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자 중 내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좌회전 늦게 하는 사람'이다. 좌회전 신호가 들어왔는데도 꾸물거리거나 딴 짓을 하느라 출발하지 않으면, 뒤에 있는 사람 중 몇은 신호가 끊겨 한 번 더 신호를 기다려야 한다. 때문에 머뭇거리다가 딱 자신까지만 좌회전 신호 받는 사람을, 나는 악당으로 여긴다.
첫 사연의 주인공 Y씨는, 매뉴얼에서 본 '가랑비 작전'을 사용하는 중이라고 한다. 그런데 Y씨가 사용한다는 그 작전이, 여기서 보기엔 아무래도 좌회전 신호 들어왔는데 머뭇거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가랑비 작전'을 제안한 건 직진 중 노란 신호가 들어오면 멈췄다가 갈 수 있어야 한다는 걸 말한 건데, Y씨는 그걸 잘못 받아들여 좌회전 신호에 멈춰있다.
"스터디의 다른 남자 분들이 다가와 그녀에게 말을 거는 것이 많이 보여, 선뜻 저까지 다가가긴 좀 어려웠습니다. 그 틈을 치열하게 비집고 들어가 대화에 끼고 싶지도 않았고요."
그건 '가랑비 작전'이 아니라 '머뭇거리기'라고 보는 게 맞다. 본능만을 따라 과하게 들이대는 것은 자제할 필요가 있지만, 그렇다고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있는 대도 그냥 손 놓은 채 모든 걸 운에 맡길 필요는 없잖은가. 언제부턴가 "간절히 바라면 우주가 나서서 도와주겠지요?"라고 묻는 분들이 늘었는데, 난 그렇게 우주까지 나가기 전에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라는 말이 먼저 있다는 걸 잊지 마시란 얘길 해드리고 싶다. 우주가 나서서 도와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Y씨의 사연부터 함께 살펴보자.
1. 스터디에서 만난 이성에게 다가가는 중인데요.
Y씨는 보통의 사람들보다 많이 진지하고 고지식하다. 그래서 나쁘다는 건 아니고, 상대방의 '예의상 한 말'까지도 전부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뒤 대답하는 문제가 있다는 걸 말해주고 싶다.
보통 스터디에서 처음 만난 사람에게 "열심히 준비하시는 모습 보면서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라는 이야기를 한 건, 다른 할 말도 없으니 그냥 한 번 띄워주는 것에 가깝다. 그런데 Y씨는 저걸,
"아 그래 보였나요? 뿌듯하네요. 올해엔 정말…(생략)."
이라며 다큐로 받아버린다.
이건 눈치와 관련된 부분이라 설명하기가 참 애매하긴 한데, 이쪽이 보낸 뭔가에 상대가 리액션을 했다고 해서 그걸 전부 '상대의 진심'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만약 노래를 한 곡 보냈는데 상대가 노래가 좋다며 다음에도 좋은 곡 소개시켜 달라고 하면, 다음에 한 곡 정도 더 보낸 뒤 상대가 그 노래를 정말 듣고 좋아하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그런 과정 없이
'어? 내가 노래 보내주니까 좋아하네? 다른 노래도 소개해 달라고 했지? 외장하드 대방출 해야겠다.'
라며 외장하드에 있는 거 전부 다 보내버리면, 그건 그냥 민폐가 될 수 있다. 상대의
"멋지네요 ㅎㅎㅎ"
"너무 예뻐요."
"재밌네요. ㅎㅎ"
라는 멘트에 혼자 붕 뜨면 곤란하다는 걸 잊지 말자. 상대의 저런 리액션은, Y씨가 아닌 다른 남자가 상대에게 카톡을 보냈더라도 받을 수 있는 리액션이다. 그러니 일단 좀 진정하고, 메일주소 물어봐 뭘 더 보내주거나 자꾸 새로운 주제를 꺼내 대화를 이어가려는 걸 좀 자제하자. 자꾸 그러면, 상대에게 Y씨는 그냥 '잡화점 외판원'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리고 늘 얘기하지만, 상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자. 상대가 '요가' 얘기를 했으면 요가를 오래 배웠는지 정도의 질문으로 이어가면 되고, 재미있게 본 영화 얘기를 하면 그 영화에서 어떤 부분이 인상 깊었는지를 묻는 것으로 이어가면 된다.
