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가 연애에 집중하며 데이트와 연락에 성실하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건 아닙니다. 그게, 상대가 자신의 삶도 잘 챙기는 와중에 이쪽에 대한 애정이 커서 ‘아껴주는’ 느낌이라면 축복이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엔 좀 비뚤어진 형태의 도피나 집착일 수 있습니다.
그건 마치 고시생인 아무개 군이, 오늘도 인강을 팽개치고 나가 친구들과 게임을 하고 있듯, 그런 형태의 연애가 지속되는 거라 할 수 있겠습니다. 아무개 군은 입버릇처럼 ‘시간이 없다’고 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활을 보면 남들 쉴 때 같이 다 쉬며 남들이 일 할 때에도 쉬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친구가 당일치기 먼 지역 출장을 간다고 하니 자기도 바람 쐬겠다며 가는 김에 데려가라고 거길 따라가지 않나, 오후에 고등학교 동창들과 술 약속 잡아놓곤 오전에 집중이 안 된다며 먼저 당구 치고 있을 테니 당구장으로 오라고 하질 않나, 하며 말입니다. 뭐 그러다가 어느 순간
“자 그간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다시 다 같이 출발선으로 돌아와 새로 출발하겠습니다. 저 멀리까지 가신 분들 모두 오라고 하세요.”
라고 하는 거라면 좀 그렇게 놀아도 되겠습니다만, 그게 아닌 거라면 나중에 ‘왜 난 금수저를 물고 못 태어났나. 은수저라도.’라는 이야기를 하거나, ‘지금 나도 내 인생이 답답하니 나에게 이렇다 저렇다 하지 마라.’라는 이야기를 하는 일 밖에는 남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같이 게임 하고 건배할 땐 우정이니 친구니 하며 들뜨지만, 친구가 뽑았다는 중형차를 보며 벌어진 격차를 실감하게 될 수도 있고 말입니다.
위에서 말한 아무개 군은 연애를 할 때에도 비슷한 패턴을 보입니다. 그는 여자친구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 여자친구 회사 근처에 있는 PC방에 가서 기다리기도 하는데, 거기엔 여친에 대한 애정도 분명 있긴 하겠습니다만, 대부분의 경우
‘공부해도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도 않고…, 몰라 그냥 오늘도 제끼자. 만나서 밥이나 먹고, 기분 전환하고 들어와야지.’
라며 책을 덮고 나가는 거라 할 수 있겠습니다. 여친이 공부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물어보면 오늘 같이 저녁 먹으려고 일찍 끝냈다고 대충 대답하며 넘어가고, 공부를 피해 연애로 도피한 뒤에는 여친이 늦게까지 자신과 있어주길 바라기도 합니다.
그것에 대해 아무개 군의 여친 역시,
-나에 대한 헌신이자, 연애에 대한 변함없는 성실함.
이라고 받아들이는 까닭에 당장 큰 문제는 생기지 않습니다. 일주일간 평일 내내 봤는데 주말에도 당연히 보려는 남친 때문에 살짝 피곤함을 느끼긴 하지만, 그만큼 날 좋아하고 사랑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점점 문제가 드러나곤 합니다. 직장생활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상대가 ‘회식 같은 거 안 가도 되는데 가고 싶어서 간 거 아니냐. 어쩔 수 없이 간 거라면, 일찍 나오면 되는 거 아니냐.’라는 식의 이야기를 한다든지, 내일 출근해야 해서 이쪽은 자야 하는데 상대는 그게 자신과 더 있고 싶지 않아서라거나 연애에 집중을 덜 해서 그런 거라는 식으로 말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뭐, 이것까지는 그래도 둘이 투닥투닥하며 ‘원래 이렇게 연애하는 건가 보다’ 할 수 있는데, 만날수록 둘의 미래에 대한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학기는 계속 진행되어 이쪽은 수료를 하며 학년이 올라가는데, 상대는 계속 방학의 느낌으로 사는 것과 같다고 할까요. 이십 대 중반이라면 뭐 진로결정 등의 이유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십 대 후반, 심지어 삼십 대 초반이 되어서도 아직 ‘준비 중’인 까닭에 함께 뭔가를 준비하기엔 시간이 촉박해지는 걸 피부로 느끼게 될 수 있습니다. 그간 지켜본 상대는 그다지 열심히 하는 것 같지도 않고, 그냥 기분 내키는 대로 움직이기만 하며, 이쪽은 일도 하고 자기계발도 하느라 퇴근 후에도 몰두하는데 상대는 그걸 가지고도 ‘네가 연애에 더 시간 할애를 하지 않는 게 서운하다’는 식으로만 이야기를 할 뿐이니, 그건 점점 ‘같이 소비적인 연애하며 함께 표류하는 배에 올라타고만 있자는 요구’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당황스러운 건, 저런 상황에서 상대에게 좀 더 분발해야 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면, 상대는 이쪽을 ‘스트레스를 주는 사람’으로 여기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다 내가 알아서 할 건데 왜 자꾸 참견하냐는 식으로 나오거나, 앞으로 내가 진짜 집중하면 우리 만나기도 힘들어지고 연락도 줄어들 수 있는데 그래도 괜찮냐는 식으로 나오기도 합니다. 따지고 보면 이건 뭐 이쪽에서 대단한 걸 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자기 삶을 자기가 좀 책임지고 살아야 할 것 같다는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건데, 그것까지를 상대는 ‘네가 바라는 대로 해주는 것’으로 여기는 당황스러운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전 연애 중인 커플부대원에게, 몇 주나 몇 달에 이룰 수 있는 ‘단기목표’와 꽤 시간 할애를 해야 하는 ‘장기목표’를 만들긴 권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방향을 잡아놓으면 두 사람이 맞는 방향으로 가는 건지, 얼마나 잘 가고 있는 건지가 드러나며, 묻지도 따지지도 않은 채 덮어 놓고 살다가 “그래서 준비는 다 된 거야? 우리 이제 어떡할 건데?”라며 갑작스런 이야기를 하는 걸 막을 수 있으니 말입니다.
