 200년 뒤의 일이 아니라 고작 40년만 지나도 찾아올 수 있는 일이다. 우리가 앞으로 20년만 더 살아도 이가 빠지고, 무릎이 아프고, 머리는 세고, 피하고 싶은 주름이 우리 얼굴을 뒤덮기 시작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이런 관점에서 H양의 현재 고민을 바라보면, 훗날 H양은

 

‘내가 그때 왜 겨우 그것 때문에 내 삶을 시궁창이라 생각했을까. 그러지 않고 마음껏 즐겨도 되는 거였을 텐데, 왜 그 작은 시험 하나 때문에 쭈그리고 있었을까.’

 

라는 후회를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현재 H양은 친구와 지인을 피하고, 낙방한 자신을 남들이 어떻게 볼까 걱정하며, 이제 당장 뭘 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생각에 자신의 생활을 회색빛으로 칠하고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과거에 실패했던 기억들까지를 다 가져와선,

 

‘다른 사람을 잘만 되는데, 나는 안 되는 사람인 건가….’

 

하는 생각까지를 하고 있는데, 그건 웃으며 보낼 수 있는 하루를 우울하게 보내도록 만들 뿐인 생각이니, 자신부터 자신을 돕는다는 생각으로 그 생각들을 떨쳐내려 노력했으면 한다. 낙방한 ‘지금 이 순간’으로만 시야를 좁히지 말고, 멀리, 크게 바라봤으면 한다.

 

 

3. 심남이와의 일은요?

 

H양은 현재 상대와의 관계에서도, 낙방 후 이상할 만큼 스스로를 학대하며 지내는 중이다. 시험 전 대화와 시험 후 대화를 비교해 보자.

 

<시험 전>

상대 – 점수 이렇게 나왔어요!

H양 – 우와! 잘 봤네!

상대 – 그리고 H양 친구 봤어요. 00 근처에서.

H양 – 내 친구?

상대 – 전에 왜 그 블라블라.

상대 – 아, 저 시험 잘 본 거예요? ㅋㅋ

 

<시험 후>

H양 – 요즘도 바쁘징?

상대 – 공부 안 하고 쉬고 있어요.

H양 – 머하면서 지내?

상대 – 친구들 만나고 있어요 ㅋㅋ

H양 – 신나겠군여

상대 – 전 근데 돌아다니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H양 – 정적으로 노는구나 ㅎㅎ

(중략)

H양 – 나는 살까지 찌고...

 

좋지 않다. 예전에는 심남이가 H양에게 들이대면 H양이 귀여워해주며 대화를 나누는 식이었다면, 지금은 H양이 상대에게

 

“플필사진 네 얼굴로 바꿔봐.”

“뭐해?”

“안녕.”

 

하며, 약간의 상사병 증세를 보이고 있다. 이러지 않고 그냥 약속 잡고 만나거나 통화를 해도 되는 건데, H양은 상대가 보내는 답장 시간에 신경을 쓰며, 상대의 말 한 마디에도 큰 의미를 부여해 일희일비 하는 중이다.

 

자신감 넘치고 도도함이 묻어날 정도는 아니더라도, 그냥 같이 시험을 준비하며 친하게 지낼 때의 모습으로 돌아오길 바란다. 그래야 상대도 예전처럼 H양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거지, 지금처럼 아픈 모습, 힘든 모습, 뭔가 잘 안 풀리는 모습만 보여주면 H양은 분위기를 무겁게 만드는 사람이 되고 만다. 시험 전 H양은 생기 넘치는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병원에 장기 입원한 사람의 분위기만 풍기고 있지 않은가.

 

부정적인 얘기를 최대한 줄이고, 상대에게 H양의 즐겁고 행복한 모습을 다시 보여줄 수 있길 바란다. 상대는 시험 합격하고 H양은 떨어졌다고 해서, 이제 전처럼 어느 과목에 대한 이야기도 나눌 수 없으며 상대에게 가르침만 받거나 상대보다 열등한 사람이 된 게 아니다. 이렇게 뜬금없이 갑자기 ‘을’의 마음으로 매달리는 건 둘의 썸을 망치는 지름길이니, 자폭하거나 자학하지 말고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보길 권한다.

 

 

즐거운 주말이다. 오늘은 저녁약속이 있어서 배웅글은 생략하고 곧바로 나가야 할 것 같다. 자 그럼, 다들 즐거운 주말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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