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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매뉴얼(연재완료)/솔로부대탈출매뉴얼(시즌5)

연 수입 수 억인 남자와의 소개팅, 그리고 처참한 썸.

by 무한 2015. 6. 3.

어제 전 집에서 키우는 구피와 새우 사료를 좀 사려고 웹을 돌아다니다가, 아래와 같은 소비자의 항의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사료 먹이반응 좋고 오래 먹이면 발색 좋아진다고요? 제가 제품 받자마자 바로 줘봤는데, 먹이반응은 그냥 그럭저럭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보니 새우 네 마리가 죽어 있네요. 지금 뒤집어져 있는 고기도 있고, 어항에서 썩은 내가 진동합니다. 이따위 사료 팔지 마세요."

 

이후 판매자가 댓글을 달며 둘이 대화를 하던데, 저건 사료의 문제가 아니라 구매한 사람의 문제였습니다. 그 분이 키우는 마릿수를 고려하면 네모난 사료 하나만 줘도 되는 거였는데, 그 분은 설명글을 제대로 안 읽곤 그냥 들이 부은 겁니다. 때문에 밤새 어항 속에선 잉여 사료들이 부패했고, 그 결과 생물들의 죽음으로 이어지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좋은 사료라고 해도 투여량을 지키지 않으면 생물들을 죽일 수 있는 것처럼, 노멀로그에 있는 매뉴얼들 역시 상황과 사람에 맞지 않게 사용하거나, 한 부분만 가져다 사용하면 오히려 상황을 나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예컨대 칭찬과 리액션 같은 건 참 좋은 도구지만, 매번 저 두 가지만 사용하고 있으면 상대는 이쪽을 본인 팬클럽 회원이나 멍충이로 볼 수 있는 겁니다. S양은 신청서에 반복적으로 "매뉴얼에 써있는 대로 했다."라는 이야기를 하시던데, 그게 어떻게 악영향을 끼쳤는지 그것부터 살펴보겠습니다.

 

 

 

 

1. 영혼 없이 사용한 연애기술들.

 

부탁과 감사표시, 역시나 좋은 기술입니다. 그런데 계속 부탁만 하면 누구라도 짜증나지 않겠습니까?

 

여자 - 나 지금 이러이러한 상황인데 이럴 땐 어떻게 하지?

남자 - 그럴 땐 어쩌고저쩌고 해봐.

여자 - 고마워. 역시 오빤 모르는 게 없어.

 

여자 - 나 갑자기 이러이러한 게 안 되네, 어쩌지?

남자 - 그럼 어쩌고저쩌고 해봐.

여자 - 우와 된다. 오빠 짱!

 

여자 - 내 친구가 이러이러한 상황이라는데, 뭐라고 말해줘야 할까?

남자 - 어쩌고저쩌고 그렇게 말해줘 봐.

여자 - 역시 오빤 대단해! 오빠가 있어서 든든하다.

 

S양에게선, 나중엔 소재가 떨어지니 '친구 관련 부탁'까지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사실 부탁이라기보다는 그냥 혼자서도 결정할 수 있는 걸 억지로 대화소재로 삼는 모습도 많았습니다만, 여하튼 S양은 본인이 부탁과 감사표시를 사용하면 상대가 기뻐하고 뿌듯해 하는 모습을 보이니 계속 그것들을 사용했습니다. 거의 모든 대화에 한 번씩 저 "오빠는 역시~"라는 게 등장할 정도로 말입니다.

 

그럼 S양의 그런 태도를 계속 경험하는 상대에겐,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이건 그가 직접 한 말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 '오빠는 역시'좀 그만해~"

 

부담스럽고 불편한 겁니다. 상대가 열 몇 살짜리 꼬꼬마라면,

 

"우리 심남이 이런 것도 할 줄 알아? 어이구 잘 하네, 우쭈쭈쭈."

 

라는 칭찬에 고래와 함께 춤을 추겠지만, 상대는 삼십대 중반이지 않습니까? S양이 그런 말들을 진심으로 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영혼 없이 환심을 얻기 위해 하는 건지 눈 감고도 알 나이입니다. 관심과 애정이 있다면 물어야 할 다른 것들은 묻지 않은 채, 그저 맹목적으로 '참 잘했어요'도장을 찍을 준비를 한 채 대화를 위한 대화를 하고 있다는 걸 진작 눈치 챘던 겁니다.

 

상대가 지인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걔 얘기는 이제 그만 하자."

 

라며 짜증을 좀 낸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도 같은 맥락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S양이 궁금하지도 않으면서 그저 말을 이어가기 위해

 

"그래서요? 어떻게 됐어요? 그 사람이 뭐래요?"