더불어 상대의 모습에 위기감을 느낄 땐, 상대 기분 나쁠까봐 그냥 넘어가지 말고, 그 염려를 꺼내놓고 대화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지 않았다간 훗날 상대가 ‘연애하느라 내 생활이 엉망이 된 것 같다’는 괴상한 소리를 할 수 있으며, ‘내가 성공했으면 네가 나에게 이러지 않았겠지’ 하는 이상한 탓을 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상대에겐 잔소리처럼 들려서 잠깐 기분 나쁠 수 있겠지만, 동시에 환기가 되고 자극이 되어 태도를 고칠 수 있으니, 사후약방문 대신 예방주사다 생각하며 말을 꺼내셨으면 합니다. 정작 둘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이런 대화는 못 하고, 매번 허튼소리나 혀 짧은소리만 하는 건 그것대로 또 문제일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염려와 질문에 대한 대답이고, 사실 전 H양에게
-시험이고 집중이고 뭐고를 떠나, 이 연애가 과연 행복하며 H양에게 기쁨이 되는 지점이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둘은 일주일에 꼭 한 번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처럼 매번 싸우며, 상대가 계속 지적하는 건 ‘마음의 크기’인데, 이거 그냥 상대가 바라는 대로 열 일 제쳐두고 관계에만 푹 빠져 있다간 소를 키우는 사람이 없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또, 믿음직스러운 모습을 보여줘야 이쪽도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이며 사람을 좀 겪고 보고 난 후에야 그 사람에 대한 믿음을 지닐 수 있는 건데, 그는 그냥 지금 두 사람이 연인관계니 올인하라는 것처럼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그러다 보니 주 중 한 번은 꼭 다투게 되는 것이고 말입니다.
제 여동생이 이 사연을 제게 털어놓았다면,
-백업이 든든하기에 걱정 없어 대책을 안 세운 것도 아님.
-그렇다고 성실하게 자기 할 몫을 자제력 가지고 하는 것도 아님.
-다툴 때 말하는 태도 보면, 성격도 그닥 좋아 보이지 않음.
-이도 저도 아닌데, 거기다가 헌신적이거나 애정 듬뿍인 모습도 없음.
-어느 면에선, 사랑해서가 아니라 심심해서 그러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함.
라는 이야기를 해가며 ‘이 연애를 굳이 지속해야 하는 이유는?’에 대해 함께 살펴보곤, ‘계속 사귈 거면 날 쏘고 가라’라고 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H양은 제 여동생이 아니니, 매일 마음이 크다느니 작다느니 하며 싸우기보다는 H양이 진짜 하고 있는 그 고민에 대해 털어놓은 뒤 조율해 보시고, 이후 정말 상대가 삶에 바짝 달려들어 사는지를 확인하시며 결정하셨으면 합니다. H양과 비슷한 연애를 하는 대원들은
“그래도 처음엔 그가 정말 잘해줬는데요. 애정뿜뿜하면서 사랑스러워했는데….”
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다시 말하지만 그런 건 내 시간 남아도는 와중에 약간의 애정결핍만 있어도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365일 중 초반 30일 정도만 그런 걸 두고 계속 말하지 마시고, 이후 -신경이 바짝 마르는 것 같은- 335일간 경험한 모습도 상대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며 결정하셨으면 합니다. 함께 놀기만 하는 거 말고 앞으로도 계속 함께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하는데, 그걸 잔소리로만 여기거나 거기에 비아냥거릴 뿐인 상대라면, 굳이 더 안 가봐도 결말이 어떨지는 빤히 보이는 일이니 현명하게 판단하길 바라며. 자,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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