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도 계산을 한다. Y양이 남친에 대해 완전히 마음에 든 건 아니지만 그래도 조건이 좋으니 만나보기로 했던 것처럼, 남친 역시 Y양이 완전히 마음에 든 건 아니지만 당장 나와 연애하는 것에 동의하니 그냥 만나볼 수 있는 거다. Y양은 그가 공부를 모두 마치고 사회에 나가면 그래도 한 자리 하게 될 테니 만난 거라면, 상대는 현재 밥 사먹고 폰 요금 내면 사라지는 쥐꼬리만 한 연구비 받는 상황에서도 Y양과 연애가 가능하니 만난 거라 할 수 있겠다.
천오백 자 정도로 끝내야 하는 매뉴얼이니 빙빙 돌지 말고 바로 가보자. 둘이 연인이긴 했지만 사실 큰 애정도 없고, 서로를 위한 희생도 없었으며, 자로 잰 듯한 계약관계처럼 만나왔다는 걸 Y양도 알지 않는가. 친구관계라고 쳐도 이건 같이 무모한 짓까지 하며 즐거워하는 같은 반 단짝친구라기 보단, 학교는 다른데 학원이 같아서 학원수업 후 집에 가기 전까지 같이 컵라면 먹고 학원차에서 수다 정도 떠는 관계에 가까웠다.
Y양은 현 상황에서 내게
“이 사람은 저랑 결혼할 생각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결혼생각 자체가 없는 건가요?”
라고 묻는데, 답이 후자라고 해서 Y양에게 희망이 생기는 건 아니다. 혹 Y양이
‘나랑 결혼할 생각이 없는 건 아니고 당장 결혼할 생각이 없는 것일 뿐이니, 이 사람이 졸업할 때까지 참으며 만나봐야지.’
라고 생각한다면, Y양은 그 기다림의 시간을 훗날 모두 배신으로 돌려받게 될 가능성이 높다. 상대는 이미 ‘기다리고 말고는 너의 선택이니 책임도 너의 것’이라는 의미로 ‘생각해 봐’라는 말을 해놨으니 말이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거기서 그렇게 기다리고 있을 게 아니라, 진작 화도 좀 내고 상대를 불편하게도 했어야 한다. Y양의 남친은 커피숍에 같이 가서도 폰으로 게임을 하며 Y양의 말을 건성으로 듣고, Y양과의 데이트 중 동생 퇴근시간이 되자 같이 집에 들어가야 한다며 가기도 했으며, Y양이 해보고 싶다는 건 전부 ‘나중에’로 미뤄둔 채 다시 말을 꺼내지 않았고, 결정적으로 결혼까지 고려하는 거라면 자신과 만나는 걸 잘 생각해 보라고 하지 않았는가.
당장 그렇게 다 참고 이해하며 지속한다고 ‘결혼’이 보답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다. Y양이
“저는 사소한 감정 스크래치 같은 경우는 그걸 또 꺼내서 대화하는 게 쪼잔하다고 생각해 그냥 넘기는 편입니다.”
라고 말한 걸로 봐서는 이게 Y양 성격과도 연관이 있는 것 같은데, 그렇게 너무 많은 것을 그냥 넘기다보니 두 사람의 관계는 짐작과 생략과 덮어둠으로 엉망이 되고 말았다. 상대도 “아니야. 쉬어.”로 덮어두고, Y양도 더 말을 하지 않은 채 넘어가니, 연인이란 간판을 걸고 있으면서도 서로 무슨 생각을 어떻게 하고 있는 건지에 대해선 전혀 모르게 된 것 아니겠는가.
속으로는 불만과 서운함과 혼란을 품고 있으면서도 그냥 잘 지내는 척 자리 뜨면 사라질 이야기로 카톡대화를 채우고, 확실하게 의사를 밝혀 서로의 생각을 확인해야 하는 시점에도 선문답 같은 얘기들만 나누고 있으면 답이 없다.
Y양 – 나 혼자 기싸움 하는 기분이지.
남친 – 흠...
Y양 – 자기는 어리둥절이겠지. 얘가 왜 이러나 하고.
남친 – 뭐 꼭 그런 건 아니고.
Y양 – 쉬어요. 갑자기 폭탄 터진 기분이겠네.
남친 – 놀라긴 했는데, 아무튼 아니야. 쉬어요.
저렇게 그저 기분이 상했다는 걸 돌려 표현하고 말 게 아니다. 핵심이 되는 부분을 꺼내놓고 대화해야지, ‘나 기분 상했어. 너도 기분 좋진 않겠지.’하는 것만 드러내다 대충 덮으면 아무 답도 구할 수 없다. 치사하거나 쪼잔해보일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해서 말을 안 해 버리면, 계속 벼르고 있으며 서로의 마음을 짐작하고 오해하며 만나게 될 뿐이라는 걸 잊지 말았으면 한다.
Y양이 내 지인이라면, 난 상대와 싸워보든지 헤어지든지 둘 중 하나라도 확실하게 해보길 권할 것 같다. 상대는 건성건성 대답하거나, 나중으로 미루거나, 대충 에둘러서 넘어가거나 하는 일이 많았는데, 그 따위 태도를 보이면 조근조근 얘기해서든 아니면 불 같이 화를 내서든 반드시 지적해야 한다. 상대가 폰에 눈을 둔 채 대충 대답한다고 Y양도 속으로 삐친 채 똑같이 그러고 있는 건, 소중한 시간을 거기다 버리고 있는 일에 불과하니 말이다.
Y양이 내 여동생이라면, 난 반드시 그 남자와 헤어져야 한다고 권할 것 같다. 상대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한계점까지만을 딱 연애에 할애하며, 그 안에서 Y양이 무엇을 하든 거기까진 이해해주지만, 그걸 넘어서려 하는 건 용납하지 않는다. 연애를 무슨 혼자 취미생활 하듯 하는 건데, 이런 와중에 ‘난 이럴 건데, 넌 이게 싫으면 잘 생각해 보고 결정해’라는 뉘앙스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에게선 로그아웃 하는 게 답이다. Y양과 계속 사귀면 좋고 아니면 말고란 식으로 나오는 남자에게, 무슨 미래나 비전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결혼 생각 없다고 말한 후 Y양이 연락하면 답장하지만 연락 안 하면 자신도 연락을 안 하는 남자. 미련과 후회 다 거기다 두고 돌아 나왔으면 한다.
▼ 공감과 추천, 댓글은 제게 큰 힘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연애매뉴얼(연재중) > 천오백자연애상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애중인 거 알면서 남친에게 선을 보라는 남친 부모님 (34) | 2017.03.28 |
---|---|
모태솔로녀의 첫 연애, 서로 생각할 시간을 갖는 중입니다. (22) | 2017.03.25 |
양보하고 배려하다 그게 당연한 게 되어버린 연애 (47) | 2017.03.21 |
제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남친, 결혼해도 될까요? (51) | 2017.03.17 |
먼 곳에 사는 소개팅남, 왜 저에 대한 관심이 줄어가죠? (27) | 2017.03.1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