 

라는 리액션을 하고 있다는 걸, 그도 눈치 챈 겁니다.

 

S양이 이번엔 정말 잘 하려고 다짐을 해서인지, 일반적인 경우보다 심각할 정도로 저런 모습을 보이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쌓인 마일리지만으로도 평생 비행이 가능할 정도로 상대를 비행기 태웠다고 할까요. 그건 아래에서 이야기 할 상대의 오만을 더욱 살찌우는 일이 되었고, 결국 S양은 그에게 손 벌리는 수많은 '을' 중 하나로 여겨지고 말았습니다.  

 

 

2. 무례하지만 무례해도 괜찮은?

 

아무래도 감정보다는 조건에 눈이 갔었다는 이야기를 S양이 해주셨으니, 저도 거기에 맞춰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수 억 짜리 슈퍼카를 타는 남자는 자신이 슈퍼카를 탄다는 걸 압니다. 자신이 슈퍼카를 탄다는 게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지도 알고, 그것으로 인해 자신이 받게 될 혜택도 압니다. 에르메스 백을 든 여자가 그게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모르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제가 더는 연락을 안 하고 지내는 지인이 하나 있는데, 그 지인은 일산이 신도시가 되기 전 대대로 일산에 큰 땅을 가지고 있던 부자입니다. 그는 이십대 초반까지는 그러지 않았는데, 이십대 중반 이후로 친구나 지인들을 무슨 용역 불러서 밥 먹이는 것처럼 대하곤 했습니다. 그를 아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메뉴를 정해 놓으면, 그는 나중에 등장해선 다른 거 먹으러 가자고 말하는 등의 일을 저질렀습니다. 다 자리 잡고 앉아 있는데도 막무가내로 자신이 다른 거 쏠 테니 내려오라는 이야기를 한 겁니다. 그럼 사람들은 그가 쏜다고 하니 얼른 자리를 털고 내려갔습니다.

 

이건 뭐 어디까지나 제 심증만 있는 것이며 소심한 오해일 수도 있습니다만, 저는 그가 일부러 그런 심술을 부릴 때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지인에게 이틀 와서 자신을 도와주면 일당 이십만 원씩 주겠다고 했다가, 그 지인이 돈 생각에 계속 연락을 해서 언제 도와주냐고 물으면, 사과도 없이 도와줄 일 없어졌다고 통보하는 일 등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보통의 경우라면 이렇게 사람 가지고 노는 것 같은 일이 벌어지면 화를 내며 따지거나 다시 안 볼 생각을 하겠지만, 그렇게 되면 훗날 그가 주는 혜택들을 받을 수 없으니 꼬리를 내리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의 그런 오만함과 심술은 날이 갈수록 그 정도가 심해졌고, 때문에 그에게 아쉬워하며 밥 한 끼라도 더 얻어먹으려고 애쓰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와의 연을 끊게 되었습니다. 그의 주변엔 소위 '꼬붕'이라는 불리는 심부름꾼들만이 남게 되었고, 그가 부탁을 핑계로 세차를 시키면 키를 받아다 열심히 손세차까지 해주는 지인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가 약속시간을 펑크 내든, 아니면 개인적인 잡무를 시키든 군말 없이 있을 수 있는 사람들만 말입니다.

 

S양이 만난 남자에게서, 제 지인의 모습과 겹치는 부분들이 보입니다. 이게 평범한 사례들이 아니라 여기다 그대로 적기가 좀 뭐한데, 그냥 평범한 상황에서 벌어진 일들이라 가정하고 적어보겠습니다.

 

소개팅남이 S양을 만납니다. 그런데 만나서 밥을 먹고는, 사실 오늘이 회식이었다고 하면서 회식자리에 같이 가자는 이야기를 합니다. 가서는 대충 다른 직원들에게 S양을 소개하곤, 다른 여직원 손목도 붙잡고 놉니다. 그렇게 몇 시간을 보낸 후, 이제 들어가봐야 하지 않겠냐면서 S양을 데리고 잠시 술집에서 나옵니다. 택시를 잡고, 기사에게 돈을 주며 잘 좀 부탁드린다는 말을 합니다.

 

제가 아는 여자 중, 저 상황을 참고 견디며 미소만 짓고 있을 여자는 한 명도 없습니다. 절반 정도는 중간에 자리를 박차고 나올 것이고, 나머지 절반은 억지로 끝까지 버티고 나선 집에 와 주선자에게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냐며 한 마디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저 회식자리에 오는 사람들이 다들 억대 수입이 있는 사람들이고, 여직원이 아니라 모 방송사의 아나운서라고 하면 얘기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보통 택시가 아니라 (저로서는 택시 잡다가도 보이면 택시 안 잡는 척 하는)모범택시고, 택시비가 얼마인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은 채 얼마가 나오든 커버 가능한 한 장 건네 준 거라면 역시 또 달라질 수 있습니다.

