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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난 주였나, 마트에서 열무와 얼갈이를 싸게 팔길래 난생처음 물김치를 담가봤다. 풀을 쑤고 뭐 하고 하는 복잡한 과정 없이, 절인 후 그냥 다른 재료를 갈아 넣어 물과 함께 놔뒀더니 맛있는 물김치가 되었다. 정성과 손맛이 들어간 어머니의 정통 물김치보다 내가 담근 게 맛있다는 게 충격이긴 했지만(내일이 어버이날인에 어머니 죄송합니다.), 여하튼 난 그렇게 간편하게 담근 물김치를 끼니마다 꺼내 시원하게 들이키고 있다.

 

뜬금없이 물김치 얘기로 매뉴얼을 시작한 건, 이번 사연의 주인공인 L양이 빈속에 김칫국을 시원하게 들이켜며, 한 사발 더 마셔도 되냐고 내게 물었기 때문이다.

 

“무한님 그 얘기는…. 이 모든 게 그냥 제 기대일 뿐이라는 거죠?”

 

솔직히 난 너무나 분명하게 “네,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데, L양이 상상의 날개를 펴고 너무나 높이까지 날아간 까닭에, 그러지 말고 그만 내려오라고 하기가 미안하다. L양은 막 너무나도 진지하게

 

“근데 여자의 촉이라는 게 있잖아요? A쌤이 B쌤을 대신해 제게 물었던 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그러니까 매뉴얼을 써주실 때, B쌤이 제게 관심을 가지고 있을 경우 그걸 자연스레 피하며 A쌤과 잘 될 수 있는 방법을….”

 

라는 뉘앙스의 이야기를 신청서에 적었는데, 거기에 대고 내가

 

“아닙니다. A도 B도 이쪽에는 관심이 없으니, 그런 고민은 하지 마세요.”

 

라며 ‘지금껏 살아오면서 다 맞았다’는 L양의 촉에 대한 이상 문제를 말하는 건 잔인한 일 아니겠는가. 그래도 그렇다고 ‘너에게 호감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던 L양의 지인들처럼 그냥 막 희망만 던져줄 순 없는 일이니, 그런 의미에서 차가운 농촌남자 다운 몸쪽 곡괭이질이 들어간 거라 생각해 줬으면 한다. 놀라서라도 양손에 든 김칫국 사발 내려놓길 바라며 하는 곡괭이질.

 

특강 강사였던 남자 선생님들, 제게 호감이 있었던 걸까요?

 

그러니까

 

-이십 대 후반 이후 또래의 강사에게 강의를 듣는 것.

 

은, 꼬꼬마시절 진짜 뭔가를 배워내기 위해 수업을 듣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일일 수 있다는 것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십 대 후반 이후의 수강은 좀 더 설렁설렁하며 친목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강사 역시 ‘교육’ 보다는 ‘교육 서비스’에 가까운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런 까닭에 많은 대원들이 그걸 ‘이성적인 호감’으로 오해하곤 하는데, 그건 이쪽이 사교적이며 능동적으로 대화를 이끌어가는 타입일수록 얻어지기 쉬운, 친목에 가깝다고 보는 게 맞다.

 

L양은 ‘강사 B가 내성적인 타입인 것 같은데 나에겐 엄청 친절했으며 잘 가르쳐줬다’고 했는데, 기본적으로 강의를 업으로 하는 서른 넘은 사람들은 누구나 그 정도의 교육 노하우를 갖고 있기 마련이며, 강사로 활동할 정도인데 쭈뼛거리며 눈치 보고 수강생에게 말도 못 하는 사람은 없다고 볼 필요가 있다.

 

또, L양은 수업 중 강사가 뭔가를 지도하려 하면 그걸 농담으로 받은 적도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그런 수강생인 L양에게, 강사A와 B 둘 다 좀 더 편안하고 친근하게 대한 거라 할 수 있겠다. 다른 수강생들이 다 “네, 감사합니다./아니요, 괜찮아요.”라고 대답할 때 L양은 그것과는 달리 드립을 섞어 치기도 하니, 그런 L양에게 강사들도 더 친근함과 호의를 보인 것이다. L양보다 더 사교적이며 활발한 다른 수강생이 들어왔을 때 강사들이 그 사람에게 더 그랬던 것처럼, 그 사람 이전엔 L양이 그런 존재였다고 생각하는 게 맞는 일이라 난 생각한다. 이걸 두고 L양은

 

“A쌤이 그 사람을 좋아하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고….”

 

라고 하던데, 그럴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것 역시 기반은 ‘부담스럽지 않게 대할 수 있는 수강생에 대한 친근함과 호의’라고 보는 게 맞겠다.

