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썸의 유효기간이 지나 벌어진 일이다. 썸은 마치 장작불 같아서 불이 붙은 후에도 장작을 꾸준히 넣어줘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Z군은 장작을 더 넣을 생각은 하지 않은 채 불만 쬐고 있던 나날이 많았다.
썸 타는 동안 장작을 넣은 건 상대였다. 그녀는 계속해서 Z군에게 먼저 연락을 했으며, 만나서 같이 밥 먹고 술 마실 때에도 Z군을 리드했다. 그녀가 Z군에게 ‘내 손 잡고 따라오라’는 제스쳐를 취했을 때 Z군이 그 손을 붙잡고 따라가는 걸 보며, 난 속으로
‘뭐냐 이거. 상대가 훨씬 연하임에도 불구하고, 남자가 엄마 따라 나온 아이처럼 졸졸 쫓아만 다니고 있네….’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Z군은 연애도 몇 번 해봤고 썸도 몇 번 타봤다면서, 왜 그랬을까.
Z군이, 돌다리를 너무 오래 두드린 거다. 썸 타는 까닭에 한 번 대화를 시작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 수 있으니 즐겁긴 하겠지만, 그렇게 그냥 그걸 즐기기만 할 뿐 크리스마스에 만나자는 말도 못 꺼내는 썸남은 분명 매력 없다.
“제가 마음이 좀 여린 편이며, 어떤 상황에 처하면 이유를 먼저 찾아보는 타입이라….”
그러는 동안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상대는, 지치고 질리는 거다. 이걸 소개팅이라고 생각해 보자. Z군이 상대를 소개 받곤 근 두어 달 연락하며 친하게 지내고 있긴 한데, 상대가 이쪽의 연락에 반응은 해주지만 먼저 만나자는 말 절대 꺼내지 않으며 선 연락도 잘 안 한다. 그럼 Z씨 역시 슬슬 지쳐가지 않겠는가. 전에 만나서 갈비 먹을 때 분위기 좋긴 했는데, 그 이후로도 이쪽이 먼저 뭘 안 하면 주말도 각자 보내고 공휴일이 찾아와도 각자 보내는 게 당연한 듯 흘러가는 관계라면, 그건 상대에게 나에 대한 호감 없이 그냥 인맥으로 두기 위해 ‘들고만 있는 관계’는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고 말이다.
애매하게 지속되던 관계를 확실하게 정리한 것 역시, Z군이 아니라 상대였다. 상대는 Z군과 긴 썸을 타던 중, Z군이 ‘남친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 부분까지 접근해 질문을 하니 선을 그었다. Z군에게 호감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좋은 오빠동생, 친한 오빠동생으로 지내고 싶다고.
이것에 대해 Z군은
“제가 너무 성급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친구는 우리가 아직 그럴만한 관계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데, 제가 오버해서는 쓸데없는 질문 같은 걸 한 것 같습니다.”
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난 Z군과 정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건 Z군이 너무 성급하게 물어서 그런 게 아니라, 능동적으로 뭘 하지도 않으면서 상대가 계속 ‘썸녀’로 있어주길, 나아가 ‘여자친구’까지가 되어주길 바라고만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다시 소개팅을 예로 들어보자. 소개팅 후 계속 연락을 지속하기는 하는데 이렇다 할 대시는 없고, 그런 와중에 상대가 ‘이쪽과 이성친구와의 관계’까지를 간섭하려는 듯한 모습만 보인다면, 그땐 Z군도 ‘이거 지금 뭐하자는 건지?’하는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공연을 보러 갔는데 무대에서 출연진이 “이거 받으실 분?” 하고 물었으면 손을 들고 내가 갖고 싶다고 외쳐야 한다. 그렇게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내 의사표시를 해야 출연진도 날 보고 그걸 주든 말든 하는 거지, ‘내가 받고 싶다’는 마음을 품은 채 눈빛 신호 같은 것만 보내고 있으면 안 된다. 가끔 ‘간절히 바라면 우주가 도와준다’며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그냥 바라고만 있는 대원들이 종종 있는데, 그 말 보다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는 속담을 마음에 새기고 있길 권한다.
Z군이 내게 이 관계가 어떻게 될 것 같냐고 묻는다면, 난 ‘잘 안 될 것 같다’고 대답하도록 하겠다. 이미 유효기간이 너무 지났으며, 불씨마저 희미해진 까닭에 여기다 장작을 쏟아 부어봐야 불이 쉽게 붙진 않을 것 같다. 유효기간의 문제와 더불어 ‘상대가 썸을 타며 겪어본 Z군의 모습’ 역시 아주 긍정적이지는 않은 까닭에-좀 더 정확히 적자면 Z군이 너무 뭘 안 해서 상대의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고, 생각보다는 훨씬 어린 듯한 Z군의 모습이 상대에겐 ‘깨는 모습’으로 보였을 수 있기에- 이대로라면 형식적이고 의무적인 대화 정도만 지속할 수 있는 관계로 굳어질 것 같다.
내가 Z군이라면, ‘그간 내가 너무 조심스러워 하기만 했으며, 내 마음을 표현하기보다는 너의 마음부터 좀 확인하고 싶어 한 것 같다’는 이야기로 사과하며 관계 개선을 꾀해볼 것 같다. 그러면서 ‘내가 널 어떻게 생각하며, 너에게 느끼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를 이야기하기도 하고, 이런 얘기는 아무래도 ‘산낙육회(산낙지+육회)’를 먹으며 하는 게 좋을 것 같다며 같이 가서 오물오물 먹으며 대화도 할 것 같다.
자 이제, 그간 고집했던 ‘안 될 것 같으면 안 한다’의 수동적인 마음으로 이쯤에서 접는냐, 아니면 이번엔 ‘안 될 것 같아도 되게 만들어 보겠다’의 능동적인 마음으로 내 진심을 옹알옹알 말해보느냐의 선택은 Z군의 앞에 놓였다. 내 예상으로 Z군은 마음속에서 뭔가 불끈 솟아나는 기분으로 후자를 택했다가 ‘상대의 예전 같지 않은 반응’을 보며 시무룩해져 ‘능동적인 건 다음 썸에서 하기로….’를 선택할 것 같다.
내 예상과 달리 Z군이 혹 후자를 택하고 그대로 밀고 나가게 된다면, 그땐 돌려 말하며 상대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주길 기대하지만 말고, 시원하게 다 털어 놓은 후 Z군이 상대에게 제안했으면 한다. 상대에게 보여준 적 없는 리더십과 박력을 보여준다 생각하며, 이번엔 좀 과감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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