단, 그렇게 물었을 때 만약 상대가 뭉뚱그려 대답하면, 그냥 '그 정도의 대답'만을 하고 싶다는 걸로 받아들이는 게 좋다. 이게 절대, 무조건 한 주제로 집요하게 파고 들어가라는 얘기는 아니다. 역시 '눈치'와 관련된 부분이라 뚜렷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기가 어려운데, 상대가 길게 얘기할 때 추임새 정도를 넣는 정도만 하길 권한다. 현재 Y씨는, 상대가 무슨 얘기를 해도 그것과 관련된 자기 얘기를 쏟아내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으니 말이다.
상대가 말 편하게 하라고 하자 그것에 대한 대답도 없이 바로 말을 놓은 것, 그리고 지금까지도 상대는 존대를 하지만 Y씨는 반말을 하는 것 역시 큰 문제라는 얘기를 해주고 싶다. 난, 한 살 차인데 상대가 극존칭을 하고 Y씨는 상대를 꼬마 대하듯 대하는 게, Y씨는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지 궁금하다. 이대로라면, Y씨는 상대에게
- 일주일에 한 번씩 말 걸어 반말로 자기 얘기 늘어놓는 남자.
라는 이미지로 굳어버릴 수 있다. 사실, 이미 어느 정도 진행되어 이제 상대도 단답형의 대답만을 하기 시작한 상황이긴 하다.
"저는 앞으로 단조로움을 막기 위해 지금까지 진행해온 연락이 빈도나 대화소재를 조금씩 변화시킬 예정입니다. 다만, 극적인 관계 변화를 위해 무리수를 둘 생각은 없습니다."
여러 시도를 해보겠다는 실험정신에는 박수를 보내고 싶지만, 만약 Y씨가 그 '조금씩 변화시키는' 와중에 상대로부터 답장이 오지 않는 상황에 처하게 되면 그땐 어쩔 생각인가?
현재 Y씨가 하고 있는 건 '가랑비 작전'이 아니라 '겉핥기 작전'이며, 혼자 자세를 바꿔가며 일주일에 한 번 다양하게 안부를 묻는 건 '일인극'으로 끝날 수 있음을 잊지 말길 바란다. 지금처럼, 면접 보고 왔다는 상대에게 대충 '좋은 결과 있을 것'이라고 한 후 '내가 본 영화'에 대해 말하기만 하면, 머지않아 '답장 없음'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2. 왜 퀸카인 그녀와만 가까워지지 않을까요.
나는 반대로 J군에게 묻고 싶다. J군은 퀸카인 A양 말고 B양이나 C양과 같이 밥도 먹고 여행도 다닐 정도로 친하다고 했는데, 그럼 B양이나 C양과는 왜 사귈 생각을 하지 않는가?
B양과 C양은 알지도 못하는 사이 그녀들에게 의문의 1패를 선물해서 미안하긴 한데, 바로 그 지점이 다른 이성들과 친하게 지내듯 퀸카인 A양과 친하게 지내기 어려운 이유라고 할 수 있다.
"A양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특히 여자애들 사이에서는 A양이 남자들에게 꼬리치고 다닌다는 소문이…."
그런 소문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퀸카들에게는 각종 루머가 따라다니거나, 음해세력이 붙기 마련이다. 나라면, 오히려 그런 루머를 내게 전파하는 B양에 대해, '내 속마음을 말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고 정해둘 것 같다. 남들의 질투심이 만들어낸 헛소문일 가능성이 98.72%이상이니, 누가 뭐라고 하든 직접 겪기 전엔 선입견을 갖지 말길 바란다.
"제가 학교 행사를 구실로 A양에게 말을 걸어본 적 있습니다. 답을 받긴 했으나, 밥 먹었는지 등을 물어보긴 아무래도 뭐해서 그냥 그 대화만 나눴거든요. 그 뒤로는 전혀 아무 진전도 없습니다."
