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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매뉴얼(연재중)/연애오답노트

열 살 연하 외국인 남친과의 연애, 우린 무엇이었을까요?

by 무한 2015. 10. 8.

문학적 표현은 흥미로워요. 문학적 서사는 다음 이야기를 궁금해지게 만들고요.

 

"내 나이 열아홉 살, 그때 내가 가장 가지고 싶었던 것은 타자기와 뭉크화집과 카세트 라디오에 연결하여 레코드를 들을 수 있게 하는 턴테이블이었다."

 

- 장정일 <아담이 눈 뜰 때> 중에서.

 

저런 이야기를 아주 현실적으로 바꿔서,

 

"내 나이 열아홉 살, 그때 내가 가장 가지고 싶었던 것은 칼라 슬라이드폰이었다. 41만원 주고 흑백 듀얼폰 사고 나니까 곧바로 칼라 슬라이드폰 출시해서 진짜 완전 빡침."

 

이라고 쓰면 맛이 안 살잖아요. 물론 작가라면 칼라 슬라이드폰을 갖고 싶은 마음에 여학생 폰을 훔쳤다가 벌어지는 일들로 풀어갈 수 있겠습니다만, 그런다 해도 뭔가 문장에 젖어드는 듯한 느낌은 안 살잖아요.

 

제게 사연을 보내시는 분들 중에도, 기성 작가들의 뺨을 발바닥으로 후려칠 수 있을 만큼 표현력이 뛰어나신 분들이 있습니다. 전에도 한 번 소개했지만,

 

"친구라고 해도 권력관계가 형성되기 마련이잖아요. 우리는 친구였지만, 녀석은 자신만의 카르텔을 만들어 놓고 있었고, 저는 늘 그 주변을 맴도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같은 문장은, 내용을 떠나 그 글을 적은 '한 사람'까지도 궁금하게 만들거든요. 제 마음에서 그의 마음과 닮은 부분들이 일제히 호감을 느끼며 눈을 빛내니까요.

 

 

1. 문학적 삶의 문제.

 

저도 낭만을 좋아하고 문학을 사랑합니다. 마음속에 저 대신 뛰어나가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개도 여러 마리 키우고 있고, 복잡한 감정을 함축된 한 문장으로 정리하는 것도 좋아하며, 시간이 오래 지난 후에 다시 꺼내보아도 그 심정이 그대로 박혀있는 의미부여도 좋아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만약 저런 태도로만 현실을 대하며 산다면, 누군가와 갈등이 있을 때 상대에게 악당이란 의미를 부여한 후 밀어내 버리거나, 사실은 그냥 한 인간일 뿐인 상대에게 저의 판타지를 덧씌운 후 맹목적으로 동경하기도 할 겁니다. 연애를 하다가도 다툼이 생기면, 스스로 그어 놓은 한계를 운명이 부여한 한계라 여긴 채 괴로워하며 후회와 미련의 긴 글을 쓸 것이고 말입니다.

 

K양이 한 말을 잠시 보겠습니다.

 

"남녀간의 사랑은 언젠가는 끝이 있지요. 특히 저와 같은 경우라면…."

 

저 말을 보며, K양 스스로 이미 한계를 그어 놓고 있다는 생각이 들진 않으십니까? 잘 모르시겠다면, 이번 상대와의 이별 말고, K양이 전에 사귀던 남자와의 이별에 대해 이야기 한 부분을 다시 한 번 보시길 바랍니다.

 

"정말 처음이었어요. 그가 나를 진짜로 떠나주길 바랐던 건."

 

이게 소설이라면, 저런 문장들이 감정도 극대화 시키고 이야기의 흥미를 더하기도 할 겁니다. 그런데 이건 현실이지 않습니까? 현실에서도 저래버리면, 혼자 짜놓은 '기승전결' 대로 계속 이야기를 완결하게 되는 일이 벌어지고 맙니다. 만약 두 사람이 싸웠다 하더라도 감정이 좀 가라앉고 난 뒤 다시 대화를 하면 될 일을 가지고,

 

"그에겐 전화가 오지 않았습니다. 불과 두 시간 전까지만 해도 우린 나중에 같이 살며 강아지를 키우는 일에 대해 이야기를 했었는데…. 지금 이대로 가 버리면 우린 정말 헤어지는 거라고 했던, 그의 말은 사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루, 이틀, 저는 왜 그렇게 바보 같았을까요. 언제나처럼 그가 다시 제 손을 잡아 주리라 생각했는데…."

 

라며 이별의 시나리오를 쓰고 맙니다. 또, 저런 일이 벌어졌다 하더라도 다시 오해를 풀고 둘의 관계를 정비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는 건데, 역시 그 상황도 문학적으로 해석해 넘긴 뒤 아래와 같은 이야기를 하고 맙니다.

 

"술을 마시고는 그의 페이스북에 메시지를 남겼던 것 같습니다. 전 아침에 일어나 제가 저지른 일을 확인하고는 곧바로 탈퇴를 해 버렸고, 혹시나 메시지를 확인한 그가 제게 화를 낼까봐 전화번호도 바꿔버렸습니다. 그러고는 세 달 쯤 지났을 때, 제 머리가 기억하고 있는 그의 번호로 생일 축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혹시 <고장 난 벽시계>라는 노래 아십니까? 그 노래에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한두 번 사랑땜에 울고 났더니, 저만큼 가버린 세월."

