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동생이 이런 사연을 가지고 왔다 생각하며 말해달라'고 했으니 그렇게 말하자면, 난 우선 ‘짝사랑했던 오빠’에 대해선
-‘좋은 오빠’도 남친이 되면 참 별로인 남자가 될 수 있다.
-꼬꼬마 때 짝사랑했던 오빠와 지금의 그 오빠 사이엔 큰 격차가 있을 수 있다.
-당시에도 그 오빠는 이쪽을 전혀 이성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걸 잊지 말자.
-이쪽이 연애 중이라 못 다가온 게 아니라, 관심이 없어서 안 다가온 거다.
라는 이야기를 해줬을 것 같다. 사연의 주인공인 O양이 묘사한 ‘짝사랑했던 오빠’엔 판타지가 짙게 칠해져 있던데, 꼬꼬마 때 친목을 주제로 어울리던 무리에서 어른 같아 보였던 상대의 모습은, 지금 다시 보면 전혀 다른 느낌일 가능성이 크다. O양은 내게
“그냥 (지금 남친과)헤어지고 그 오빠한테 고백하면, 어떻게든 결론 나오고 미련 없지 않을까요? 남친에 대한 사랑이 더 커지지도 않고, 오빠에 대한 마음도 사라지지 않는 지금 괴로워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라고도 물었는데, ‘어떻게든 결론이 나온다’는 말에는 나도 동의하지만, 미련이 없을 거라는 말에는 동의하기가 어렵다. ‘뭐 어쨌든 내가 선택한 것이니 책임져야지.’라는 마음으로 참고 버틸 각오라면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꽤 괜찮았던 집에서 ‘이 집엔 침대가 없다. 전에 침대 매장에서 누워봤던 침대는 정말 좋았는데….’ 라며 아예 집을 나와 버린 모습이 될 수 있다. ‘편한 침대’ 하나만 보고 집을 나와 버리는 건 훗날 땅을 치고 후회할 일이 될 수 있으니, 우선 지금 O양이 저울질 하고 있는 대상이 과연 동등한 것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그렇다고 ‘편한 침대’ 같은 건 영영 포기한 채, 그냥 ‘다른 건 괜찮으니 참고 살아야지’ 라는 마음으로 버티라는 얘긴 아니다. 난 사실 이 사연을 두고는
-‘짝사랑했던 오빠에게 고백’같은 걸 고민할 게 아니라, 연애하면서 아무 조율도 없이 만나지는 대로만 만나왔다는 걸 고민해야 함.
이라는 얘기를 해주고 싶으며, O양과 남친은 5년 넘게 만나왔지만 여전히 어릴 때와 같은 모습으로만 사귀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보길 권해주고 싶다.
5년을 만나며, O양은 ‘남친이 다른 건 다 잘해주니까, 내가 바라는 것들은 포기’했던 것처럼 보인다. 다른 이유로는 사실 ‘잘해주니까 계속 사귀긴 하는데, 원래 처음부터 막 미래까지를 생각하며 마음 많이 할애해 만났던 것 아니’라는 것도 있긴 한데, 여하튼 상대의 헌신은 꽤 컸고 O양도 연애 중이지만 혼자 할 거 다 하며 지내다 보니 둘은 어찌저찌 오래 사귀어 온 것 같다.
시간은 흘러 이제 둘은 서른의 문턱에 있는데, 사귀는 건 여전히 대학생 때와 같은 모습으로 만나는 느낌이랄까. 보통 이 정도 사귀었고 이 정도 나이가 되었으면 둘의 미래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대화를 해 보기 마련이며 서로의 가족들과 안면을 트고 주변인들까지 챙기기 마련인데 그런 것도 별로 없는 듯 보이고, O양이 말한 ‘남친과의 에피소드’ 같은 게 다른 연인들에게 벌어졌다면 한쪽이 마음을 고쳐먹게 될 때까지 싸우기 마련인데 그런 것도 별로 없는 듯 보인다.
