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인관계의 셔터를 오래 내리고 살다 보면, 나가서 누군가를 만나는 일이 14박 15일의 여행준비를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동사무소에 가서 서류를 떼고 우체국에 가서 그 서류를 어딘가로 부치는 일만 하고도
‘하아, 오늘 정말 많은 일을 했어. 바쁜 하루였다.’
할 수 있으며, 동사무소에서 서류 뗄 때 이성인 직원이 내게 지은 표정이 어떤 의미였는지에 대한 망상까지를 하게 될 수 있다. 더는 두고 볼 수 없어 머리하러 간 미용실에서 헤어디자이너와의 짧은 수다가 당장 이쪽에겐 가장 가까우며 강렬한 대인관계이니 거기다 의미부여를 하기도 하고, 오랜만에 친구에게 연락했는데 친구 반응이 뜨뜨미지근하면 홀로 상처를 받곤 ‘역시 얘한테 연락할 필요 없는 거였어’라며 그 친구를 얼마 남지 않은 이쪽의 인맥관리장부에서 지워버리기도 한다.
짝사랑 관련 사연이라고 할 수 있는 C양의 사연을 두고 서두와 같은 이야기를 한 건, C양이 현재 사정상 사실 ‘집순이’라기보다는 ‘지박령’에 가까운 수준으로 집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C양은 준비하고 있는 것에 집중하느라 알고 지내던 사람들에게 소홀해지게 되었고, 이십 대 중반 이후로는 특별히 노력하지 않으면 뉴페이스를 만날 기회도 적어지다 보니 공허함과 외로움을 느끼게 되었다.
그 와중에 등장한 게 ‘과외 오빠’다. 그는 아는 것도 많고, 스펙도 좋으며, 한 주에 한두 번 리드하며 C양을 가르쳐준다. 이건 마치 건조해질 대로 건조해진 낙엽 옆에서 매주 한두 번 캠프파이어를 하는 것과 같아서,
-지금 내 삶에 끼어 들어온 유일한 남성이자, 가장 가까이에서 자주 보게 되는 남성.
인 그 과외 오빠에게 C양은 이런저런 생각할 틈도 없이 불부터 붙을 수 있다.
여기다 내가 하나하나 반박하는 건 내게 너무 고되며 C양에겐 너무 슬픈 일이 될 수 있으니, C양이 말한
-그래도 정말 아주 조금은 과외 오빠가 나에게 약간이나마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걸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부분들.
에 대해선
“응, 아니야.”
라고 뭉뚱그려서 대답하기로 하자. 저런 얘기 말고, “과외 오빠가 절 이성으로는 전혀 안 보는 것 같아서 제 자존감까지 떨어질 것 같아요.”라고 한 C양의 말이 현 상황을 잘 요약한 것이며, 그가 C양을 그저 학생으로 생각하는 건 C양이 심하게 낯가리거나 철벽녀 기질을 발휘해서 그런 게 아니라 C양의 예상대로 그가 다른 사람과 연애 중이기 때문일 확률이 높다.
C양도 머리로는 그걸 알고 있는 까닭에 이 관계에 대해 ‘상대와 잘 될 수 있는 방법’이 아닌 ‘하루종일 상대를 생각하게 되는 마음을 끊는 방법’을 물었는데, 다행히 이제 상대에게 받던 과외가 끝난다고 하니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해결될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매뉴얼을 작성하는 건, 이제 C양도 준비하던 게 거의 완성되어 집 밖으로 나가게 될 텐데, 그럴 때 이성과 친해지는 순서대로 전부 ‘연애 가능성 있는 사람’으로는 생각해 기대부터 하진 말았으면 해서다. 지금 C양에게 과외를 해주는 상대 역시 ‘알고 지내면 좋은 오빠. 내가 뭔갈 하다가 막히면 물어볼 수 있는 오빠’의 카테고리에 넣어두면 좋은 인연이 될 수 있는 건데, C양은 그렇게 되는 관계는 연애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지 말고, 날 존중하며 잘 대해주는 사람은 나도 상대에게 그렇게 대해주면 된다고 생각하며 인맥 카테고리에 넣어두도록 하자.
C양의 대인관계나 사람들과의 인연이, 끝나거나 실패하거나 이제 내리막에 접어든 게 절대 아니다. 전에 한 번 이야기 했듯, 고립된 채 홀로 열심히 준비할 수밖에 없는 뭔가를 하던 사람들은 자신이 잉여인간이 된 듯한 느낌을 한 번쯤 받기 마련이며, SNS를 들여다 보면 남들은 다 행복하게 잘 사는 것 같은데 자신은 방구석 신세를 면치 못하는 것 같아서 도태됐다는 착각을 하게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대인관계의 풀장에서 내가 가장자리를 찾아가 잠시 쉬고 있기 때문이지, 풀장 복판에서 수영하는 사람들처럼 수영을 할 수 없다거나, 이제 영영 복판으로 들어갈 일 없이 가장자리에만 머물러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C양의 경우 이제 막 C양이 준비했던 것에 발을 디디는 상황이니 앞으로 찾아올 기회가 셀 수 없이 많을 것이며, 풀장 복판에서 마음껏 수영할 수 있을 거란 얘기를 해주고 싶다. 그러니 바로 앞에 사람이 보인다고 그 사람만 붙잡고 가려 하지 말고, 서서히 복판으로 헤엄쳐 가본다는 생각으로 나아가 보길 바란다. 자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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