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전문직 효과'를 처음 목격한 건, 지인 A씨를 보면서였다. A씨는 학창시절 인기가 없었고, 약간의 중2병을 지닌 채 짝사랑을 전문적으로 했었다. 학교에서도 짝사랑, 학원에서도 짝사랑, 교회에서도 짝사랑, 뭐 그런 포지션을 유지하며 애정결핍을 연료삼아 늘 혼자서만 불타올랐었다.
그런데 그런 A씨가 대학 졸업 후 전문직을 갖게 되니, 생각지도 못했던 경로를 통해서까지도 소개팅이 물밀듯 밀려들어왔다. 그 상대들도 아나운서, 의사, 스튜어디스 등의 쟁쟁한 직업을 사람들이었고, 어느 지역에 종교건물을 하나 지어 기증한 적 있다는 유지의 딸까지도 만나게 되었다.
수 년 뒤 A씨가 그 중 한 명과 결혼을 하긴 했지만, 그 '수 년'의 시간동안 A씨는 참 많은 헛발질을 했다. 여자와 한 번도 함께 밥을 먹어본 적 없기에 만나서 밥 먹는 것부터가 그에게는 큰 도전이었고, 이후 연락과 표현 등에 있어서도 상대에게 쓴소리를 듣거나 주선자에게 혼나가며 배우게 되었다. 짝사랑 전문가로 활동하던 시절의 버릇이 고개를 들어 그는 상대에게 무릎부터 꿇으려 하거나, '날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는 증거'를 찾으려 들었는데, 그런 행동들도 역시 많은 문제를 불러 일으켰다.
A씨가 그렇게 헛발질을 하던 시기에, 난 '현장 감독 및 지원사격'의 임무를 배정 받아 A씨와 같이 상대를 만나러 나간 적 있다. 거기서 내가 본 건 '전문직 여자 - 전문직 남자'의 만남이 아니라, '학습지 선생님 - 그 선생님을 어려워하는 학생'의 모습이었다. 그 자리에서 내가 딱히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기에, 나 역시 '놀러 왔다가 같이 학습지 선생님 보게 된 친구1'의 포지션에서 상대의 말을 경청하기만 했다. 그때 상대에게 들었던 말들 중 아직도 기억나는 것들이 있는데, 이번 매뉴얼과는 상관없으니 접어두고, 바로 첫 사연부터 만나보자.
1. 소개팅녀가 퀸카라서 걱정이라는 남자.
H씨의 사연을 내가 처음 받아보는 것도 아닌데, H씨의 사연을 볼 때마다 난 서두에서 말한 지인의 '헛발질 기록'이 떠오른다. 내 지인이 헛발질을 하며 보내야했던 이유를 다시 한 번 보자.
- 이성과 친하게 지내본 경험 없음.
- 현재 전문직이지만, 종종 고시 준비할 때의 마음이 되어버림.
- 상대가 날 안 좋아하는 것 같다는 증거를 찾으려 함.
- 상대는 나보다 더 괜찮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함.
- 무작정 웃기려고 들거나, 어떻게든 환심을 사려 뻔한 행동을 함.
지인이 저런 혼돈의 시기를 보내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하던 시절에, 난 아래와 같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형, 상대가 무슨 학습지 선생님이나 담임선생님이고 형이 학생인 게 아니잖아. 상대가 유창하게 말을 잘 하고 형이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내면, 그런 부분을 칭찬하며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들으면 돼. 그런데 형은 그 상황에서 '저 사람은 나랑 다른 차원에 사는, 훨씬 고귀한 존재 같아.'라는 생각을 하면서 자폭한단 말이야.
형도 형이 잘 하는 것에 대해 말하거나 보여주면 돼. 형이 잘 하는 거 뭐야. 4드론? 아니, 게임 말고. 형 피아노 칠 줄 알잖아. 바이엘 하권 밖에 안 쳤어도 괜찮아. 그냥 그 얘기를 하면 돼. 피아노를 더 배우고 싶었지만 학원에서 피아노 치다 바지에 설사해서 그만 둔 얘기 같은 건, 정말 친해지면 하거나 아니면 하지 말고.