 

문학적 상상력과 창의력이 뛰어난 분들은, 한 번의 연애에 대해서도 막 5년, 8년,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습니다. 헤어진 이후에도 계속해서 의미를 부여하거나, 스스로 희망과 절망을 섞어 놓곤 그걸 운명이라 여기며 계속 손에 쥐고 있는 까닭입니다. 이별 후에도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를 보게 되면 그것에 또 상대를 대입시켜 놓고는 새로운 시나리오를 쓰기도 합니다. 등단이나 출판을 생각하고 계신 거라면 말리고 싶진 않습니다만, 그게 아니라면 주어진 현실을 차가운 머리와 냉정한 감정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2. 연하 외국인 남친을 바라보는 K양의 문제.

 

상대에 대해 K양이 말하는 걸 보면, K양의 판타지가 너무 많이 덧입혀져 있습니다. 머리와 눈동자 색깔, 그리고 긴 팔 다리 뭐 그런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연애 중 그가 보이는 태도들까지도 많이 미화가 되어 있습니다. K양도 이걸 스스로 깨닫고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상대가 저보다 나이도 어리고, 또 아무래도 서양남자니까 이해하고 넘어간 부분들이 많았어요. 만약 한국인 남친이 그랬다고 하면 당장 사형감이었던 행동들도, 나름 너그러이 인정해주는 척도 하고 그랬습니다."

 

제가 늘 하는 얘기가 있지 않습니까? 말 보다 행동을 보라는 얘기 말입니다. 그가 했던 말과 행동들은 어떻게 달랐는지, 어떻게 변했는지를 한 번 곰곰이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Before] 너와의 관계는 나의 미래다.

[After] 너와만 지내는 건 고립되는 느낌이다.

 

[Before] 네가 그러고 싶다면, 난 널 지원하겠다.

[After] 내 인생은 내 인생이다. 너랑 상관없이도 결정할 수 있다.

 

[Before] 이것만 마치면 너랑 함께 살고 싶다.

[After] 난 부모님과 함께 살아야 한다.

 

[Before] 네가 이것만 들어준다면 난 너와 인생설계를 하고 싶다.

[After] 책임감 때문에 사귀는 거나 죄책감 때문에 못 헤어지고 싶진 않다.

 

이런 변화를 전부 다 목격하고 있으면서, 그저

 

"계속 달라지는 그의 말에 전 너무 혼란스러웠어요. 물론 그도 괴로웠겠지만…."

 

라고만 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하나 더. 아무리 그가 또래와 달리 어른스러워 보이고 듬직한 면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의 나이가 K양보다 열 살이나 어리다는 걸 한 번씩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K양은 그의 나이 때 어떠셨습니까? 지금 그때를 돌아보면, 철없던 모습과 바보 같던 생각들이 보이지 않습니까? 바로 그걸, 지금 그가 행할 수도 있는 겁니다. 제가 지금 대학에 막 입학한 새내기에게, 앞으로 집 마련은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보면 새내기는 당황하지 않겠습니까? 새내기에게 집 구입에 대한 아무 대책이 없다고 해서 새내기가 잘못 살고 있는 것은 아니고 말입니다.

 

K양은 상대와의 결혼을 생각하며 관계를 진행시키려 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국에서 살고 있는 32세의 캐나다 여자 선생님이, 20세의 남학생과 연애를 합니다. 그런데 그녀는 얼른 결혼을 하고 싶어 하고, 또 아이를 낳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그녀가 결혼을 밀어 붙이면, 당연히 학생은 당황하고 버거워하지 않겠습니까?

 

K양의 남친이 키도 크고 어른스러우며 다정하고 책임감이 있다고 해도, 그는 이십대 초반입니다. 그런데 K양은 그에게 많이 기대하고 의존한 나머지 이런 사실을 망각하고 말았고, 그를 얼른 어른의 테이블에 앉힌 채 K양이 바라는 대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상대는 아직 노는 거 좋아하고, 미래에 대한 대책은 나중에 세워도 된다고 생각하며, 엄마를 무서워하는 꼬꼬마입니다. 이걸 염두에 둔 채 K양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읽어보면, 많은 의문점들이 해결 되리라 저는 생각합니다.

 

 

3. 잘못된 연애습관.

 

결혼을 앞둔 대원들에게 제가 이야기 하는 것들이 몇 가지 있지 않습니까? 그 중하나가

 

- 상대는 부모님으로부터 경제적, 정서적 독립을 했는가?

 

라는 겁니다. 이 기준으로 K양을 본다면 만점일 겁니다. K양은 어린 나이에 독립을 했고, 이후 지금까지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고 책임지며 살아왔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연애를 하게 될 경우, K양은 '그러지 못한-경제적, 정서적 독립을 하지 못한- 상대를 데려다 보육하듯' 한다는 점입니다.

