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보낼 사연신청서에
“싸웠다기보다는 여자친구가 서운한 점을 토로하면 전 그걸 고치겠다고 약속하는 편이었습니다.”
라고만 적어서 보내면, 난 둘이 뭘 어쨌다는 건지 알 방법이 없다.
“그녀가 제게, 오빠를 너무 사랑하지만 서로가 너무 달라서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미래에 더 추억이 많아져서 끝내기 힘들어지기 전에 지금 끝내는 게 맞는 것 같다, 라는 이야기를 하며 이별통보를 했습니다.”
라는 부분 역시 마찬가지다. 이게 교통사고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면, 무엇을 어떻게 하다가 왜 사고가 났다는 얘기는 생략한 채, “상대가 합의를 안 해줘 어려운 상황입니다. 보험사에서는 저보고 설득해 보라고 하고요.”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겠다. 매뉴얼을 통한 신분노출이 두려우면 각색을 하거나 요청하더라도 ‘본 이야기’는 다 알려줘야지, 그런 거 없이 결과만 적어서 보내면 나도 해줄 말이 없다.
그래서 K씨의 사연도 ‘발행 조건 미달’로 분류한 채 그냥 넘기려고 했는데, 카톡대화까지 열어서 읽다보니 ‘사연신청서에 대충 결과만 기입한 문제’라는 것이 K씨가 연애 중 보인 문제와 맞닿아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대화를 하나 보자.
K씨 – 자기 잘 잤어요?
여친 – 웅웅 ㅎ 오빠야는?
K씨 – 나도 잘 잤지요 ㅎㅎ
(이후 점심시간)
여친 – 배부르당 점심먹었오?
K씨 – 웅 ㅎ 김치볶음밥 자기는?
여친 – 난 순댓국 ㅎㅎ
K씨 – 맛있겠다.
(퇴근 이후)
K씨 – 자기 퇴근 했어요?
여친 – 웅웅 ㅎ 지금 쟈철타고 집 가는 중.
K씨 – 웅 ㅎㅎ 수고했어요!
‘결론 보고’만을 하는 대화의 연속이다. K씨는 거의 대부분의 대화를 저런 식으로 진행했는데, 저기다가 겨우
“그래요. 잘자융. 사랑해~”
라는 멘트 한 숟가락 더한다고 그게 마음까지 채워주는 연애로 바뀔 수 있을까? K씨가 한 번이라도 더 연락하고 열심히 대답하려고 노력했다는 게 분명한 사실이긴 한데, 그냥 저런 식의 대화가 그 빈도와 분량만 늘어난 거라면, 시간이 지날수록 여친이 공허함과 부질없음을 느끼는 건 필연적인 거란 얘기를 해주고 싶다.
물론 저렇게 지낼 경우 특별히 싸울 일도 없고, 감정이 상할 일도 없긴 하다. 그런데, 지겹다. ‘아무 일도 없는 것에 대한 지겨움’이라고 할까. 의무적으로, 그리고 습관적으로 안부를 묻고 대답하고 주말쯤엔 만나서 밥 먹고 다시 집에 들어가고, 다음 주엔 또 한 주 파이팅, 밥 먹었냐, 수고했다, 쉬어라, 잘 자라, 뭐 그러는 일의 반복이다. K씨의 여친은 K씨에게
“오빤 진취적이지 않은 것 같다.”
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난 저 말을 K씨처럼 ‘자기계발’에 대한 이야기로 해석하지 않는다. 직업과 개인적인 비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 뭐 하자고 리드하는 일 없이 하고 싶은 거 물어본 뒤 맞춰주려 함.
- 이 사람과 사귀며 경기도 외곽으로 나갈 일이 없을 것 같음.
- 같이 어디를 가도, 그냥 보호자가 날 데리고 온 느낌임.
- 나쁘진 않지만 신나지도 않고, 그냥 ‘무난함’으로 점철된 듯함.
이란 의미들이 포함되어 있는 말이라 생각한다.
이게 꼭 K씨의 잘못이며 K씨가 고쳐야 할 부분이란 얘기는 아니다. 그냥 성향 자체가 K씨는 정적이며 둘만의 고립된 연애에서 평안을 얻는데, 상대는 동적이며 다이나믹한 데이트를 추구하는 것에서 즐거움을 얻는 타입이라 그럴 수 있다. K씨는 ‘하고 싶다는 거 해주고, 웃는 얼굴로 매사에 긍정적인 리액션만 해주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상대는 ‘내가 생각하거나 경험하지 못했던 거 보여주며, 카리스마 있게 날 이끌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말이다.
연애 중 이런 부분에 대한 조율이 좀 이루어졌어야 하는데, ‘당장은 아무 문제도 없다’는 생각 때문인지 K씨는 이 부분에 대해 조금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상대 역시 어쨌든 K씨가 아무 노력도 안 하는 건 아니라서 말을 꺼내기가 힘들었던 것 같고 말이다. 만나는 날이면 K씨는 자신이 상대가 있는 쪽으로 가려했고, 뭐 하고 싶냐고 물으며 하고 싶다는 걸 해주려고 했으니, 상대로서도 K씨가 최선을 다하는 것 같긴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워지지 않는 결핍을 느끼며 그저 ‘우리가 안 맞아서 그런 것’이란 결론을 내리고 만 것 같다.
K씨의 짧은 사연에 대해 내가 해줄 수 있는 얘기는 여기까지다. K씨는 여친이 ‘10가지 중에 9가지가 안 맞는 것 같다’고 한 이야기에 대해 내게 묻기도 했는데, 이별 직전 둘이 며칠간 나눈 짤막한 카톡대화만으로는 나 역시 무엇이 문제였는지를 알아낼 방법이 없다. 이별 후 K씨가 ‘바뀌라는 대로 바뀔 테니까 헤어지지 말자. 굳이 헤어질 필요까진 없는 거 아니냐’는 주장을 하는 것으로 봐선 역시나 지금까지 ‘상대가 좋아한다는 거 다 해주면 문제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렇게 상대를 뒤따라가며 시중드는 것 말고, 앞장서서 이끌며 상대가 상상도 못했던 것들을 보여주는 것에 상대는 매력을 느낀다는 걸 잊지 말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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