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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매뉴얼(연재완료)/솔로부대탈출매뉴얼(시즌5)

애프터만 한 달째, 그에게선 무슨 말이 없어요. 외 1편

by 무한 2015. 8. 29.

몇 년 전, 난 DSLR을 처음 사용하는 지인에게 사용법을 알려준 적이 있다. 카메라를 처음 만져보는 지인이었기에, 조리개와 셔터스피드, 그리고 ISO의 상관관계, 그리고 JPEG과 RAW의 차이, 빛과 그림자, 구도, 노출보정 등에 대해 전부 이야기를 해줘야 했다. 그는 꽃 사진 찍는 걸 목적으로 하고 있었는데, 난 실제로 그와 산에 올라

 

"지금 서있던 자리에서 그대로 찍으니까 배경이 산만하게 나오잖아. 그런데 우측으로 가서 찍으면 배경이 검게 나오겠지? 그럼 검은 배경에 흰 꽃이 부각되니까, 확 눈에 띄는 사진을 건질 수가 있잖아."

"이건, 꽃은 잘 나왔는데 줄기가 애매하게 잘렸잖아. 주제가 되는 걸 집어넣었으면, 그 다음엔 프레임 안에 뭐가 들어왔나 구석도 살펴야 해."

"초록색이 많을 땐 노출보정을 좀 어둡게 하는 게 좋아. 밝은 건 밝게, 어두운 건 어둡게. 지금은 어둡게 놓고 찍지만, 흰색이 많을 땐 밝게 해놓고 찍어야지."

 

등의 이야기로 가이드를 해주기도 했다.

 

당시 그는 이전 촬영할 때 설정해 둔 ISO를 안 바꾸기도 하고, 또 잘못 눌러 AF모드를 바꿔 놓은 뒤 초점이 안 잡힌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그래서 난 속으로 '갈 길이 삼만 리네. 언제쯤 여기에 익숙해져서 좀 자유롭게 찍으려나….'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그로부터 1년 후, 그가 전국을 돌며 찍은 꽃 사진들은 책에 실려 출판되었다. 

 

난 자신이 만나는 남자가 '여자나 연애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는 여성대원에게, 위의 이야기를 기억하며 상대에게 일단 좀 가르쳐주길 권하고 싶다. 연애 경험이 없으면

 

'밥 먹고 어디 가지?'

'거리가 꽤 되는데 어느 어느 역으로 나오라고 해야 하나?'

'푹 쉬라는 저 말은 더는 카톡을 하지 말라는 건가?'

 

라는 생각을 하며 갈팡질팡할 수 있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상사가 무슨 무슨 서류를 작성해서 어디다 넘겨주라고 하면, 그 서류가 어디 있는지, 넘겨주라는 건 메일로 주라는 건지 프린트 해다가 주라는 건지 모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우선 좀 이쪽의 생각이나 원하는 바를 명확하게 말해주고, 더불어 상대가 지금 상태로 5년, 10년 계속 똑같지만은 않을 거라는 것도 염두에 두자. 이런 경우 대개 '이런 사람이라면, 만나도 문제가 될 것 같은데….'라는 생각으로 결국 마음을 접곤 하는데, 그게 현재 개간만 안 되어있을 뿐 땅 자체는 금싸라기 일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길 바란다. 자 그럼 불토맞이 매뉴얼, 출발해 보자.

 

 

1. 애프터 한 달째, 그에게선 무슨 말이 없어요.  

 

L양과 P씨의 관계는 아직도 좀 어색하고, 불편하다. L양은 이걸 P씨의 초식남스러운 태도, 또는 연애경험이 없어서인지 능동적이지 못한 태도 때문에 그런 거라 보고 있는데, 내 생각은 좀 다르다. L양이 모든 걸 다 잘 하고 있다는 가정을 하다면 그렇게 보일 수 있겠지만, 여기서 보기엔

 

- L양 역시, 상대가 약간의 실망도 하지 않게 하려 자신을 편집해서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라는 이유가 분명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L양에게서 위와 같은 모습이 나타나는 건, 어쩌면 L양에게 습관화 되어있는 처세술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사연신청서에 L양이 자신에 대해 설명한 부분을 보자.