딱 봐봐. 기본 마인드가, '넌 내게 특별해. 그래서 너와 이야기하면 즐겁고, 또 이야기 하고 싶어'가 돼야 해. 그런데 형은 '넌 내게 특별해. 그런데 난 평범하고 보잘 것 없지' 쪽으로 기운단 말이야. 그래서 결국은 '난 사실 겨우 이정도지만, 그래도 만나줄래?'가 되어버리는 거고. 이래버리면, 형이 밥을 사면서도 상대가 마음에 들어할지 아닐지만 걱정하게 되는 거야. 그러지 말고 딱, '맛있는 집 있다는데, 거기 가서 같이 먹자' 정도까지만 생각하라고. 그 다음은 그 다음 함께 할 거 하면 돼. 그 집 음식 맛없는 게, 아니면 그 집 음식이 상대 입맛에 안 맞는 게 형 잘못이 아니잖아. 쫄지 마."
H씨에게도 같은 얘기를 해주고 싶다. H씨는 현재
"외적인 부분은 상대가 정말 많이 뛰어나서, 솔직히 저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입니다."
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상대랑 즐겁게 지내며 서로 알아가려고 만나는 거지, 무슨 비교 대조 하려고 만나는 것 아니잖은가. 누가 봐도 예쁘다고 할 상대를 만났으면, 그건 행운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거기서 더 나아가 H씨가 가지고 있지 못한 것들을 상대는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든지, 아니면 상대는 H씨 보다 훨씬 더 괜찮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든지 하며 '하지 않아도 될 걱정들'을 만들진 말자.
"그녀가 같이 밥 먹으면서 한 의미심장한 얘기들이 있는데…."
의미심장하든 의미십이지장하든, 말은 그냥 말이다. 지금 상대와 연락하고 있고, 또 만날 약속을 잡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닌데, 뭐하러 걱정을 만들어서 하고 있는가. 만약 상대가 사계절 중 겨울이 제일 싫다는 이야기를 한다면, 평생 잊지 못할 겨울을 함께 보내며 상대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 되도록 바꿀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겨울이 싫다고 하니 겨울에는 밖에서 만나기보다는 전화와 카톡을 통해 연락하고….'라며 쫄지 말고, 박력 있게 좀 리드하자. 아, 하나 더. 새로 만나는 상대와 과거 연애 얘기를 해서 좋을 건 하나도 없으니, 묻지도 말고, 상대가 물어오면 자연스레 다른 얘기로 돌리길 권한다.
2. 헤어진 후 남친과 친구로 지내는 중인데 괴로워요.
구걸은 당장 멈추자. 구걸하는 여자는 상대에게 거지처럼 보일 뿐이다. 필사적으로 구걸해 관심을 잠시 받는다고 해도, 그냥 상대가 베푼 한 순간의 적선으로 끝나는 게 대부분이다. 관심을 줄 생각이 없는 상대에겐 작별을 고해야 한다. 상대가 어쩌다 외로운 날에 잠깐 찾아와 봉사활동 하듯 만나주는 것에 만족하다보면, L양의 그 '연애 거지' 생활은 그가 내쫓기 전까지 청산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거지'라는 단어까지 써가며 L양에게 찬물을 끼얹으려 하는 건, 그러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L양이 너무 오랜 시간을 거기에 쏟았기 때문이다. 스물다섯에 만나 얼마간 사귀곤 이별. 이후 재회를 꿈꾸며 머뭇거리다 보니 이제 서른. 여기서 몇 년 더 허송세월하는 건, 죽음의 골짜기로 걸어 들어갔다가 겨우 목숨만 부지해 나오는 일일 뿐이다.
L양이 내 여동생이었다면, 난 L양의 멱살을 잡고서라도 그 관계에서 끌고 나왔을 것이다. 상대에겐 L양과 함께 할 의지도, 능력도, 생각도 없다. 4.2%의 관심을 줄 테니 그걸로 만족하면 계속 거기 있고, 아니면 말라는 투의 이야기를 할 뿐이다. 42%가 아니라 4.2%다.
L양도 이미 느껴 알고 있겠지만, 난 그가 L양이 병원에서 시한부 판정을 받는다고 해도, 그가
"그래? 어쩌다 그렇게 된 거지. 아직 젊은데, 안 됐네."
라는 반응정도만 보일 거라 생각한다. 이런 상대에게 뭘 기대하고 희망하며 기다리는 것인가?
"그래도 헤어진 직후에 비하면, 조금씩 더 가까워져, 지금은 오래 전 '사귀기 전'처럼 된 것 같은데요."
