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이 사연을 읽으며 놀랐던 건, 남친이 오랫동안 백수로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데이트비용을 많이 부담하고 있으며, 보통의 연인들이 하는 데이트도 두 사람이 문제없이 해왔다는 점입니다. 때문에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K양의 불평에 대해
“내가 취업 못 하고 있었던 건 맞아. 그런데 내가 너한테 못 해준 게 뭐가 있냐. 사귀는 동안 돈 쓰며 데이트한 것만 따지자면 남부럽지 않게 했잖아.”
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을 수도 있습니다. 따져 보면, 둘 사이엔 남친의 미취업으로 인해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 있긴 했지만, 그 와중에도 큰 모자람 없이 즐길 수 있는 건 즐겼으니 말입니다.
악순환이 반복된 것 같습니다. K양의 남친은 자신이 미취업 상태이다 보니, 형편에 따라 좀 긴축해야 할 것들에서도 오히려 호기를 부렸고, 그게 K양에게는 일시적인 진통제가 되어 ‘당분간은 취업 문제로 쪼지 않는 걸로….’라는 마음을 먹게 한 것 같습니다. 언 발에 오줌을 누어 잠시 녹였다가 다시 얼어버리는 일이 반복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 경제활동을 하다가 그만두어 집에 있게 된 가족이 있을 경우, 그가 다른 가족들의 눈치를 보며 집안일에 보탬이 되려 애쓰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갑자기 청소나 설거지를 해 놓는다거나 하는 형태로 말입니다. 그것과 비슷하게, 연애에서도 경제적으로 위축되거나 꼬투리를 잡힐 수 있는 상황에 놓인 경우, 다른 것들로 보상해주는 거라 생각하며 크게 원치 않는 일들을 하는 사례가 있습니다. 회사 끝날 때 맞춰 찾아와 기다린다거나, 약간은 을의 입장에서 접대하는 모습으로 연인을 대하거나 하며 말입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남친의 취업과 둘의 미래에 대한 것이었지, 그게 안 된다고 해서 당장 뻔한 잔고를 더 탈탈 털어 쓰거나, 일시적으로 더욱 충성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아니었지 않습니까? 바로 이 지점에서,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당장의 위기를 넘기거나 일시적으로 무마할 수 있는 행위가 반복되다 보니, 그게 곪고 곪다가 이제 ‘잘라내냐 마느냐’의 처방만 남게 된 것 같습니다.
대학교 입학했다고 누가 차 공짜로 주고, 회사 입사했다고 누가 집 공짜로 주는 것 아니듯, 결혼했다고 해서 저절로 뭐가 다 해결되거나 누가 해결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K양은
“남친의 취업이 확정되면, 식 올릴 자금을 모아 결혼할 예정입니다.”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끼리니까 하는 얘기지만, 전체를 놓고 봤을 때 ‘결혼식’은 진짜 1/10도 안 되는 거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게 그렇게 단순하게
남친의 취업 -> 결혼 -> 행복
으로 이어지는 거라면 전 당장이라도 혼인신고 먼저 하라고 권하겠지만, 이건
-미래에 대한 책임유보로 현재를 과도하게 퍼서 쓰고 있는 남친과, 그런 남친의 충성을 보고 참으며 폭발할 때만을 기다리고 여친.
의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남친의 취업이 ‘종착역’이 아닌 ‘둘이 제대로 책임감을 가진 채 하는 어른의 연애’의 출발점이라 생각하는 게 맞으며, 당장 급한 것은 연애로 도피한 채 모든 걸 유예하고 있는 남친을 정상 궤도로 올려두는 일입니다.
그러니 K양의 말대로 ‘안 싸우고 참으며 갈등을 줄이는 노력’을 하기 보다는, 두 사람은 어떻게 살 것인지, 그리고 둘이 그리는 미래를 준비하려면 지금 당장 해야 할 건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하며 보다 현실적인 계획과 점검을 해나가시길 권합니다. 나중에 아이 교육은 어떻게 시키고 애완동물은 뭘 키우고 하는 얘기를 할 게 아니라, 지금 두 사람의 통장엔 얼마가 있으며 둘이 살 집엔 뭘 어떻게 해야 들어갈 수 있는지를 따져봐야 한단 얘깁니다. 새로 나온 영화 안 본다고 죽는 것 아니니, 극장 데이트 한 번 미루고 이런 부분에 대해 대화하셨으면 합니다. 자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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