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그래도 추운 날 찬물을 끼얹는 것 같아서 미안한데, 여자사람이 다가온다고 해서 무조건 다 그린라이트인 건 아니다.
“제 친구들이 말하길, 여자가 먼저 연락할 때 많고, 대화가 끊이질 않으며, 만나는 것에도 전혀 거부감을 보이지 않는다면 사귈 일만 남은 거라고 하던데요? 다들 더 늦기 전에 얼른 고백하라고 하던데….”
보통의 경우는 그렇지만, 상대와의 관계가
- 상대는 나 말고도 엄청 많은 사람들과 연락하고 지냄.
- 상대는 일주일에 5일은 약속이 있음.
- 대화 주제가 대부분 ‘나 지금 이거 해’라는 것임.
일 때에는, 그 ‘다가옴’이라는 게 상대의 ‘사교성과 수다스러움’에 기반을 둔 친목에 가깝다고 보는 게 맞다. 상대에겐 ‘진입장벽’이라고 할 만한 게 없어서 금방 가까워진 것이며, 전문용어로 ‘좋은 오빠동생’(응?)이라고 하는 관계를 맺으려는 시도로 봐야 한단 얘기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Y씨는, 자신이 마시려고 들고 있던 김칫국 그릇을 내가 툭 쳐서 엎지르게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게 아주 못 쓰는 관계는 아니며, 이 관계를 통해 Y씨가 배울 수 있는 것들도 많으니, 그 지점들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출발.
1. 발굴한 관심사들 활용하기.
Y씨의 문제는, 대화를 통해 상대의 관심사를 여러 개 발굴해 놓고도, 그걸 활용하지 않은 채 ‘새로운 관심사’를 발굴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건 마치 내가 어학공부를 할 때 하는 짓과 비슷한데, 책 하나를 골랐으면 그걸 끝까지 보는 게 아니라 몇 장 보다가 다른 책을 다시 고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겠다.
내가 Y씨와 상대와의 대화에서 볼 수 있었던 관심사만 해도
- 쌀국수
- 뮤지컬
- 드라이브
- 캘리그라피
정도로 차고 넘치는데, 저 주제들은 한 번 나왔다가 이후 다시 등장하지 않았다. 책으로 치자면 네 권이나 샀는데 한 권도 끝까지 읽지 않고 다음 책을 또 산 것과 같은 것이다.
상대가 자신을 ‘뮤지컬 덕후’로 칭하기까지 하는 상황에서, 그걸 활용하지 않은 채 다른 얘기만 하고 있는 건 참 안타까운 일이다. 혹시 뮤지컬 가격이 너무 비싸서 엄두를 못 내고 있는 거라면, 누군가 시간이 안 맞아 양도하려는 뮤지컬티켓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 거고, 그것도 부담스럽다면 뮤지컬은 접어두고 위에 있는 다른 주제로 ‘만남’까지를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저 상대에게 뭔가를 묻고 상대의 대답에 대해 리액션을 하는, ‘방청객’의 입장에서 벗어나도록 하자. 상대 혼자 무대 위에 있고 Y씨는 방청석에 앉아 손들고 하나씩 질문하는, 그런 관계를 형성해서는 안 된다. Y씨의 질문에 상대가 길게 대답해주면 겨우 그것만을 가지고 혼자 흐뭇해하며 다음 질문을 준비하지 말고, 주제가 튀어나왔으면 그 주제를 ‘만남’까지 이어가보길 권한다.
2. ‘연애’와 관련된 이야기는 굳이 할 필요가 없다.
Y씨가 열심히 질문을 해 상대로부터
“연애? 남자가 있어야 하지 ㅎㅎㅎ 나 좋다는 남자가 어디 있겠어. ㅎㅎㅎ”
라는 대답을 들었다고 해서, 이제 Y씨가 고백만 하면 두 사람이 곧바로 러브러브 모드로 돌입하는 게 아니다. 저 “나 좋다는 남자가 어디 있겠어.”라는 말에는,
- (내가 정말 훅 반할 정도로 잘 생기고, 매너 좋고, 착하고, 다정하고, 때로는 박력 있게 날 이끌기도 하며, 어느 땐 나 밖에 모르는 바보처럼 날 챙겨줄 사람 중) 나 좋다는 남자.
라는 의미가 생략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 말이다.
내가 자꾸 이렇게 부정적인 이야기들을 하는 건, Y씨가 저런 대화하는 걸 상대에게 ‘사귈 가능성을 확인 받는 것’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Y씨는 상대의 이상형을 묻고, 크리스마스엔 남친이랑 보내야 하지 않겠냐고 묻고, 왜 연애 안 하냐고 묻고, 또 일부러
“아는 남자사람들 많은 것 같던데, 그 중에 괜찮은 사람 없어?”
라고 물어 그녀가
“걔들은 남자가 아냐 ㅋㅋㅋ”
라고 말하면 또 ‘아, 나만 남자고 걔들은 아니라는 얘기? ㅋㅋㅋ 내가 경쟁자 올킬한 거? ㅋㅋㅋ’라는 생각으로 어깨에 힘을 주는데, 역시 충격과 공포의 얘기가 될 수 있겠지만 저 말은
“오빠도 아냐 ㅋㅋㅋㅋ”
라는 이야기일 수 있다. 그래버리면 Y씨는
- 내가 이러려고 좋은 오빠 하겠다고 했나, 자괴감 들고 괴로워.
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으니, 자꾸 그렇게 그 부분만 노리며 돌려 말해 떠보려 하지 말고, 저 위에서 말한 것처럼 ‘더 자주 연락하고, 더 자주 만나는’ 것에 더욱 집중하길 바란다.
