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팅 한 상대와 다음번에 갈 곳을 미리 답사한 후 계획을 짜고, 만날 스케줄을 맞추려 반차나 월차를 사용하고, 예쁘다 예쁘다 해주며 진짜 상대를 위해 기도까지 해준다니, 이 얼마나 순수하고 다정하고 부지런한 남자인가!
내게 여동생이 있다면, 난 망설임 없이 신앙 좋고, 마음 곱고, 진심으로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되려 노력하는 형진씨를 소개해줄 것 같다. 이런 남자야말로 푸른 풀밭 같은 사람이라 어린 양 같은 내 여동생이 마음 놓고 풀을 뜯을 수 있으니, 오빠로서도 둘의 아기자기하고 안전한 관계를 흐뭇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것 같고 말이다.
그런데 진짜 내게 여동생이 있다면, 그녀는 나와 비슷한 유전자를 가진 까닭에 육식주의자일 거고, 내가 형진씨 예찬론을 펼치면 그녀는
“오빠, 사람이 풀만 먹고 어떻게 살아?”
라는 이야기를 할지도 모르겠다. 앞 뒤 양 옆을 봐도 전부 지평선 저 끝까지 다 풀밭이라, 그 안에서 또 다른 외로움이 느껴진다는 얘기를 할 수도 있고 말이다.
차라리 풀이 얼마 없어도 같이 뜯을 풀을 찾아 나설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면 모르겠는데, 형진씨는 그런 상황에서도
“여기 있어 봐봐. 내가 풀 많은 곳 찾아올게. 일단 그동안 내가 뜯어온 풀 먹고 있어.”
라는 이야기를 할 것 같다.
접대와 배려의 항목에서라면 형진씨는 100점이지만, 그 외의 나머지 항목에서는 낙제점이라는 얘기를 해주고 싶다. 썸이나 연애는 같이 하는 거지 누굴 모시거나 베풀기만 하는 게 아니잖은가. 어쩌면 형진씨는
“나머지는 연애가 시작되면 그때 하려고 했습니다. 사귀기 전까지는 일단 최대한 베풀고 잘해줘서, 고백을 했을 때 거절당하지 않는 걸 목표로 했고요.”
라고 할지도 모르는데, 늘 얘기하지만 둘의 관계는 이미 시작된 거다. 때문에 지금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만 보여주고 나중에 어느 걸 더 보여주고 할 게 아니라, 연락하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형진씨의 스타일대로 만나야 한다. 그런데 형진씨는 ‘여자들이 바랄만한 데이트’를 하려 노력했고, 때문에 한 사람으로서의 매력은 보여주지 못한 채 ‘배려 쩔던 소개팅 남1’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할 수 있게다.
‘여자들이 바랄만한 데이트’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필요가 있다. 만약 누가
“남자가 데이트 전 사전답사도 다 해놓고 예약까지 끝낸 후 착착착 알아서 진행해주면 정말 너무 좋을 것 같아요.”
라는 이야기를 한다 해도,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면 생각만큼 좋지 않으며, 저건 그저 게으르고 수동적인 남자를 만나던 여자가 그것에 대한 반감으로 꺼낸 이야기일 수 있다. ‘진짜 이러지 않고 반대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에 한 얘기인 거지, 저러기만 하면 무조건 만족하며 절대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내가 사랑하는 이 남자가 그런다면 얼마나 좋을까’의 의미가 짙은 거지, ‘그러는 남자가 있으면 사랑하겠다’는 의미도 아닌 것이고 말이다.
데이트 전 날 다음 날 데이트 할 코스에 실제로 가선 쭉 돌아보고 식당까지 조사하는, 이렇게까지 디테일한 사연을 난 처음 받아봤다. 필요 이상으로 섬세하게 준비한다고 여겨지는 사연은 몇 차례 받아봤는데, 그 사연들 다 모아도 형진씨와는 비교불가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 전혀 없으며, 그럴수록 형진씨도 분명 금방 지치게 될 거란 얘기를 해주고 싶다. 또, 어떤 형태로든 그걸 상대가 알게 되면 상대는 형진씨와의 만남을 부담스러워 할 것이고, 운이 좋아 연애로 이어질 경우에도 그게 ‘예전엔 그렇게까지 했으면서 왜 지금은 안 그러냐’는 불만으로 치환될 수 있다. 형진씨는 그녀가
“왜 이렇게 잘 알아요? 여기 많이 와봤던 거 아니에요?”
라고 할 경우
“아니에요. 사실, 어제 답사를 왔었어요.”
라고 대답하면 감동의 도가니탕이 될 거라 생각했던 것 같은데, 현실에서는 그게 강박증을 가진 남자에게 도가니를 맞은 듯한 충격이 될 수 있다는 걸 기억해뒀으면 한다.
하나 더 적어두자면, 형진씨가 그렇게까지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데이트에 그녀가 감동하는 것 같지 않으면, 형진씨는 급속히 자신감을 잃어가는 것 역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아니 이게 무슨 ‘가이드 능력 평가’를 위해 코스를 짜고 그대로 관광객을 데리고 가 평가를 받는 것도 아닌데, 형진씨라는 한 사람을 보여줘야지 코스에 대한 그녀의 만족도만 체크하며 일희일비해선 안 되는 것 아니겠는가.
그냥 좀 친구 만날 때처럼, 놀자. 어디서 볼래? 라페? 삼겹살 먹을까? 그럼 먹자골목에서 봐, 정도로 만나면 된다. 서로가 서로에게 만나면 즐거운 사람이 된다면 어디서 만나든 장소 따위는 문제되는 게 아니며, 같이 간 식당 음식이 맛이 없으면 또 맛이 없는 대로 둘이 뒷담화 하면서 놀 수 있다.
완벽하게 안정적이고 안전한 데이트를 위한 형진씨의 노력이, 상대에겐 그 데이트가 국기에 대한 경례-애국가 제창-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의 국민의례 식순처럼 여겨졌을 수 있다는 걸 잊지 말자. 어떤 행사에서든 국민의례는 그냥 초반에만 잠깐 하고 마는 거지, 행사 전체를 국민의례만으로 채우진 않잖은가.
형진씨는 그렇게 몇 번 만나다 그녀에게 거절의 말을 들었다. 그러고는 나중에 한 번 더 기회가 찾아오긴 했는데, 그 때에도 만나서 국민의례같은 데이트를 하려다 결국 또 거절당하고 말았다. 형진씨는 내게
“제가 ‘다음 코스’로 가자고 했더니, 그녀가 ‘다음 코스요?’라고 하면서 당황하더라고요.”
했는데, 앞으로 또 그런 기회가 온다면 제발 그 ‘코스’에만 목숨을 거는 일은 그만 두고, 그냥 상대라는 한 사람을 알아가는 일에, 그리고 형진씨라는 한 사람을 알리는 일에 더욱 힘을 쓰길 권한다.
▼"무한님 육식주의자셨군요." 아뇨,사실 거의 육식동물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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