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이성과의 교류라는 것 자체가 없다가 난생 처음으로 여자사람과 단둘이 만나게 되었을 때, 헛소리 따위를 하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내 경우를 생각해 보면, 무슨 얘기를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긴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이거 내 옷 중에 제일 좋은 옷이야. 다른 옷은 그냥 막 입는 옷들이야.”
라는 이야기를 하곤 다시 또 긴 침묵을 지켰던 것 같다. 그녀 입장에서 보면 뜬금없이 ‘옷 없음 고백’을 해온 것일 텐데, 여하튼 난 저걸 나만의 흑역사라고 생각하며 살다가, 많은 시간이 지나 연애사연을 받기 시작하며 이십대가 되어서도 ‘옷 없음 고백’의 흑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는 남성대원들이 많다는 것을 보곤 동지애를 느끼기도 했다.
상대가 하는 다른 남자 얘기에 민감하게 반응한다거나, 상대가 좋아한다는 노래 제목 또는 영화 제목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그리고 나와 만나서 같이 있는 시간에 아주 잠시라도 지겨운 듯한 반응을 보이는지 아닌지를 매의 눈으로 관찰하고 있는 것 등도 마찬가지다. 나 역시 여린마음 동호회 회장인 까닭에, 꼬꼬마시절 처음으로 이성과 단둘이 노래방에 갔을 때 상대가 이별노래를 부르자
‘아…, 저건 다른 남자를 생각하며 부르는 노래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시무룩해진 적도 있다. 상대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당시 유행하는 노래나 좋아하는 노래 부른 것일 텐데 말이다. 상대가 같은 성당에 다니는 오빠 중 나와 같은 반인 종섭이가 있다는 얘기를 했을 땐,
‘그럼 얘는 나랑 친한 것보다 종섭이랑 더 친하겠지? 종섭이를 좋아하는 건가? 왜 종섭이 얘기를 한 거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위와 같은 소심하고 염려 가득한 모습을 떨쳐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성을 또 만나보는 것이다. K군은 처음 실수에 대한 트라우마를 지닌 채 현재
‘모든 걸 다 알고 준비한 후 시작하고 싶다. 이대로라면 좋은 사람을 만나도 말 한 마디 제대로 못한 채 놓치게 될 것 같다. 철저하게 준비해 능숙해진 후에 누군가를 만나야겠다.’
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게 어떤 마음인지 모르는 건 아니지만 K군이 원하는 ‘능숙함’은 직접 해봐야만 느는 것이다.
운전이라고 생각해 보자. 난 처음 면허를 딸 때 ‘변속 타이밍’이 언제인지를 대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아는 건지 궁금했다. 그래서 정말 여러 사람에게 물어봤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소리와 감으로 안다’고 대답했다. 수동차량을 몰아본적 없는 나로서는 대체 그 ‘소리와 감’이 뭔지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알 수 없었고, 대략 ‘2000~2500rpm 사이에서 변속’이라는 답에 희망을 가진 채 연수를 받기 시작했다.
그런데 실제로 차를 몰기 시작하니, 계기판의 눈금이 2000~2500rpm까지 올라가는 걸 정확히 확인한 뒤 변속을 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정면에서 눈을 떼 사이드미러를 보는 것도 어려워 미칠 것 같은데, 계기판의 눈금을 쳐다보고 있다가 기준치까지 rpm이 올라가는 걸 확인한 후 변속할 순 없었다. 그래서 이제 난 뭘 어떻게 해야 하나하고 고민하기도 했는데, 한 며칠 차를 몰며 연수를 받고 나니 나도 그 ‘소리와 감’이라는 걸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냥 이렇게 몇 번 차를 몰아보면 알 수 있는 걸, 사람들에게 대체 어떻게 알게 되었냐고 물어보며 그 방법을 알아내려고 했으니, 그들도 설명해주기가 참 곤란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난 K군에게, 일단 시작을 해서 좀 하다보면 저런 변화들이 찾아올 테니, 너무 겁먹은 채 ‘잘하게 될 수 있게 된 후 시작하겠다’는 마음만 품고 있지 말고 시작해 보란 얘기를 해주고 싶다. K군은 무슨 내년에 뭘 하고 내후년에는 뭘 해서 어떤 사람과 어떤 연애를 하겠다는 것을 계획처럼 세워 지켜나가려고 하던데, 지금 못 하고 안 하는 건 내년이든 내후년이든 계속해서 그 상태일 가능성이 높다.
연애편지를 써서 상대에게 전달하고 싶은데 맞춤법과 띄어쓰기에 완벽하지 않다며, 내년이나 내후년까지 한국어 문법 공부를 한 뒤 편지를 쓰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K군도 그를 보며 답답하게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런 사람을 보며 K군이 느낄 감정을 내가 현재 K군을 보며 느끼고 있으니, 무슨
“제 인생에 있어 연애나 여자에 대한 태도를 어떻게 정립해야 하는지, 이 부분에 대한 조언을 얻고 싶습니다.”
라며 너무 눈에 힘을 준 채 묻지 말고, 아는 여자사람에게 연락해 이번 주 수요일에 저녁 같이 먹자는 얘기부터 해보길 권한다. 그렇게 만나보다가 막히거나 안 되는 부분이 있을 때 내가 물어야 나도 도와줄 수 있는 거지, 만나보지도 않은 채 책상 앞에 앉아 ‘연애나 여자에 대한 태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으면 나도 같이 상상의 나라에 들어가 뜬구름 잡는 얘기밖에 해줄 게 없다. ‘일단 만나야 한다’는 게 이성에게 익숙해질 수 있는 제 1원칙이라는 걸 기억한 채, 일단 인사부터 건네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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