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매뉴얼을 발행하기 시작한 지도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는데, 한 5년 전쯤
“스물일곱입니다. 저는 서른이 되기 전에 결혼할 생각을 가지고 있고, 집에서도 블라블라….”
라는 이야기를 하던 대원이, 올해 서른두 살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며 시간이 많이 지나긴 지났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노멀로그 초기에 진행했던 공개소개팅을 통해 만난 두 분이, 아이 둘 낳고 잘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는 걸 보며 ‘이어줘도 자기들끼리만 소고기 먹고 결혼하고, 다 부질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말입니다.(농담이고, 답장은 못 드렸지만 햄볶으며 사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갑자기 왜 혼자 기억의 문워크를 하고 있냐고 하실지 모르겠는데, 그건 이번 사연의 주인공인 B양이, 3년 5년 훅훅 갈 수 있는 ‘구남친의 늪’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거 질릴 대로 질리면 끝나겠지 하며 어디까지 가나 해보자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길어지기도 합니다. 3년이 마지막인 줄 알았는데 5년 되고, 5년이나 이랬으니 정말 끝인 줄 알았는데 8년까지 악연을 이어가는 사례도 있고 말입니다. 오늘은 지하 1층에서 2층을 향하고 있는, 그런 B양을 좀 끌어올려 볼까 합니다. 자 그럼, 출발.
1.여린 마음과 모성애, 동정심.
여린 마음과 모성애, 그리고 동정심을 기반으로 한 애정의 경우, 실제 상대나 상대와의 관계와는 관계 없이 혼자 의미부여를 할 수 있기에 큰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의 상대는 그냥 무책임하며 대책 없이 사는 사람인 건데, 그런 사람을 아직 운이 따라주지 않아 고통받고 있으며 그래서 더 세상을 삐딱하게 보는 사람인 걸로 설정해 버리는 거라 할까요.
“상대는 가정에서도 이러이러한 대우밖에 못 받았으며, 특히 비교로 인해서….”
상대가 ‘내가 이렇게 된 이유’라며 늘어놓는 핑계만 다 이해하려 하고 있으면 곤란합니다. 상대에게 그런 상처가 있다고 해서, 그가 돈 얼마 벌면 술값으로 다 써버리고, 뭐 하나 진득하게 하지 못한 채 맨날 말만 늘어놓고, 의심과 폭언과 지적질을 해도 다 괜찮은 건 아니잖습니까?
B양과 비슷한 상황에서 사연을 보내는 대원들은 상대를 가엾게 생각하는 특징이 있는데, 상대가 불쌍한 척 약한 모습을 보일 때면 거기에 넘어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걸 전부 조망하는 여기에선 그것까지를 상대가 이용하고 있는 게 확실하게 보입니다.
“전화가 왔더라고요. 자기가 좀 기대고 싶다고. 자기 보러 와주면 안 되냐고.”
그렇게 말하는 상대는, 그러고 나서는 B양을 팽개치곤 다른 사람들과 술 마시러 다니며, 다른 여자에게는 데이트 신청을 하고 데이트 계획까지를 세웁니다. 그걸 경험한 B양은 분노하지만, 다시 또 그가
-다른 사람들과 그러는 건 가짜, 너와의 관계가 진짜. 뭘 해도 공허하며, 너만이 날 채워줄 수 있음.
이란 뉘앙스로 이야기를 하면, ‘집 나간 아들이 방탕한 생활을 하다 궁핍하게 되어 돌아왔을 때 그런 아들을 맞이하는 엄마의 마음’으로 또 맞이해 버리고 맙니다. 상대는 그게 이쪽의 가장 약한 지점인 걸 알고 집요하게 공략해 이용하는 것뿐인데, 이쪽에선 그걸 ‘어쩌면 이번엔 진짜, 정신 차리게 된 것’으로 또 한 번 믿어보려 하고 마는 겁니다.
2. 저도 제가 멍청한 거 알아요. 노답으로 보이시죠?
스스로를 모욕하는 것은 습관이 될 수 있으며, 거기엔 또 그것 나름의 중독성이 있어서 계속하게 될 수 있습니다. 남들이 다 하는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만은 해보려 하는 건 나름 문학적이며, 머리론 엉망이 될 걸 알지만 마음으로는 한 번 더 상대를 포용해 보려 하는 건 드라마틱한 일 아니겠습니까?