 

 

뒤풀이 자리에서 강사 A가 했던 질문들은,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는데 뻘쭘하게 아무 말도 안 시킬 수 없으며, 그가 생각하는 L양 역시 수업 중 드립을 칠 수 있을 정도의 센스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니 질문을 한 거라 할 수 있다.

 

L양은

 

-A쌤이 내게, 요즘 썸타는 사람이 없는지를 물었다.

 

라는 걸 두고 그 안에 깊은 의미가 담겨 있으며, 혹 그게 자신을 좋아하는 B강사를 대신해 요즘 썸 타는 사람이 있는지를 확인해주려는 질문 같다고 생각하던데, 보통은 그런 질문들을 별 의미 없이 하곤 한다. 무슨 일 하는지에 대한 얘기를 나눈 뒤 더 이렇다 할 주제가 없으면, 요즘 연애 중인지 썸을 타는 중인지 정도를 물을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나아가 ‘소개팅을 해주겠다/시켜달라’라거나, 이상형 얘기, 또는 과거 연애사 공유 등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여하튼 그러고 나서 사적인 연락 등 눈에 띄는 액션이 있지 않은 이상 그건 그냥 ‘침묵을 깨기 위한 주제선정’ 이었다고 생각하도록 하자.

 

“그런 대화 별로 안 좋아한다는 제 대답에 대해, A쌤이 ‘이 분도 그런 스타일’이라고 한 건 뭔지도 궁금해요.”

 

그건 그 뒤에 나온 대화를 보면 알 수 있다. 그가 ‘연애보다 일, 또는 자기계발을 우선순위에 두는 사람’의 이야기를 한 게 바로 ‘그런 스타일’이라 보면 되겠다. 그리고 그가 애매할 법한 그런 대답을 한 건, 사실 그는 별 생각 없이 “그럼 요즘 썸 타는 사람 없어요~? ㅎㅎ”정도로 말을 한 건데, 그걸 L양이 다큐로 받으며 “저 그런 대화 별로 안 좋아해요.”라고 받으니 민망함 반, 어색함 반의 상황에서 얼른 주제를 바꾸고자 그렇게 말했을 가능성이 크다. 어쨌든 그 대화 이후 L양이 먼저 공적인 질문을 핑계로 말을 걸었을 때에도 그는 대답만 해주고 말았으니, 그렇게 눈에 보이는 그의 태도가 바로 L양이 내게 물은 ‘A쌤은 저에게 호감이 있는 게 맞나요?’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고 생각했으면 한다.

 

-내게 호감이 있는 것 같으면, ‘사실 내게 필요는 없지만 그와 가까워질 수 있는’ 다음 특강도 신청해서 듣겠다.

 

는 L양의 말에 대해선, 일단 그에게선 L양에 대한 아무 호감도 보이지 않는다는 대답을 해줘야 할 것 같다. 그래도 굳이 L양이 다음 특강까지 신청해 듣는다면 굳이 말리진 않겠지만, 강의 내용보다 상대와 어찌어찌 잘 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 하나 때문이라면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 봤으면 한다. 이렇게 말하면 그 분위기나 미묘한 눈빛 같은 걸 내가 몰라서 이렇게 결론짓는 거라 할 수 있는데, 난 L양의 사례보다 훨씬 복잡하며 경계가 모호한 ‘1:1 개인수업’ 사연까지도 질리도록 봤다는 얘기를 적어두도록 하겠다. L양은 다음 특강이 별로 필요하지도 않으면서 시간과 돈도 많이 할애해야 하는 거라고 했는데, 그런 거라면 굳이 겨우 ‘처음 느낀 그대 눈빛’ 같은 것 때문에 무리하지 말길 바라며,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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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감과 좋아요, 댓글은 다음 매뉴얼을 부릅니다. 감사합니다.

ㅅㄹ2019.05.07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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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인트로의 드립력이 한껏 물오르셨네요
물김치가 진짜 맛이 좋은가본데요ㅋㅋ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주인공께는 재미없었겠지만....

전화연애상담원2019.05.07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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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요! 저도 이번 글 도입부 읽다가 피식?! 거렸어요 ㅎㅎ 차가운 농촌남자라면 돌직구보다는 묵직한 곡괭이죠!

noname_K2019.05.07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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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시야가 좁아지기 마련이죠. 그 사람이 여행이야기를 해도 나랑 여행가자는건가? 싶고 음식 이야기를 해도 나랑 밥먹자는건가? 싶으며 영화이야기를 하면 영화 같이보자는건가? 하며 기대하지요. 그러다 상대가 더 말이 없으면 내가 반응해줘야 하나? 남자답지 못하네 라며 속만 태우다가 먼저 호감표시하고 상대방의 거절에 날 갖고 놀았다니 어장이니하며 슬퍼합니다...

