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이게 사람 성격이고 취향이고 뭐 그런 건데, 소영씨는 좀 긴장 푼 모습으로 편하게 대하기가 살짝 어려운 타입입니다. 같이 영화를 봐도 킬링타임용 액션영화는 질색할 것 같고, 유행가 얘기를 했다가는 수준 낮은 사람처럼 보일 것 같으며, 와인 마시자고 해야지 소주 마시자고 했다간 미개하게 여겨질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특이하고 흥미롭기는 한데, 편하지가 않습니다. 보통 소영씨 타입의 대원들이 보낸 사연을 보면 독백하듯 써내려가는 ‘사연신청서’엔 풍부한 인문학적 교양이 보이더라도 카톡에선 사람 냄새가 나기 마련인데, 소영씨의 경우는 사연신청서와 카톡대화 둘 다 잘 다려진 옷 같습니다. 각이 잘 잡혀있는 건 좋은데, 그래서야 어디 좀 철퍼덕 앉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소영씨도, 상대와 대화하려면 막 ‘지식과 정보의 교환’이나 ‘수준급 안목의 표현’ 등을 해야 해서 좀 힘들지 않으십니까? 뭐, 그러면서도 둘 다 재미를 느끼고 그런 지적인 드립을 칠 때마다 통하는 느낌이 든다면 괜찮습니다만, 그러느라 보통의 가벼운 안부인사나 웃고 넘어갈 수 있는 이야기를 못 하는 게 좀 안타깝습니다.
예컨대 그냥 커피 한잔하자는 얘기를 해서 약속 잡으면 될 걸, 상대가 막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기원과 함께 지역별 커피의 특징, 현 프랜차이즈 커피의 맹점, 기후와 로스팅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하면 좀 그렇지 않겠습니까?
“아니요. 상대가 그런다면, 저는 정말 흥미로울 것 같은데요?”
네, 그래서 뭐라 말씀드리기가 참 어렵습니다. 소영씨 자체가 좀 특별하고 심도 깊은 것에 관심을 두는 까닭에, 다른 사람들도 그런 이야기에 분명 즐거움을 느낄 거라 여기니 말입니다.
하지만 관심사가 비슷해 서로 간단한 얘기를 나누거나 몇 번 정도는 깊은 이야기를 나누더라도, 매번 그럴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신기하게도 A, B, C라는 세 가지 관심사가 같다 해도 D, E, F, G… V, W, X, Y, Z라는 관심사는 전혀 다를 수도 있는 것이고 말입니다.
더불어 ‘내가 아는 주제’가 나왔다고 해서, 아는 걸 모두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소영씨와 제가 아는 사이인데, 소영씨가 제주도를 다녀왔을 때 다녀온 이야기를 하는 소영씨의 말을 중간중간 제가 다 끊고 들어가서 ‘내가 아는 제주도의 모든 것’을 이야기한다면, 맥이 좀 뚝뚝 끊기지 않겠습니까? 달변은 은이요 경청은 금이라는 말이 있듯이, 너무 막 상대의 말을 중간중간 정리해서 이야기를 한다거나, 내가 알고 있는 걸로 받아치려고 하지 않으셔도 좋다는 걸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모든 학문 이전에 사람이 먼저 있었다는 것, 그리고 문학이나 영화도 결국은 사람 사이의 이야기를 자르고 붙여서 만든 것이라는 걸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그것의 화자들은 ‘인간’이라기보다는 ‘캐릭터’에 가까우며, 인간 사이에서의 일을 관찰해 문장이나 장면으로 재구성한 것 아니겠습니까?
때문에 내가 온전히 그런 존재가 되려 한다거나 누군가가 그런 존재이길 바라는 것은, 만화 속에 나오는 캐릭터를 기다리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상대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고, 나 역시 그런 상대를 대하는 하나의 캐릭터로서 상대를 대하다 보면, 자꾸 대화가 아닌 대사를 치려 하며 일상적인 문답을 이어가기보다 산으로 가는 대화를 하게 될 수 있고 말입니다.
소영씨는 현재 얼마든지 상대에게 연락할 수 있으며, 둘이 만날 약속을 잡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니잖습니까? 그러니 뜨문뜨문 연락을 이어가며 겨우 한두 달에 한 번 보는 것부터 그 빈도를 좀 늘려가시길 권합니다. 소영씨가 말을 꺼낼 때 상대 역시 “아 저도 같이 먹자는 얘기하려고 했어요!”라며 긍정적인 신호를 보일 때에는, 더 자주 만나서 대화하고 노는 게 중요한 거지, 폐관하고 들어가 내공을 더 쌓는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고뇌와 명상의 시간은 충분히 가졌으니, 이제 거리로 나가 상대를 만나시길 권합니다. 자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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