그건, 거기서 끝냈으니 당연히 거기가 끝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J군은 B양과 친해지는 것만큼 A양과 친해질 수 없는 게 고민이라고 했는데, B양에겐 농담도 해가며 나중에 밥 사라고 해서 같이 초밥까지 먹지 않았는가. 그런데 A양과는 철저히 사무적인 이야기만 한 채 대화를 맺어버렸으니, 다음에 이어질 아무 '건수'도 없는 게 당연한 것이다.
"저만 A양을 좋아하는 게 아닙니다. 거의 모든 남자 학우가 A양을 좋아합니다. 학교 행사로 인해 A양이 마트에 장보러 가게 되었는데, 그때 A양과 같이 장보러 가려는 남자가 넘쳐 났습니다. 같이 마트를 다녀온 학우 중에 하나는 그녀에게 완전히 반했다며 고민상담 하다가 학교 전체에 소문이 퍼지기도 했습니다. 저도 혹시 제 마음을 들켜 그렇게 될까봐 다가가는 게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며 좋을까요?"
나라면, 전 세계에 소문이 나도 괜찮으니 우선 A양과 연락부터 하며 지낼 것 같다. 단, 내가 A양과 연락하고 있다는 걸 그 누구에게도 이야기 하지 않을 것이다. 친한 동성친구든 믿을만한 이성친구든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A양과 나'의 창구를 유지해 갈 것이다.
그녀의 작은 행동 하나가 학교 전체에 소문으로 퍼질 정도의 퀸카라면, 그녀는 퀸카 특유의 여유로움과 다정함을 갖고 있을 것이다. 우리끼리니까 하는 얘기지만, 첫 '진입장벽'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 오히려 퀸카들의 경우는 낮다. 멀리서 바라만 볼 때에는 강철로 만들어진 높은 벽을 쌓고 살 것 같지만, 실제로 다가가보면 벽만 높을 뿐 문은 다 열려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열린 문으로 들어가도 바로 거실이 나오는 게 아니라 응접실이 따로 있다는 문제가 있긴 한데, 여하튼 나중 걱정은 나중에 하고 일단 마음이 가는 대로 그녀에게 다가가 보길 권한다. 만에 하나 뭔가가 잘못되어 소문이 나더라도, 그 소문의 유효기간은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J군에게 학교가 전 세계인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졸업하고 나면 그 중 1%의 사람들과도 다시 만나기 힘들 정도로 멀어질 수 있다. 그러니 그깟 소문 무서워 침묵을 지키지 말고, '혹시 이러이러한 거 알아?'라며 대화를 시작해 보길 권한다.
그게 꼭 연애를 위한 구애가 아니라, 상대가 마음 기댈 수 있게 내 마음에 자리 한 켠 마련해주는 거라 생각하며 시작하면 된다. 상대는 자신을 좋아한다는 수많은 이성이 있어도 그 중 편안하게 속마음 털어 놓을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가능성이 높은데, 바로 그 자리로 J군이 들어가는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
오로지 '친해지면 고백 해야겠다'는 일념 하나로만 달려드는 게 아니라면, 분명 어렵지 않게 친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학교를 함께 다녀도 '너와 나' 둘이서 학교를 다니는 기분이 들게 될 수 있고, 희로애락의 감정이 들 때 자연히 서로에게 가장 먼저 털어 놓고 싶어지는 사이까지 발전할 수도 있을 것이다. 행운을 빈다.
난 위의 두 남성대원 모두에게, 조심스러운 것도 좋지만 용기를 가지고 박력있게 다가가는 모습도 필요하다는 얘기를 해주고 싶다. 용기 얘기를 하니, 오래 전 웹에서 본 편의점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한 남자가 세상 무너진 표정으로 편의점에 들어와선, 조심스레 직원에게 묻는다.
"여기…, 용기도 파나요?"
직원은 읽던 책을 덮고는, 잠시 생각하다 대답한다.
"용기는 팔지 않아요. 용기는, 어느 누구의 마음속에나 있습니다."
대답을 들은 남자는 직원의 말에 뭉클했는지 뭔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 다시 입을 연다.
"아니, 락앤락 같은 거요. 플라스틱 용기."
용기는 어느 누구의 마음속에나 있다는 걸 기억하며, 머뭇거림은 이제 그만하고 한 발짝 내딛길 권한다. 이후의 이야기들은 메일로 주시길 부탁드리며, 다들 불금맞을 준비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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