 

"모임에서 늘 뭔가를 맡아서 하는 편입니다. 웬만해서는 싫은 소리를 하지 않고 속으로 삭히는 스타일입니다. 그러나 해야 할 말이라고 생각하면 철저히 시나리오를 다 짜놓고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인지, L양이 상대와 나눈 대화를 보면 흠 잡을 데가 없다. 다만 그게 딱히 잘한 것도 아니고 못한 것도 아닌 그냥 너무 '적당히'인 것이랄까. 내가 단골 미용실에 갔을 때 헤어디자이너와 나누는, 그 정도의 대화처럼 느껴진다. 대화가 호의와 긍정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게 고객과 주인장이기 때문인, 그런 느낌.

 

L양이 내 여동생이었다면, 난 아래와 같은 이야기를 해줬을 것 같다.

 

"잘 하고 있어. 잘 하고 있긴 한데, 남자 입장에서 네 태도를 보면 모든 소개팅남이나 썸남에게 다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수 있거든. 그러니까 뭐랄까, 너는 포청천 같아. 카이 펑 요우 거 빠오 칭 티엔. 모든 상대에게 형평성에 기초한 공정한 호의와 친절을 건넨다고 할까.

 

이 남자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네 연애 전체에 대해 살펴봐도 그래. 지금처럼 상대들을 대한다면, 결국 상대의 성향이 적극적이며 당장 열정적으로 들이대는 경우만 '사랑'이라고 생각하게 될 수 있거든. 그런데 너도 알겠지만, 처음부터 막 달아오를 경우 그만큼 급히 식는 경우도 있잖아. 능숙한 태도로, 또 열정적인 모습으로 들이대지 않는 사람 중에도 진국이 있을 수 있는 거고.

 

지금 만나는 상대에 대해선…, 일단 처음 만나서 밥 먹을 때 상대가 손을 덜덜 떨었다며. 나도 첫 데이트 때 그랬어. 갈비를 먹었는데, 입이 아니라 콧구멍에 집어넣을 뻔 했지. 지금은 감자탕 먹고 난 뒤 밥 볶을 때 예술적으로 누룽지를 벗겨내는 경지에 이르렀지만 말이야. 그러니까 연락이나 표현, 그리고 꽃다발을 건네며 고백을 하는 등의 모습을 지금부터 너무 기대만 하지 말고, 멍석을 깔아주며 코치해줘 봐.

 

지금, 상대가 아는데 안 하는 거 아니고 몰라서 못 하는 거거든. 살짝 힌트만 줘도 금방 알아채곤 그대로 할 거야. 연락이나 표현은 벌써 점점 좋아지고 있잖아. 다만 그게 서로가 조금도 실망할 일 없도록 너무 각 잡은 채 표현하는 것 같으니까, 아예 그것까지를 다 말해버려. 넌 여린 마음이라, 사람과 알아갈 때 혹 실망하거나 실수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일이 있다고 털어놔. 그럼 상대도 거기에 대해 공감하거나, 자신의 생각을 털어 놓을 거야. 바로 그런 대화가 둘의 관계를 1cm씩 깊게 만들어 줄 거고, 지금은 발목까지 밖에 안 오는 깊이라 해도, 그런 대화가 거듭되면 킬로미터 단위까지 관계가 깊어질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아, 하나 더. 상대가 묻는 말에 대답만 할 게 아니라 꼭 "오빠는요?" 라고 되물으라는 얘기도 해줬을 것 같다. 지금은 상대가 질문을 하면 L양이 충실히 대답하며 대화가 이루어지는데, A4 10장 분량의 충실한 대답보다 중요한 건 한 번의 되물음이란 얘기를 해주고 싶다. 이미 연애를 시작해 햄볶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즐겁게 볶으시길.

 

 

2. 딱 그만큼만 사랑했기에 헤어진 걸까요?

 

아라씨, 난 몇 년 전 내 지인의 연애를 보며 좀 마음이 아팠던 적이 있어. 지인은 여자였는데, 그녀의 어머니가 몇 년 전에 돌아가셨거든. 그런데 내가 빈소를 찾아갔을 때 그녀의 남자친구가 보이질 않는 거야. 난 이틀간 방문했는데, 이틀 내내 그녀의 남자친구 얼굴을 볼 수 없었어.

