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가는 곳의 직원이, 그것도 꽤 오래 방문하던 중에 번호를 물은 거니,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번호를 묻는 ‘버스정류장 번호 앵벌이’류의 케이스는 아닌 것 같다. S양의 염려처럼 ‘어장에 넣으려고’ 번호를 물은 것도 아닌 것으로 보이며, S양은 ‘그가 비겁한 사람이라 이런 것인가?’라는 뉘앙스의 질문도 내게 했는데, 그가 왜 어디가 비겁하다는 건지 난 잘 모르겠다는 대답을 해줘야 할 것 같다.
그가 보통의 남자에 비해 좀 느긋하며, 번호를 물을 때완 달리 연락을 트고 난 후 그만큼 적극적이지 않은 건 맞다. 번호를 물어 놓곤 여자가 먼저 만나자는 말을 하기 전까지는 멍하니 있는 게 답답하긴 한데, 거절을 절대 하는 법이 없다는 측면을 보면 또 너무 부정적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더불어 그를 더 덤덤하게 만들고 만 것엔 S양의 책임도 있는데, 사연을 보낸 건 S양이니 S양이 달라질 수 있도록 오늘은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좀 나누는 게 좋겠다.
S양은 내게
“제가 원래 뭐하냐, 밥은 먹었냐, 메뉴는 뭐였냐 같은 질문을 받는 걸 좋아하는 성격은 아닙니다. 그래서 저도 굳이 묻지 않고, 상대도 묻지 않으니 이런 부분에서는 편하기도 합니다.”
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런 게 없다면 말을 덜 해도 되니 편할 순 있겠지만, 일상을 공유한다는 측면에서는 서로에 대해 아는 게 없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물을법한 것들을 묻지 않는 것이 ‘관심 없음’으로 여겨질 수도 있으며, 그냥 서로에 대해 ‘서로가 생각하는 상대의 이미지’를 두고 관계를 맺는 거지 진짜 현실의 상대에 대해 알아가며 관계를 맺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또, 이건 아무래도 S양의 ‘묻거나 따지는 별로 안 좋아하는 성향’ 때문에 고착화된 부분인 것 같은데, S양은 상대가 뭐라고 얘기를 했을 때 별로 관심을 안 보인다. 그냥 잘 모르는 사람이 대충 받아주는 것 같은 1차원적 리액션은 한다고 할까.
(1)
남자 – 오늘은 끝나고 친구도 만나고, 정신없었네요.
남자 – 일도 참 바빴고….
여자 – 글쿤요. 고생하셨어요~
(2)
남자 – 내일은 결혼식장 갈 일이 있는데
남자 – 가서 실컷 먹고 와야겠어요 ㅎㅎ
여자 – 넹넹. 맛난 거 많이~
남자 – 여자씨는 오늘 실컷 먹은 거죠?
여자 – 네 후식까지 잘 먹었네여 ㅎㅎ
(3)
남자 – 그래도 오늘은 운동도 빼놓지 않고
남자 - <사진> 이 정도 했다는….
여자 – 스트레칭 하고 주무세요~ 피곤하겠어요~
저런 리액션이 문제가 된다는 걸 이전에 어떤 매뉴얼에서도 설명했더니,
“저건 여자가 관심이 없는 건데요? 썸남이랑 대화하는데 멘트를 저렇게 치는 여자가 어딨나요?”
라는 댓글이 달리던데, 라스베이거스에서는 상상도 못 할 저런 일들이 실제로 벌어지곤 한다. 실제 저 대화는 S양이 상대와 주고받은 걸 살짝 각색한 것이며, 심지어 저 대화는 실시간이 아닌 긴 텀을 두고 이루어진 것이다.
연애를 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사실 상대에 대해 뭐 엄청 궁금한 게 아니니 묻고 싶은 게 없을 수 있고, 나아가 ‘친구 만났다, 결혼식장 간다, 운동 끝났다’ 등의 이야기를 하는 상대의 멘트에 속으로 ‘그래서 뭐 어쩌라고 여기다 일기쓰냐.’ 할 수 있다. 그럴 수 있긴 한데, 너무 막 그래 버리면 상대가 이쪽이 좋다고 매달리며 어떻게든 인터뷰 같은 대화 한 번 더 하려고 달려드는 사람이 아닐 경우 그냥 다 지나치게 될 수 있다.