그리고 이것들이 모두 금사빠의 특징이죠.ㅠㅠ

사막에사는선인장2019.05.07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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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농촌남자무한님이 물김치도 담그셨다니 ㅎㅎ

썸은 당사자일때는 헛갈리기가쉽죠
뭔가 눈빛에 기대고싶기도하고~^^
하지만 이번은아닌걸로~
사연자분은 진짜 제대로된 인연 만나실겁니다
그때까지는 릴랙스하시길

물김칫국2019.05.07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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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양님을 보니 제 대학 동기가 생각나요. 남자쪽에서 먼저 연락이 온 것도 아니고 식사나 영화를 같이 하자고 한 적도 없는데 나한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나의 어떤 것을 기억했다, 나를 다정하게 쳐다봤다 이러면서 그 남자들이 다 자기한테 호감이 있다고 ㅠㅠ 옆에서 봤을 땐 남자는 누가봐도 관심 없는 게 보이는데 동기 혼자 마음 쌓아가는 걸 보니 안타까웠어요.

더 심한 건 이 동기가 그 남자들하고 같이 속해있는 그룹 사람들한테 자기가 저 남자한테 관심있다, 이러 저러 했는데 저 남자분이 나한테 관심있는 거 맞지? 이러고 다니더라고요. 근데 정말 더 심한 건 그룹 사람들 그 어느 누구도 이 동기한테 충고나 객관적인 이야기는 안 해주고 이 동기그 이러는 게 웃기고 재밌는지 옆에서 키득키득 거리면서 부추기더라고요. 무한님 같이 정확한 조언자가 있는 게 다행인 것 같아요. 이 동기는 옆에서 아무도 충고해주는 사람이 없는지 29살 돼서도 아직 저러고 있어요. 그룹 내에서는 이미 푼수로 소문났는데 본인만 모르고.... 보다 못한 제가 옆에서 한 번 이야기했는데 듣는 둥 마는 둥이더라고요 이런 상상연애가 이젠 익숙해진건지....

마음 아프시겠지만 이번 사연소개를 통해 제 동기처럼 되지 마시고 다음엔 좋은 인연 만나시기를 바래요! 남자는 관심있으면 반드시 반드시 연락 먼저 옵니다! 이것만 기억하셔도 앞으로 헷갈리실 일은 많이 없으실거예요.

FIM2019.05.07 16:44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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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포스팅 잘봤습니다

아아2019.05.07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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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의와 이성으로 좋아하는 마음을 구분짓기.. 호의는 호의로 받아주는게 좋을것 같네요!

Amy09182019.05.07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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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님 오늘도 잘 봤습니다!ㅎㅎ다음번 포스팅은 물김치 만들기 레시피 어떠세요?

감동2019.05.07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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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1급자격증을 취득하시면 아니되옵니다.

잘 보고 갑니다~

쿠로체2019.05.07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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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매뉴얼은 대쪽같군요!!ㅎㅎ

ㅇㅅㅇ2019.05.07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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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도끼병 사연들이 많이 올라오네요. 사연으로 읽기엔 웃기지만 막상 본인이 그런 상황이 되어보지 않고서야 모르는거겠죠? 그나저나 무한님 물김치 레시피 궁금하네요. 공유해주실 생각은 없으신지....

빨주노초파남보라2019.05.07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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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밤에 물김치가 먹고 싶은데 어쩝니까

김문도2019.05.08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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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고 갑니다.

찐 고구마랑 삶은 달걀2019.05.08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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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님
응원합니다.

ㅁㅍㄹ2019.05.09 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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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의 늪'이라는 박경림씨의 명곡이 있습니다. 추억을 떠올리며 한번 들어보세요.

피안2019.05.09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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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김치 갑자기 먹고 싶네요
요즘 다이어트라 풀떼기만 먹고 있는데 ㅎㅎ
오늘도 잘 읽고 갑니다

Ace2019.05.09 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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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어, L양의 착각 보고 있는 제가 다 민망하군요 ㅠㅠ 저도 요즘 날이 갈수록 정줄을 놓고 있어서 스스로를 돌아보며 더욱 부끄러워요. 요샌 소개팅 애프터만 와도 결혼은 언제할지부터 생각하는 듯.. (먼 산)

저도 무한님의 물김치 레시피가 궁금하네요! 마나님이랑 잘 지내고 계신지도 궁금하구요. 가끔 알콩 달콩 신혼 생활 얘기도 들려 주세요, 히히

ㅎㅎ2019.06.18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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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재밌게 보고있어요ㅎ 저도 김치국 그만 마셔야겠네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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