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든 마시는 걸 좋아하는 나는, 중국집에서 볶음밥을 먹을 때 거의 빠짐없이 짬뽕국물을 한 번 더 달라고 부탁하곤 한다. 그러면 열 번 중 아홉 번은 서비스로 주기 마련이며, 나머지 한 번 역시 당장 짬뽕 주문이 없어 국물이 없다고 할 뿐이지 '무슨 심보로 국물을 더 달라고 하는 거냐'며 타박하는 일은 없다.
부탁하는 일은 아주 쉽다. 나온 짬뽕국물을 다 마신 뒤, "죄송한데, 짬뽕국물 조금만 더 주실 수 있어요?"라는 말 한 마디면 된다. 그렇게 한 마디만 하면 '더 줄 수 있다/없다'를 알 수 있는 건데, 그러지 않고 만약 내가 서빙하는 분 또는 주방에 계신 분과 슬쩍슬쩍 눈만 마주치다가, 짬뽕국물을 다 마셨음을 빈 그릇 숟가락으로 긁어가며 표현하고, 빈 그릇 든 채 더 먹고 싶다는 무언의 메시지만 눈동자로 표현하고 있으면, 그건 삶을 너무 힘들게 사는 것 아닐까? 그러면서 동시에 같이 온 일행에게 '주방에다가, 짬뽕국물 좀 더 달라고 하면 줄까? 못 준다며 괜히 타박이나 주는 거 아닐까?'만 묻고 있다면 더더욱.
수영장에서 그녀와 자주 마주치며 이제 인사까지는 하는 사이가 되었지만, 그녀가 이쪽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이나 호감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S씨의 사연이, 마치 짬뽕국물을 더 달라고 말은 못한 채 점원과 눈만 마주치고 있는 상황처럼 보인다. 비슷한 상황에서 S씨처럼 행동하고 있는 어느 남자대원은
"근데 저에게만 인사를 하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다른 남자분 두 분에게도 인사를 하더라고요. 그 중 한 분은 전에 한 번 대화 나눴을 때 결혼한 걸로 들었으니 호감이 있어서 인사를 하는 건 아닌 것 같고, 다른 한 분은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객관적으로 보자면 그분보다는 제가 좀 더 낫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라는 이야기를 한 적도 있는데, 이렇듯 뭔가를 더 해서 친분을 만들 생각은 안 하고 혼자 분석과 예측만 하는 대원들을 모아 중국집에라도 데려가고 싶은 생각이 든다. 가서 단무지나 짬뽕국물을 좀 더 달라고 '말을 하는' 훈련을 좀 시키고 싶다. '물은 셀프'라고 커다랗게 쓰여 있는 곳에서 또 물 달라고 요청하는 대원도 있겠지만.
여하튼 그렇게 '분석과 예측만 할 때' 발생할 수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자신과 상대와의 관계를 구경만 하며 온갖 의미부여를 하고, 때때로 절망과 좌절, 또는 근거 없는 기쁨을 누리며 연애망상증을 앓게 되는 것.
이라 할 수 있겠다. 사연을 보면 S씨 역시 이미 초기 단계에 접어든 것 같은데, 실제로 상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이쪽 혼자
'빤히 날 보는 것 같은데, 나에게 뭘 요청하는 건가?'
'내 앞에서 더 빨리 지나가는 것 같은데 날 많이 의식하나?'
'일부러 질투심 유발 같은 걸 하려고 다른 남자에게 인사한 건가?'
라는 생각으로 여러 감정을 느끼거나, 상대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이쪽에게 보내는 메시지라 생각하기 시작하는 순간 위험해질 수 있다. 아직 이성과의 대화나 관계도 어색하고 속으로 생각하는 것이 더 익숙한 이십대 극초반이라면 뭐 그러려니 할 수 있지만, 그게 아님에도 모든 이성과의 관계를 위와 같은 식으로 생각하다간 매번 '현실 속 진짜 상대'와는 상관없는 '내 생각 속 상대'를 두고 섀도복싱을 하다 끝날 수 있다. '짬뽕국물'을 좀 더 달라고 애초에 말 한 번 했으면 오히려 좋은 결과가 나왔을 수 있는데, 그걸 안 하고 혼자 속으로 생각하고 상상하다가 '내가 눈빛으로 보낸 요청을 점원이 몇 번이고 무시했다'며 분노만 표출해 다 망칠 수 있단 얘기다.
수영장 연애고민 중, S씨의 상황은 A급으로 아주 좋은 상태다. 상대가 먼저 인사를 건네 오고, S씨가 스몰토크를 시도했을 때 그녀가 제법 자세한 대답까지를 해줬다. 매일 저녁 수영장에서 마주쳤을 때, 인사하며 잠깐 대화하는 게 이상하거나 어색하지도 않은 관계다. 이 와중에도 S씨는
"저는 아직 그녀의 이름도, 나이도, 전화번호도 아무것도 모릅니다."
라며 답답해만 하고 있는데, 그런 건 상대에게 수영 언제부터 했는지 물어보며 나이를 알아낼 수 있고, 퇴근하고 오는 거냐 물어보며 직업이나 직장도 알 수 있고, 우리 인사는 열심히 하는데 아직 이름도 모른다며 내 이름 먼저 알려주며 상대 이름도 알아낼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렇게 현실적으로 친해질 수 있는 수백 가지 방법이 있는데, 이런 걸 다 놔두고는
"상대에게 쌍둥이냐고 물어보려다 못 물어봤네요. 답답하고 억울했습니다."
라는 괴상한 이야기만 S씨가 하고 있기에 내가 담배를 못 끊고 있다. 뭐 아직 그라운드 위 우리 진영에서 내게 볼도 오지 않았는데, '내 슛이 성공할지는 어떻게 알 수 있냐'는 다섯 레벨 후의 이야기를 묻지 말고, 일단 공을 달라고 해서 드리블하며 중앙선까지 가는 걸 목표로 삼자.
가다가 잘 안 되거나 모르겠으면 내게 사연을 보내면 되니 걱정하지 말고, 오늘 저녁 수영장에서 상대와 만나면 수영 언제부터 했는지를 물어보며 물고를 트자. 그런 다음에 상황 봐가며 '강사님이 물속에서 항아리 그리라는데, 항아리를 어느 정도 크기로 그리세요? 대? 중? 소? 아, 항아리 뚜껑은 그리는 거 아니죠?' 따위의 드립도 좀 섞어주면 된다. 이쪽의 대한 상대의 관심이나 호감이 있는지를 알아내려 맨땅에 수식을 쓰고 답을 구하려 하기보다는 핫팩을 쥐어주든 두유를 쥐어주든 현실적인 뭐라도 먼저 좀 하길 바라며, 다른 분들도 다들 불금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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