 

그녀는 남친이 가게를 운영하는 까닭에 자리를 비울 수 없어 못 오는 거라고 했는데, 그게 내 입장에선 이해하기가 어려웠어. 그냥 중학교나 고등학교 동창 정도의 친구사이라면 그럴 수 있어. 조의금을 가는 친구 편에 보낸 뒤 전화로 사정 정도만 설명할 수 있겠지. 그런데 그 정도 사이가 아니라 둘은 연인인 거잖아. 결혼까지 생각하며 진지하게 몇 년을 만나는 와중에 여자친구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가게 때문에 자리를 비울 수 없기에 그저 전화로 밥 먹었냐, 사람들 많이 왔냐, 좀 쉬어라 등의 이야기를 하는 게 난 이해하기 어렵더라고.

 

물론 사람들이 다 나처럼 생각해야 하는 것도 아닌 거고, 또 각자 사는 방식이 다 다른 거니까 그들 몫의 삶은 그들이 알아서 책임지며 살겠거니 하고 말았지. 그녀가 내게 자신의 남자친구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면 난 염려되는 지점들을 이야기 해줬겠지만, 그녀는 내가 묻지 않았고, 또 당시 내 슬로건이

 

"나나 잘 하자. 누가 묻지 않는 것에 대해서까지 참견하지 말자."

 

였던 까닭에, 그저 그녀가 감정을 추스를 수 있게 토닥토닥 해주고 돌아왔지.

 

글쎄 난, 사실 이 부분에 대해 타인에게 내 생각까지를 들려주기가 조심스럽기도 하고 망설여지기도 해. 전에 한 번 비슷한 얘기를 했다가, 꽤 많은 분들로부터

 

"뭐하러 남친 아버지 장례식장에 가서 음식까지 나르냐. 부모님들께 다 인사드렸던 사이도 아니고 겨우 반 년 만난 건데 그럴 필요 뭐가 있냐. 그리고 처음부터 그렇게 하면 시댁에선 그걸 당연한 줄 안다. 오버하지 말고 그냥 참석했다 오는 것 정도만 하면 된다. 다 마치고 남친 힘내라고 해주면 되는 거다."

 

라는 항의를 받은 적 있거든. 공쥬님(여자친구)과 나는 이런 부분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지만, 뭐랄까 그냥 내 가족에게 일이 생겼다고 생각하며 행동하는 편이야. 꼭 오래 사귀어서 그런 건 아니고,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그냥 그랬어.

 

그래서 난, 이런 '생각의 일치점'이 잘 맞는 사람과 만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 어떤 신혼부부의 얘기를 들어보니, 식 마치고 신혼여행 가려고 비행기를 탔는데, 남편이 앉자마자 이어폰을 꽂더래. 그래서 그걸 가지고 아내가 섭섭하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앞으로 몇 박 며칠 동안 계속 같이 있을 건데, 가는 길에 음악 좀 듣는 게 뭐 어떠냐면서, 이해하기 힘들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다는 거야. 별 게 다 서운하다는 투로 말이야.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난 아라씨와 남자친구가 이 부분에서 맞지 않았던 거라 생각해. 아라씨는 나처럼 연애를 시작하면 연인과 '깜보'가 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타입이고, 남친은 오래 사귀며 그럴만한 마음이 들 때가 되어야 그러는 게 맞는 거라고 생각하는 타입이지. 아, 아라씨의 남친에겐 이 '생각의 차이'에 더해 받는 것에 익숙하고 주는 것에 인색한 문제도 있긴 해.

 

여하튼 난 아라씨와 남친 사이에 저런 차이가 있었던 까닭에, 계속해서 갈등이 깊어졌다고 생각해. 아라씨 남친이 돈 안 내려고 꾸물거리거나, 택시비 때문에 연기하는 것 같은 부분에서는 같은 남자인 내가 봐도 싫더라고. 선물 역시 남친은 아라씨에게 받기만 하곤 주지 않는 것도 그렇고, 나중에 주기로 한 돈들도 말끔히 정리되지 않은 것도 그렇고, 그냥 참 이 사람은 대체 뭔가 싶을 정도야. 뭐, 돈은 당장 형편이 안 되어 그렇다 쳐. 그런데 가만 보면 마음으로라도 특별히 더 하는 것도 없거든. 더불어 집에서 떠받들어지는 것이 습관화 되어서 그런 건지, 자신만 어느 집 '귀한 아드님'인 줄 아는 것도 좀 어이없어. 종합하자면, 그는 좀 이해하기 어려운 남자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