'사귀기 전'처럼 된 게 아니라, 무감각하고 무덤덤해진 거다. 그 둘은 그 형태가 비슷하지만 의미는 전혀 다르다. L양이 서른이 된 지금, 다시 고교시절 교복을 입어본다고 해서 열일곱 고등학생이 되는 게 아닌 것처럼 말이다.
L양이 이 '연인도 아닌, 그렇다고 친구도 아닌' 사이로 지내는 것에 지쳐 절교를 선언하곤, 그러다 또 본인이 아쉬워 그에게 연락하면, 그는
"너무 힘들면 그렇게 억지로 끊으려고 하지 마. 천천히 해도 돼."
라고 말할 뿐이다. 저것마저도 L양에겐 '차갑지만 또 다정한' 모습으로 보이는가? 난 저 말이 '네가 북을 치든 장구를 치든 네가 치는 거니, 치고 싶으면 치고 치기 싫으면 치지 마. 나랑은 별 상관없어.'로 들린다.
"우린 정말 너무나 잘 맞고, 서로가 지금껏 이렇게 잘 맞는 사람이 인생에서 없었다는 걸 알아요. 서로에 대해 너무 속속들이 잘 알아서, 말하지 않아도 이해한다 할까요. 한 때 결혼도 생각했던 사이고…."
나도 정말, L양처럼 말하는 대원들을 수도 셀 수 없을 만큼 겪었다. 그런 대원들에게 그 '말하지 않아도 이해하는 사이'라는 것의 8할이 환상과 의미부여라는 것도 목이 쉬도록 설명했고, '세상에 또 없을, 이렇게 잘 맞는 사람'이라고 말하던 사람들이 다른 사람과 잘만 살더라는 얘기도 질리도록 했다. 주장하는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왜 관계가 그 모양이겠냐고 반문까지 해가며 말이다.
또, L양은 자신이 상대를 존중했기에 그가 원하는 걸 다 들어주고 맞춰준 거라고 말하는데, 그건 존중이 아니다. 상대의 말에 따르지 않으면 헤어지는 것 말고는 선택지가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승낙하는 게, 어떻게 존중인가? 그건 복종이지 존중이 아니다. 유효기간 지난 상대의 마음에, L양의 청춘 다 바쳐가며 노크만 하고 있진 말길 진심으로 부탁한다.
오늘은 우리 둘 다 태어나서 처음 맞는 2016년 1월 13일 수요일인데, 왜 L양 혼자 그 폐허가 된 음지에 틀어박혀 회색빛의 하루를 보내고만 있는가. 거기서 돌아 나오면 흥미롭고 아름답고 따뜻한 것들이 가득하다. 좀 더 생각해보다 내일이나 모레쯤 거기서 나오겠다는 말도 필요 없고, 이 글을 읽는 즉시 일어나 뚜벅뚜벅 걸어 나오길 바란다.
3. 여자친구 동성친구들에게까지 질투를 하게 돼요.
여자친구도 김군에게 관심이 있으니까 만나는 거고, 좋으니까 사귀는 거다. 잊지 말자. 김군을 절망으로 이끌어가는 두려움이 찾아올 땐, 항상 이 문장을 항상 떠올리며 스스로 자신감을 북돋을 필요가 있다. 홀로 고민하다 울퉁불퉁한 마음이 된 채 여자친구의 행위 하나하나를 다 지적해가며
"이건 나에게 푹 빠졌다는 증거가 아닌데? 그렇지 않아?"
라고 묻기 시작하면, 그 길이 바로 이별로 가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연애를 시작했다고 해서 모두가 부모님도 몰라 볼 정도로 상대에게만 푹 빠져야 하는 건 아니다. 모든 대인관계를 끊고 연애에 미쳐야 하는 것도 아니고, 만나자는 친구의 연락에 핑계를 대며 오로지 연인과만 붙어 있으려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내가 생각하는 연애란 이런 것인데, 왜 상대는 이렇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며 상대의 마음이 부족하다거나 날 좋아하지 않는데 만나고 있는 것 같다고 여기진 말자. 내가 매뉴얼을 통해 질리도록 말하지 않았는가.