요약하자면 좋든 싫든 뭐가 어떻든, 10층에 가려면 1층부터 9층까지는 거쳐야 한단 얘기다. 의무적인 친절과 관심을 가진 채 처음부터 알아가는 그 과정이 나도 개인적으론 상당히 귀찮고 피곤하긴 한데, 그게 없으면 쉽게 가까워진 만큼 쉽게 멀어질 수 있으며 훗날 ‘내가 생각했던 상대’와는 다른 ‘실제의 상대’에게서 생각도 못 한 모습들을 보게 되며 충격을 받을 수 있다. 또, 짧게 보면 필요 없는 것 같지만 길게 보면 거기서 디테일이 나오고 공감대를 찾게 되며 서로에 대한 의미를 갖게 되는 법이니, 당장 큰 ‘연애’부터 생각하지 말고 소소하게 ‘상대’부터 봐가며 대화를 해봤으면 한다.
S양은 또 상대가 S양에게
“속 이야기 원래 잘 안 하는 편이죠? S양은 엄청 밝아보이긴 하는데, 뭔지 모르게 속내를 전혀 안 비치는 것 같아요.”
라는 이야기를 한 적 있다고 하는데, 바로 저 이야기가 S양이 가진 의문에 대한 답이 될 수도 있겠다. 속 이야기를 조금씩 터놓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일상적인 안부를 공유하는 것도 아니다 보니, 10층에 있는 사람과 1층에 있는 사람이 그냥 서로 쳐다보며 손 흔드는 것 정도의 관계만 맺어지고 만 것이다.
상대가 S양에게 번호를 묻고 연락을 해왔을 때, 그때 그에게 S양은 포장이 되어 있는 궁금한 상자 같은 존재였을 수 있다. 그런데 계속 연락을 하고 만나기까지 해봤는데 포장은 전혀 풀리질 않았고, 상대는 그 안의 내용이 궁금하다며 S양에게 대놓고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둘이 나누는 대화는 어쩌다 한 번 보는 은행 창구 직원과의 대화처럼 그냥 의무적 친절과 리액션의 반복일 뿐이었으며, 상대가 먼저 자기 얘기를 꺼내도 S양은 잘 훈련된 방청객처럼 ‘아아~ 네에~ 오오~’ 정도만을 할 뿐이니, 하나의 사람으로 느껴지진 않고 그냥 ‘아는 사이’라는 인맥 정도로만 느껴진 게 아닌가 싶다.
“서로 꼭 모든 부분을 알고, 서로의 모든 걸 다 알아야겠다는 마음으로 만날 필요는 없는 거잖아요? 꼭 굳이 이상형은 어떻게 되는지, 지난 연애는 어땠는지,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등을 물어야 하는 건가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S양이 좀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은데, 꼭 ‘아무것도 묻지 않거나, 모든 걸 묻거나’일 필요는 없다. 내가 얘기하는 건 상대가 ‘요즘 하는 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그 운동을 왜 시작했는지 정도를 물어보며 관심을 보이라는 거지, 상대 과거사를 다 캐내라는 얘기가 절대 아니다. S양의 말대로 ‘그냥 만나서 밥 먹고 같이 놀면 재미있음’도 좋지만, 그건 어느 순간 흥미를 잃거나 지루함을 느끼게 되면 관계 전체가 잘려나갈 수 있으니, 그러는 중간중간 둘의 공감대나 둘만 아는 이야기들로 뿌리도 내려야 한다는 얘기를 하는 거고 말이다.
현재 이렇게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시간과 조건과 상황이 다 맞아떨어지는데도 S양은 ‘상대는 언제 고백할 생각인지? 사귈 마음은 있는지?’에만 초점을 둔 채 답답해하는 중이니, 열매는 때가 되면 맺히고 익는 거라 생각하며 지금은 꼭 누가 먼저라는 걸 따지지 말고 열심히 물 주고 가꿔가 봤으면 한다. 애정과 의미는 그렇게 함께하는 여정이 더해주는 거지, 둘 다 얼른 연애하고 싶어 하는 타이밍이 맞았다고 저절로 다 생기는 게 아니라는 걸 잊지 말길 바라며,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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