 

만나서 같이 밥 먹다가 상대가 "잠시만요, 전화 좀 받을게요." 해 놓고는, 30분 가량 통화하는 건 어떻게 보든 예의가 아닙니다. S양도 너무 화가 나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리려고 했다고 적어주셨는데, 물론 그러진 않았습니다. 연 수입 수 억인 남자가 전화를 하니 뭔가 엄청 중요한 전화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 이렇게 박차고 나가버려 관계가 끝나면 손해 보는 건 S양 자신이라고 생각했으니 말입니다.

 

이처럼 S양은 그가 다혈질인 성격을 드러내며 화를 내도, 갑자기 짜증을 부리거나 신경질을 부려도, 또 이해가 안 갈 정도로 무례한 태도를 보여도 전부 이해하려 노력했습니다. 상대가 보통의 남자였다면 바로 물이라도 끼얹을 만한 상황에서도, S양은 침착함을 유지하며 미소를 지으려 노력했습니다. 소제목 1번에서 말 한 것처럼,

 

"오빠만큼 완벽한 사람이 어딨어? 그런 오빠한테 그 사람은 왜 그런데?"

 

하는 영혼 없는 칭찬과 리액션만 하며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결국 S양은 그에게 '그래도 되는 여자'가 되었고, 며칠 연락 끊고 있다가 다시 연락하면 S양은 버선발로 달려 나왔으니, 그냥 딱 그 정도의 마음과 관심과 열정을 쏟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다 그것도 별 감흥이 없어 아예 인연의 끈을 팽개치고 말았습니다.

 

 

제가 본 S양의 사연은 위와 같습니다. 때문에 S양이 제게 한 질문들이 아무 의미 없으며, '자존심을 버리고 더욱 노력'같은 S양의 말에

 

'여기서 더 어떻게 자존심을 버릴 수 있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 뿐입니다. S양은 그에게 너무 의존하고 있었던 까닭에 연락두절이 된 이후로는 너무 버티기가 힘들어 치료까지 받고 있다고 하셨는데, 그건 그에게 의존하고 있었던 게 아니라 이 관계를 삶의 돌파구, 또는 도피처라고 생각하고 계시다가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이라고 보시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실질적으로 그는 S양에게 1g의 애정이나 특별한 의미도 부여한 적 없습니다. 소개팅 한 관계라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말들을 했을 뿐이며, 오히려 그것보다도 못한 무례하고 몰상식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S양과의 대화가 귀찮다는 듯한 내색을 그대로 드러냈기도 했고 말입니다.

 

동화 중에, 이런 동화가 있지 않습니까?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는데, 어떤 사람이 계란을 품으며 상상하는 동화 말입니다. 계란을 품어 병아리가 되면 키워서 닭을 만들고, 닭이 되면 그걸 팔아 뭔가를 사고, 뭔가를 사면 그걸 또 부풀려 더 비싸게 팔고, 비싸게 판 돈으로 더 비싼 것을 사고, 팔고, 사고, 팔고 하다가 집까지 짓는 상상하는 동화. 그 동화는 그가 계란을 품은 채 행복한 미소를 짓고 걸어가다 넘어져, 계란이 깨지며 끝나는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는 S양의 이번 소개팅이, 그 동화의 내용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와 잘 되면 S양이 얻게 되는 이익이나 지위를 상상하느라 행복했던 거지, 그와의 만남이 행복했던 게 아닙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S양의 계란은 무정란이었습니다. 밤낮으로 품는다고 해도 결코 병아리는 태어나지 않는 무정란 말입니다. 그러니 "그와 친구로라도 지낼 수 있으면 내가 괜찮아질 것 같다."라는 상상은 그만하시고, 내 인생, 내가 책임져야 하는 현실로 돌아오시길 권합니다.

 

그런 사람과 친구로 지내지 않아도 S양은 S양 자체로 빛나던 여자입니다. 스카이 석사에 부족할 것 없는 집안환경, 주변에서 '예쁘고 학벌 좋다'는 평가를 듣는 여자. 그런 여자였던 S양이, 겨우 돈 하나 때문에 상대의 무례함을 온 몸으로 감당하며 "친구로라도…."라는 이야기를 하진 않았으면 합니다. 상대가 묻지마 관광을 다니는 남자라고 해도 마음이 정리 안 될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는 지금은, S양이 잠깐 정신줄을 놓은 상황이라는 걸 얼른 깨달으시길 권합니다. 어머니께 다 털어놓고 등짝 스매싱을 당해서라도, 정신차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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