"혼자 있는 힘을 다해 뛰어가면서, 상대보고 왜 너는 전력질주 안 하냐고 따지기만 하세요? 상대의 걸음에 맞춰 걷는 것이, 연애를 하며 배워야 할 가장 첫 번째 일입니다."
어느 친구와 밥을 먹으러 갔는데, 친구가 밥 나온 지 6분 만에 밥을 다 먹어 놓고는
"아직 멀었어? 남은 거 다 먹을 거야? 얼른 먹어. 뭐 이렇게 밥을 오래 먹어? 다 먹은 거야? 국물까지 다 먹을 거야? 나 먼저 나가서 담배 피우고 있을까?"
라고 말하면, 그 친구와 다시는 밥을 먹고 싶지 않아질 것 아닌가. 그것과 마찬가지로 김군이 여자친구에게 재촉을 하기 시작하면, 여자친구는 그 연애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만 할게 될 것이다.
"사실 제가 이렇게까지 질투하진 않았어요. 그런데 이번에 여친이 친구들이랑 스키장에 다녀와도 되냐고 묻는데, 제가 가지 말라고 하면 안 가겠다고 했지만 가지 말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거기엔 남자들도 포함되어 있던데, 우선은 연락을 잘 하는 걸 조건으로 승낙했습니다. 제가 가지 말라고 하면 또 많이 아쉬워 할 거고, 제가 여자친구의 대인관계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해서…."
내가 김군과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난 내 솔직한 심정을 상대에게 말했을 것 같다. 여자친구 역시 그게 그래도 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면 안 되는 것 같기도 해서 저런 이야기를 꺼내면, 여자친구가 그 말을 했을 때 내 기분은 어떤지에 대해 여자친구에게 말해줄 것이다. 그리고 반대의 경우일 때라면 여자친구는 어떨지, 그 부분에 대해서도 묻고 대답을 들었을 것이다. 그럼 단순히 '승낙'을 해놓곤, 나중에 '여자친구가 나보다 친구들에게 더 관심을 두는 것 같다'는 생각으로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에 질투를 하진 않을 수 있으니 말이다.
"저희가 대화는 많이 하는 편입니다. 수시로 카톡하고, 틈날 때마다 전화통화 합니다. 자기 전에는 1시간 이상 전화로 대화하다 잠들고요."
혹시 그 '대화'라는 게, 웹툰이나 미드, 게임, 식사, 뉴스, 뭐 그런 것들에 대해 나누는 '수다'인 것은 아닌가? 정작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우리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으면서, 저런 이야기들로 2시간 3시간 통화했다고 뿌듯해 하는 대원들 때문에 난 가슴이 먹먹하고 손발이 떨려온다. 전에 한 번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그럼 저런 얘기하지 무슨 얘기를 하나요? 매번 연락을 할 때마다 진지하게 우리의 관계에 대해 토론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요?"
라는 이야기를 하는 분이 있었는데, 내 말은 매번 연인과 100분토론 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나중에 싸울 때 정색하며 쏟아 낼 이야기들을 쌓아두지만 말고 중간중간 녹여서 해야 한다는 거다. 평소 혀 짧은 소리 내가며 통화하거나 카페에 앉아 부비고만 있을 게 아니라, 내 기분이 어떤지, 그것에 대해 난 어떻게 생각하는지, 넌 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대화를 해야 한다. 나중에 마당 있는 집 지어서 개 키우고 애들 데리고 여행 다니겠다는 뜬구름 잡는 얘기만 할 게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서로의 감정과 생각들을 나눠야 한단 얘기다.
위에서 말한 것들을 지켜나가다 보면, 조급해 하거나 상대를 재촉하지 않아도 저절로 '우리 VS 다른 사람들'의 구도가 만들어 질 것이다. 그러니 당장 상대가 연애와 김군을 최우선에 두며 다른 모든 것은 필요 없다고 말하길 기대하지 말고, 단단한 기반을 만들어 나가길 권한다. 둘은 아직 연애 시작한 지 한 달도 안 지나지 않았는가. 꽃 한 송이를 피우기 위해서도 그것보다 더 많은 기다림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 법이니, 급한 마음은 내려두고 상대와 발걸음을 먼저 맞춰가 보자.
외부에 보내야 할 원고가 많이 밀린 관계로, 오늘 배웅글은 생략해야 할 것 같다. 다들, 오랜만에 내리는 눈과 함께 즐거운 수요일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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