3. 내 표현이 상대에겐 어떻게 느껴질지 신경 쓰기.
타인이 나에 대해 갖게 되는 이미지는, 실제로 내 마음을 전부 들여다본 뒤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내가 한 말이나 행동, 그리고 습관적으로 하는 것들을 통해 만들어지는 거다. 전에 한 번 이야기 한 적 있지만, 난 글을 쓰는 까닭에 지인들과 있을 때
“이거(이 이야기) 나중에 써먹어야지.”
라는 이야기를 종종 하곤 했는데, 지인 중 하나는 내 저런 말 때문에 날 ‘에피소드로 써먹을 생각만 하며 글을 꾸며내려는 인간’ 정도로 여긴 적 있다. 나는 ‘활용하겠다’는 의미로 한 말이었는데, 저런 표현 때문에 오해가 생겼던 것이다. 때문에 이후 난 가깝고 편하기에 별 생각 없이 가볍게 말하게 되는 걸 조심하고 있으며, 내 말이 누군가에겐 투박하거나 무례하게 들리지 않을까 신경쓰고 있다.
Y씨의 경우,
“밥이나 먹을래?”
“(가까이에서 만나니)멀리 안 나가도 돼서 너무 좋네.”
“그래 택시 타라. 무섭다 요새 ㅋㅋㅋ”
“크리스마스 전에 솔로탈출 가능?”
등의 이야기를 상대에게 한 적 있는데, 저런 표현들은 순화되거나 생략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Y씨 말고도 뭔가를 제안할 때 “~나 할래?”라고 묻는 남성대원들이 상당히 많은데, 굳이 ‘~나’라고 말할 필요는 없다. 딴에는 상대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가볍게 묻는 거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그 태도가 무성의하거나 무례하게 보일 수 있다. 어느 남성대원은 썸녀에게
“이 시간에 무슨 공부야 ㅋㅋ 잠이나 자.”
라고 이야기를 한 적도 있는데, 그 대원이 속으로 생각한 건
“너무 늦은 시간 아니야? 일단, 지금은 자는 게 나을 것 같아.”
였지만, 표현이 저랬던 까닭에 받아들이는 사람은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다.
이건 내가 Y씨에게 글 몇 줄로 설명해 단번에 다 고칠 수 있도록 돕기 어려운 부분이니, Y씨 본인이 다른 사람들과 주고받은 대화들을 보며 그때그때 교정해 나가길 권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적혀있는 문장만 쭉 읽으며 훑어 내려가지 말고, ‘이 대화가 무슨 주제로 시작해서 결국은 어떻게 끝났나, 특정한 지점에서 상대가 대답하지 않은 건 무엇 때문인가?’를 크게 보며 파악해 봤으면 한다.
하나 더. 모든 문장에 ‘ㅋㅋㅋㅋㅋㅋㅋ’를 이어 쓰기 바빠, ‘대충 던지는 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도 곰곰이 생각해 보길 바란다. “집에 버스타고 가는 중이야?”라고 물어도 되는 걸, “집 가겠네 ㅋㅋㅋㅋㅋ”라고 표현하고 있진 않은지를 꼭 살펴봐야 한다. ‘ㅋㅋ’의 노예가 되어 거의 모든 문장을
“약속있어? ㅋㅋㅋㅋㅋ”
“역시 ㅋㅋㅋㅋㅋ”
“코감기 짜증나 ㅋㅋㅋㅋㅋ”
라고 적으면, 사람이 좀 모자라 보일 수 있다. 그리고 대답을 할 때는 대답을 해야지, 그것마저 ‘ㅋㅋㅋㅋㅋㅋ’로만 대답하면 그냥 그러다 끝나는 아무 의미 없는 대화가 될 수 있다는 것도 기억해 뒀으면 한다.
난 Y씨 친구나 지인들처럼 이 관계를 ‘확실한 그린라이트’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상대와 더 가까워질 좋은 기회라고는 생각한다. Y씨는 현재 연애만을 꿈꾸며
- 그녀가 아는 남자들 중 내가 제일 연인이 될 가능성이 높은지?
- 뭐라고 고백해야 상대가 승낙을 해 연인이 될 수 있는지?
- 상대에게 답이 늦게 올 때도 있는데, 그건 부정적인 의미인지?
- 나도 그냥 ‘아는 오빠 중 한 명’인 건 아닌지? 고백하면 차이는 건지?
등의 질문을 하고 있는데, 크리스마스 전에 안 사귄다고 세상의 종말이 오는 건 아니니 일단 좀 진정하란 얘기를 해주고 싶다. 혹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옆구리가 허전하다는 이유로 두 사람이 운좋게 사귄다 해도, Y씨는 일주일에 평균 5일을 다른 사람들과의 약속으로 보내는 상대 때문에 멘탈이 말라 비틀어질 수 있다.
그러니 유도하자. 그녀가 Y씨와의 관계에 한 발짝씩 더 가까워지도록 초대하자. 카톡대화 위주의 현 관계에서 통화를 늘리고, 둘이 만나서 밥 먹는 게 아무렇지도 않을 정도로 자연스레 만나자. 그러면서 가까워지는 게 먼저지, 현 상황에서 ‘세 번 더 만나고 고백?’같은 걸 생각하며 혼자 준비할 필요 없다. 그렇게 만나다 둘 다 집에 들어가기 싫어 조금만 더 걷자며 걷게 되었을 때, 고백은 그때 하면 된다. 어떻게 좀 계획을 짜서 크리스마스 전까지 뭔갈 만들려고만 하지 말고, 순풍이 부는 지금 돛을 펴고 자연스레 나가다 도달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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