바로 그런 까닭에 3년, 5년, 8년 동안 그러고 있는 게 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남들에게 털어놓아 100명이면 100명에게 다 부정적인 평가를 들었는데도 계속하다 보니 이제 더는 어디에 털어놓으며 조언받을 곳도 없고, 잦은 번복으로 인해 이젠 조언자들도 이쪽의 탓인 것처럼 말하니 설상가상인 것처럼 느껴지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남들이 다 떨어져 나가니, 그나마 남은 ‘가장 친밀한 관계’는 엉망진창인 구남친이 되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고 말입니다.
-상대에게서 벗어난다고 해도 난 이미 실패한 거다. 모든 건 망가졌고, 엉망이 되었다. 난 이제 영영 행복해질 수 없게 된 거다.
라는 불안 때문에, 폐허가 된 그 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살다 보면 사실 스물 다섯 이후로는 대부분의 인간관계가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빠져나가듯 빠져나가고, 일부러 노력하지 않으면 새롭게 만나지는 인연들도 적어지는 게 당연한 건데, 그것에서 오는 외로움과 공허함까지를 전부 ‘이 연애가 망가졌기 때문’으로 여기기도 하고 말입니다.
제 KEB하나은행 외화통장을 걸고 말하는데, 그건 상대가 이미 철거하고 떠났다가 심심할 때 신발도 벗지 않고 들어왔다 가버리는 지하에서 이쪽이 올라오지 않고 있으니 그렇게 느껴지는 거지, 망가지거나 끝장난 게 절대 아닙니다. 삼십 대 중반이 되어서야 연애가 이런 것이었냐고, 남들은 이런 연애를 하고 있었던 거냐고 말했다는 어느 대원의 이야기를 제가 소개한 적 있지 않습니까? 그녀도 머리로는 상대와의 관계에 가능성이 없다는 걸 이미 수년 전부터 알고 있었으면서, 코앞에서 상대가 늘어놓는 달달한 말과 헤어지는 건 버려지는 것과 같다는 착각, 그리고 이미 끝난 건데 자신이 끝내면 잘라낸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는 것 같다는 마음 때문에, 막장 지나 막장이 또 있다는 걸 경험하며 오랜 시간을 보내왔던 것입니다.
누가 봐도 현재 가장 불쌍한 건 사연자 본인인데, 그런 와중에도 ‘상대 부모님도 포기한 상대를, 나까지 버릴 수 없다’거나 ‘인생 막 살지 않는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내주고 싶다’, 또는 ‘이제껏 감내하고 만나며 유지했던 게 아까워서’라는 이유로 상대를 불쌍히 여기는 걸 보며 저는 오늘 또 역류성식도염 치료제를 한 알 삼킵니다.
“재회는 바라지 않아요. 그냥, 얘가 저한테 미안해하는 마음, 그 마음을 그냥 딱 한 번만이라도 느껴보고 싶어요. 얘가 정신을 차리고, 저한테 미안하다고 했으면 좋겠어요.”
그걸 바라시는 거라면, B양이 상대의 예상에서 벗어난 사람이 되어야 하며, 상대가 마음대로 어찌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한 첫걸음은 상대의 주문대로 움직이는 인형에서 벗어나는 것이니, 지금처럼 상대에게 걸려오는 전화 한 통에 너무 쉽게 무너지지 말고, 덤덤하게 착신거절을 하든 차단을 하든 해보시길 권합니다.
3. 부모님도 포기한 상대의 위험성.
인생을 대책 없이 막살고 있는 사람이 참 무서운 게, 그들은 공통적으로
-이쪽에 아래에 있으면 짓밟음, 위로 올라가려 하면 끌어내림.
이란 특징을 보인다는 점입니다. 아래에 있을 때 짓밟기만 한다면 그냥 피하는 걸로 해결할 수 있을 텐데, 잘 살고 있으면 어떻게든 자극해 다시 끌어내리려 합니다. 이쪽이 여전히 자신의 영향권 안에 들어 있나 확인하려 마음에도 없는 표현으로 흔들려 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집중하는 모습이 보이면 무릎을 꿇는 액션을 취해서라도 다시 끌어내리려 합니다.
상대의 그런 모습에 대해 몇몇 대원들은
“얘도 우리 관계에 아무 미련이 없는 건 아니잖아요. 아무 미련도 없는 거면, 뭐하러 이 긴 시간 동안 저에게 그러겠어요. 얘도 저처럼, 다시 잘 될 순 없지만 끊을 수도 없는, 그런 마음 때문에 그러는 걸 수 있잖아요. 이런 우린, 뭘 어떻게 해야 결론을 낼 수 있을까요.”