 

저런 근본적인 부분에서 계속 마찰이 생기니까, 아라씨의 입장에선 억울한 마음에 그때마다 복수하려 한 것 같거든. 데이트 중 그냥 집에 가 버린다든지, 전화기를 꺼버린다든지, 항의하려 가시 돋친 말을 한다든지 하는 걸로 말이야. 이러다 보니 자연히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게 된 거지. 남친이 개차반처럼 굴면 아라씨가 화를 내며 복수하려 들고, 그러면 남친은 그걸 보며 아라씨에게서 정이 떨어지고, 정이 떨어진 남친이 관계에 다리만 걸쳐둔 것처럼 굴면 아라씨는 그에게 더 큰 상처를 내려 하고….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된 거야.

 

아, 그리고 아주 객관적인 입장에서 누가 이별선고를 한 것인가를 말하자면, 이별선고는 아라씨가 한 게 분명해. 아라씨가 연락처와 SNS를 지워버린 행동, 그리고 상대에게 한 말의 의미와 뉘앙스 들을 따지면 그건 누가 봐도 헤어지자는 거거든. 아라씨는 기분이 정말 너무 나쁘고 무너지는 느낌이 들어 그랬다고 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자른 건 자른 거야. 실제로 아라씨는 지인들에게 헤어졌다고 말하기도 했잖아? 그러니 이제 와서 그때 그랬던 건 진심이 아니었고 다시 잘 해보자고 말했는데도 남친이 반응을 안 보인다고 더 화내지 말고, 이 관계는 여기서 그만 정리하길 권할게. 이 와중에 붙잡아도 남친이 안 잡힌다고 '마음이 그 정도이기 때문인가요?'라고 묻는 건, 바보 같고 이기적인 태도일 뿐이야. Let eat bee.(응?) 흘러가는 건 흘러가게 두고 우린 다시 갈 길 가보자고.

 

 

이제 네 밤만 자면 드디어 휴가를 떠나게 된다. 어제는 출입국 심사대를 통과하는 꿈을 꿨는데, 꿈속에서 세관이 날 붙잡곤 카메라 렌즈들에 대한 관세를 다 내야 한다고 말했다. 난 이게 한국에서 사서 쓰던 렌즈들이며 면세점에서 구입한 게 아니라고 항의했지만, 그는 렌즈들을 압수당하든지 돈을 내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했다. 그렇게 실시간으로 의사소통이 잘 될 리 없으니 그게 꿈이라는 걸 바로 알아챘어야 하는데….

 

아, 며칠 전부턴 친구들과 카톡을 할 때 영어로만 대화하기로 한 채 연습을 하고 있는데, 서로 안부인사를 하고는 더는 대화를 나누지 않는 일이 늘고 있다. 한 친구는 계속해서 내게

 

"Can you speak Korean?"

 

이라고 묻고 있는데, 아무튼 큰 도움이 되진 않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여행 가서

 

"Could you give me a 'nice tourist' discount?('착한 여행자'찬스 좀 써도 될까요?)"

 

등의 드립도 막 던져보고 싶은데, 내가 가는 곳은 총기 소유가 합법이라고 하니 드립은 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인도여행을 다녀온 재치 있는 친구에게 물었더니, 물건 값을 깎을 땐

 

"150 Please. You're happy, I'm happy, we're happy."

 

라고 했다고 하던데, 역시나 큰 도움이 되진 않고 있다.

 

매뉴얼은 다음 주 수요일까지 발행하고 떠날 예정이라, 목요일과 금요일만 기다려 주시면 그 다음 주에 다시 뵐 수 있을 것 같다. 매뉴얼을 미리 써둔 뒤 예약발행을 할까 했는데, 그것보다는 휴재 공지를 띄운 뒤 그 글에 근황을 실시간으로 업데이트 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 몇 밤 더 자야 하는데도 벌써부터 여행얘기를 하는 건, 살짝 들떴기 때문이니 좀 이해해 주시길 부탁드리고 싶다. 자 그럼, 다들 즐거운 주말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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