아직 둘 다 진지한 태도로 구체적인 계획 같은 걸 세우기엔 시간이 충분히 남았다고 생각해서일까? 그래서 그런 얘기는 나중에 말 나오면 하는 것으로 미뤄둔 것일까? 아니면, 오래 만나왔으니 결혼도 하고 같이 사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서로 자신의 패도 그다지 안 보여주고 계속 데이트나 하며 만나다가, 훗날 결정적인 순간에 패를 공개했는데 그게 서로가 생각한 패와 전혀 다르면 어쩌려는 건지, 보고 있는 내가 다 불안할 정도다. 여행을 가자고 하니 가기로 하긴 했는데, 공항에 가서야 티케팅 직전에 서로 생각했던 여행지가 다르면 그땐 어쩌려는 건지….
O양이 느끼기에 그 집에 ‘편한 침대’가 없는 것 같은 건, O양의 부탁 없이도 상대가 책상도 놔주고, 불 들어오는 화장대도 마련해주고, 목소리로 켜고 끌 수 있는 전등까지 설치해 주니, 거기에 만족하기로 하며 침대 얘기는 아예 꺼내지도 않았기 때문은 아닌지 생각해 봤으면 한다. 남친에게 ‘내가 진짜 바란 건 그런 것들이 아니라, 편하게 쉴 수 있는 침대’라고 말했어야 하는 건데, 그런 말 없이 수동적으로 임하다 보니 O양은 상대가 주는 것만 받게 되었고, 그러다 O양이 불만을 내비치는 순간이 오면 상대는
“난 이렇게까지 했는데, 넌 그럼에도 요 정도를 이해 못 해주냐.”
라며 억울한 기색을 내비치게 된 것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난 O양에게, 위와 같은 ‘내가 원하는 것 말하기’부터 시작해보길 권하고 싶은데, 다만 그런 시도를 할 땐
-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는 걸 기억하며, 천천히 늘이기.
-서로가 다른 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임하기.
-미약한 변화도 변화에 해당 되는 거라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정치와 종교 얘기는 최대한 자제하기.
정도를 꼭 염두에 두었으면 한다. 마지막에 뜬금없이 ‘정치와 종교 얘기 자제하기’가 들어간 걸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는데, 놀랍게도 그런 주제로 싸우다 감정이 상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정치와 관련해선 양보 없이 대립하다 헤어지는 사례까지 있을 정도다. 여행 가서 둘이 구경 잘 하고 비싼 소고기까지 잘 먹고 나서는, 뉴스 보다가 거세진 비판이 조롱으로 이어져 끝나는 경우도 있는데, 국가와 국민을 걱정하는 것도 좋지만 거기에 너무 혈안이 된 나머지 정작 가장 가깝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망치며 자신의 걱정거리를 만들진 말았으면 한다.
예전에 한 번 한 적 있는 얘긴데, 내 경우 운전할 때 주정차를 하게 되면 반드시 시동을 끄곤 한다. 주차한 뒤 차 안에 있을 때 시동을 켜고 있는 게, 차선변경을 한 뒤에도 깜빡이를 계속 켜놓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끄는 건데, 이 부분에 대해 아내가 ‘연애할 때, 집에 바래다주며 집 앞에 차 세우고 대화할 때 너무 추웠다. 한겨울에도 시동을 꺼버려서….’라는 이야기를 뒤늦게야 한 적 있다. 추울 때 그냥 ‘시동 걸고 히터 좀 켜자’고 했으면 내가 ‘목에 칼이 들어와도 공회전은 할 수 없다’고 할 일은 켤코 없었을 텐데, 그냥 속으로만 짐작하거나 말하기 좀 그래서 말 안 한 까닭에 쓸모없이 겪고 참은 일이라 할 수 있겠다. O양이 신청서에 적은 ‘남친의 문제’ 대부분 역시, 그냥 의사소통을 시도해보는 것만으로도 쓸모없이 겪고 참을 필요 없이 해결될 가능성이 있으니, 애먼 고생 더 하지 말고 바로 오늘부터 말을 꺼내봤으면 한다. 내 생각과 마음이 이렇다는 것을 ‘상대 탓’ 빼고 ‘부탁’의 뉘앙스로 전해보길 바라며, 이번 매뉴얼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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