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하는데, 바로 그게 부모님도 포기한, 인생을 대책 없이 막살고 있는 상대와의 관계에서 경험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건 여전히 미련이 남아서가 아니라, 인생을 막산 사람이 쉰이 넘은 나이에 술값이 없다며 노모를 찾아가 돈을 내놓으라고 하는, 그런 것과 비슷하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무섭습니다. 철이 든, 아니 그냥 평범하기라도 한 상대라면 그런 짓도 한 1~2년 하다가 자기도 뭔갈 꾸리고 제대로 살아가려 할 수 있는데, 그게 안 되니 어디 가서 놀 형편도 안 되거나 아무도 안 놀아주면 제일 만만한 이쪽을 찾아오는 일이 계속됩니다. 빈손으로 불러내는 일에 약발이 다하면 이쪽이 혹할만한 호의를 베풀거나 선물을 준비하기도 하고, 그것에 대한 약발이 떨어지면 부모님께 인사시키는 것이나 결혼하겠다는 것으로 흔들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쪽은, 그게 뻔한 수작이라는 걸 수차례 경험하고서도, 모든 게 다 망가지고 끝장난 것 같은 상황에서 유일하게 남은 구원이라 생각해 그걸 붙잡곤 합니다. 동시에 제게
“어쩌면 정말 이제 결말에 다다른 것 같아요. 처음으로 얘가 자기 부모님께 인사를 시켰어요.”
라는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얘기를 들어보면 상대 부모님은 자기 자식 자랑을 하며 이쪽을 팬클럽 정도로 생각하거나, 본인들도 어쩌지 못한 자식을 이쪽에게 바톤터치하는 느낌으로 떠밀려 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결혼하면 정신차릴까 싶어서 진행을 해도 하려 한 거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만남은 아니었던 겁니다.
어쨌든 그런 이슈가 생긴다고 해서 상대가 저절로 변화하거나 둘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은 아니기에, 관계의 한계를 느끼는 건 시간문제이며, 그러고 나선 상대가 “난 인사까지 시켰는데 네가 다 망친 거다.”라며 이쪽을 고문하는 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건 시간이 지날수록 ‘이제 유일하게 남은 거라고는 이 관계 하나’라는 생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저주에 저주가 거듭되는 관계에 꽁꽁 묶인 채 숨까지 쉬기 어려운 상황으로 인도하게 될 수 있는 일이고 말입니다.
이런 관계에 대한 중독성은 마치 도박과 같아서, 전화번호 바꾸게 하고 이사까지 보내도 기어코 어떻게든 상대에게 닿고 마는 사례도 수두룩하게 봤습니다. 그래서 말짱 도루묵을 만들기도 하고, 그러고 나면 앞서 말했던 것처럼 이젠 정말 자신이 답도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며 자책까지 더하곤 하는데, 그건 전철을 밟은 선배 대원들도 대부분 다 그랬던 일이니 너무 무너지진 마셨으면 합니다.
냉철하게 따져가다 보면, 이런 사연들엔
-사실 사귈 때도, 그다지 행복하거나 마냥 좋은 건 전혀 아니었음.
이란 공통점이 있다는 것에 헛웃음이 나오기도 합니다. 제가 손가락 두 마디 만한 가물치 치어를 구할 때의 모습과 같다고 할까요. 그걸 구하기 위해 잡으러도 가보고, 양식장에 전화도 해보고, 건강원까지 가서 수소문도 해봤으며, 그러다 청주에 사는 한 어부에게 분양 받아 택배로 받게 되었는데, 혹시나 이동 중 폐사할까봐 택배사 지역센터에 전화해 분류도 안 끝났다는 걸 알아서 찾아가겠다며 거듭 부탁해 찾아왔던, 그런 일 말입니다. 그렇게 받아와서는 가물치 치어를 어항에 넣어두었는데, 며칠간 사진도 안 찍고 그냥 방치 하다가 가물치 치어는 점프를 해 어항 근처에서 말라 죽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다 해프닝으로 여기며 통달한 듯 말하고 있지만, 오늘 주문한 물건이 안 오면 저는 또 주말에 가야 할 낚시에 차질이 생길 수 있어 택배사 지역센터에 전화를 하거나 택배기사님께 1빠로 배달가시는 곳에서 만나자고 할 수 있습니다. 내 물건이 어디쯤 왔나 계속 새로고침하며 고문을 당할 수도 있고 말입니다. B양에게 그런 순간이 올 때마다 제게 사연을 주셔도 전 몇 번이고 그 늪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말씀드릴 테니, 손을 내밀어 이 로프를 붙잡으셨으면 합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우리가 B양의 흑역사로 웃으며 말할 수 있는 해프닝이 될 게 분명하단 말씀을 드리며, 오늘 매뉴얼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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