 

이건 이번 K양의 이번 연애가 연하 외국인 남친과의 연애라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 이전에도, K양은 구남친을 아이 돌보듯 돌보며 연애해 왔습니다. 이걸 말하면 신분이 드러나는 까닭에 말하지 못하지만, 그를 위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일들까지 해주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문제가 있을 경우 K양의 뒤로 숨는 것에 익숙해졌고, 나아가 연인이 아닌 모자사이처럼 되어버리기도 했습니다.

 

K양은 상대에게 경제적 지원과 헌신을 제공한 뒤, 정서적인 보답을 바라곤 합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기쁘기에 그렇다고 하신다면 저는 그걸 아름답게 생각할 것입니다만, 별 다르게 노력하지 않아도 K양이 전부 알아서 개척하고 책임져가게 된다면 상대는 긴장의 끈이 풀리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될 경우 K양은 다급함을 느끼며 좀 더 강한 태도로 상대에게 정서적 보답을 요구하는데, 그러면 상대는 K양의 잔소리에 지겨워하며 자신이 K양의 변덕을 더는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제가 그의 연락에 대답하지 않으면 그는 제가 헤어지자고 할까봐 걱정했다고 해요."

"싸우고 제가 헤어지자고 하면 그는 잠 한 숨 못 자고 뜬 눈으로 밤을 새기도 했어요."

"제가 그의 마음을 확인하려 심술을 부리면, 그는 울면서 그러지 말라고 했었는데…."

 

K양 입장에선 저런 일들이 상대방 사랑의 깊이를 다시 깨닫게 해주는 일들일지 모르겠지만, 상대 입장에서 보자면 저건 악몽이나 고문처럼 여겨질 것입니다. 특히 K양은 상대보다 인생도 더 살았고, 아는 것도 많기에 싸워서 진 일이 없습니다. 저 위에서 말한 32세의 캐나다 여자 선생님이, 20세 한국 청년에게

 

"지금 네가 나를 너희 부모님께 소개하지 않는 건 네 의지 없음이 반영된 행동이고, 또…."

 

라는 식으로 압박하면, 상대는 자신의 의사나 감정과는 상관없이 계속 나쁜 사람, 잘못된 행동을 하는 사람이 되는 것에 괴로워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쪽에서 더 많이 헌신하고 더 많이 책임지는 것으로 상대의 마음과 충실함을 얻을 수 있는 거라면, 저는 이런 글을 쓰는 대신 [기막히게 헌신하는 99가지 방법], [헌신의 끝을 보여주자, 강남 돼지엄마 따라하기] 같은 글을 쓰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기에, 헤어진 지금도 상대에게 뭔가를 해줄 생각만 하는 K양을 이렇게 돌려 세우고 있습니다. K양은

 

"한국에 잠시 들어가는 그에게, 가서 쓰라며 빠빳한 한국 돈이라도 챙겨줄까 싶기도…."

"한국에 있으며 외로울 수 있으니 제가 잠깐 들어가 서프라이즈를 해줄 생각도…."

"아니면 그가 부담스러울 수 있으니 공항까지만 나가 멀리서 몰래 지켜볼까 하기도…."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빠빳한 한국 돈은 제가 좀 필요 합니다. 그러니 국민은행 9990-312…로 보내달라는 건 훼이크고, 이제 엄마 마음으로 상대를 챙기는 건 그만 하자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연애를 시작하면 상대 데려다가 뜨거운 밥 해먹이고 싶고, 또 춥게 입고 다니면 옷 사서 입히고 싶겠지만, 그런 쪽으로만 일방적으로 헌신하고 베풀면 당연한 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시작하자마자 상대에게 모든 권한을 다 주며 현모양처 모드로 진입하는 건 이제 그만 두고, 동등한 입장에서 기울지 않도록 적절하게 마음 쏟는 것에 집중하시길 권합니다.

 

 

제가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제 얘기들 역시 K양에겐 자신의 사랑을 몰라주는 사람의 이야기로 읽힐까봐 걱정이 되긴 합니다.

 

"무한님도 다른 사람들처럼 생각하실까요. 남들이 말하는, 고등학교 남학생이 선생님을 좋아하는, 그런 것으로만 그냥 여기시게 될까요. 제 사랑이 비현실적인 것이었다 생각하실까요…."

 

시인 박준의 <마음 한철>에 이런 구절이 나오지 않습니까?

 

"한철 머무는 마음에게

서로의 전부를 쥐여주던 때가

우리에게도 있었다"

 

저 마음을, 어찌 가벼운 불장난으로 치부하거나, 서로의 착각이 만들어낸 촌극이라 여기겠습니까. 다만 제가 얘기하고 싶은 건, 머물던 상대의 마음이 떠나간 게 여름인데, 이제 곧 겨울이 오는 지금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넘어져 있진 말자는 겁니다. 추운데 반팔 입고 그렇게 누워 있으면 입 돌아가니까요.(응?) 툭툭 털고, 그간 잘 해왔던 것처럼 다음 페이지로 넘겨 또 잘 하면 되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열심히 돕고 있으니, 같이 힘내서 페이지를 넘기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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