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의 사연에 가득한 물음표와 가정법, 그리고 절망했다가도 다시 희망해보는 그 감정의 널뛰기만 봐도, 김형이 얼마나 많은 생각과 감정들에 휩싸여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로 코앞이 결혼이었으며, 부모님을 비롯한 친구나 지인들 모두 김형이 곧 결혼할 것으로 알고 있었고, 그런 와중에 김형 말대로 ‘둘의 문제’가 아닌 ‘부모님의 반대’ 때문에 헤어진 것이라면
‘그냥, 지금이라도 여친만 날 믿고 따라준다면 다 해결될 것 같은데….’
라는 생각에 잠이 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것 하나만 해결하면 ‘행복한 결혼’이 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다 없던 일이 되며 난 제로에서 다시 시작’을 해야 하는 것처럼 느껴지니 말입니다.
때문에 그 ‘필살기와 같은 한 방’에 대해 묻기 위해 제게 사연을 주신 걸 텐데, 전 사실 김형과 생각이 좀 많이 다릅니다. 김형은 현재 구여친이 된 그녀의 ‘단호하게 바뀌어버린 태도’와 ‘깨어진 채 꽤 흘러버린 시간’들로 인해 점점 현실을 자각하고, 더불어 ‘그녀도 힘들었으며, 어쩔 수 없기에 그랬을 것’이라는 꽤 낭만적인 합리화를 하는 중인데, 전 그것도 그렇게 뭉뚱그려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과연 정리가 되긴 될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 중인 김형을 위해, 새해 첫 매뉴얼을 선물로 드릴까 합니다. ‘내 연애 다른 시각에서 다시 보기’와 함께 ‘다음엔 같은 실수 안 하기’에 대한 이야기,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부모님의 반대로 인해 헤어졌다는 사연엔, 보통
ⓐ부모님이 좀 극성이심. 자식이 삼십 대 꺾였어도 전부 지휘하려 하심.
ⓑ상대가 거의 블랙홀 수준. 중간에서 정리 전혀 못 하며 다 끊어 먹음.
ⓒ대화를 해야 하는데, 그냥 싸움만 함. 무조건 찬성 또는 목숨 걸고 반대.
ⓓ잘 되는 방향으로 이끌질 못함. 이쪽이 해본다고 해도 혼자 결론짓고 이른 포기.
등의 특징이 등장하곤 합니다. 하나만 있어도 힘든 저 특징이 막 두세 개씩 중첩되는 사례도 있는데, 그렇게 복잡한 상황일수록 뭘 어떻게 해결해 보려 하는 것은 ‘그러려는 사람의 신경을 말라 비틀어지게 만드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김형은
“여친과 저의 문제가 아닌, 외부의 문제로 헤어져야 했기에….”
라고 하셨지만, 정확히 따지자면 문제는 내부에도 있고 외부에도 있었다 할 수 있습니다. 김형의 사연엔 저 위에 적어둔 문제가 거의 다 등장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애 중 ‘내부의 문제’가 잘 보이지 않았던 건 김형이 모두 맞춰주었기 때문이며, 연애의 모든 권한이 상대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툼이라기보다는 일방적으로 상대가 화를 내는 방식으로 갈등을 다뤄왔고, 그러다 욱하는 스타일인 상대가 차단을 하면 김형은 기다려야 했으며, 그렇게 상대가 잠수를 타기 시작하면 김형으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지 않았습니까? 상대가 그런 행동을 해도 결국 김형이 다 이해하고 다시 받아주며 혼자 감당하니 여기까지 이어올 수 있었던 거지, 아무 문제가 없다거나 운명적인 관계라서 여기까지 온 건 아니라고 보는 게 맞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듯 김형의 희생과 이해와 배려로 인해 흐릿하던 둘의 문제는, ‘상대 부모님의 반대로 인한 이별 과정’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 과정에서 김형은 자세한 내막을 듣기 어려웠으며, 김형의 생각을 상대에게 전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러다 상대가 화를 내면 김형으로서는 상대 눈치만 보게 되지 않았습니까? 이후 상대가 헤어질 것을 결심하는 것도 상대 마음대로였고, 김형이 대화를 해보려 시도해도 상대가 원치 않으면 연락조차 할 수 없었고 말입니다.
우리끼리니까 하는 얘기지만, 이럴 수 있다는 걸 지금 알게 된 게 정말 천만다행인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파혼’이나 ‘이별’ 정도로 그칠 수 있지만, 덮어두고 덜컥 결혼할 경우 그건 ‘이혼’이나 ‘별거’로 훨씬 더 심각해져 터져 나올 수 있으니 말입니다. 이쪽을 놔두고 집으로 가버리는 건 같이 사는 집에서 나가버리는 모습으로, 화가 나 차단해버리는 것은 이쪽을 투명인간 취급해 버리는 모습으로, 이별로 위협하는 건 이혼하자고 집요하게 요구하는 모습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물론 연애 때 뭘 몰라서, 또는 홧김에 그런 모습을 보이더라도 추후 대화와 설명의 과정을 통해 조율할 수 있긴 합니다만, 김형의 그 연애엔 ‘성공적인 조율’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상대는 끝까지 혼자 결정하며 마음대로 했고, 김형은 그것마저 자신이 감당하겠다고 마음먹거나 시일이 좀 지나 다시 한번 부탁해 보는 일만 겨우 할 수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저 돈 쓰며 맛있는 거 먹고 놀러 다닐 때 좋았던 모습 말고,
-상대에게 닮고 싶을 정도로 존경스러운 모습이 있었는지?
-상대의 현명함이나 지혜로움을 볼 수 있는 모습이 있었는지?
-상대가 날 위해 이런 것까지 해주거나 생각해줬다는 걸 느낀 부분이 있었는지?
등도 꼭 함께 고려해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그런 게 없다면 그저 ‘적령기에 연애 중이니까 뭐, 결혼까지….’라는 생각으로 결혼을 진행하게 될 수 있는데, 그런 결혼을 한 대원들은 십중팔구 결혼 후에야 둘의 관계와 상대라는 사람에 대한 생각을 뒤늦게 해보게 됩니다. 그러다 앞으로 평생 더 버틸 자신이 없어 하거나, 늦은 조율을 시도하며 매일매일을 전쟁하는 느낌으로 살게 되기도 하고 말입니다.
이 매뉴얼을 저는,
-여친에게 다 맡기고 있을 게 아니라 김형도 적극적으로 나섰어야 했음.
-극단적인 방법을 택해 갈등을 키우는 여친을 어떻게든 막았어야 했음.
-여친이 화낼 것 같다고 침묵만 할 게 아니라 ‘되는 방향’으로 이끌었어야 했음.
이라는 김형의 문제들도 부각하며 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건 이렇게 작게만 적어두고 저 위에서 다른 긴 이야기를 한 건, 애초에 기반 자체가 모래였기에 언제라도 무너질 수 있는 위험이 있었다는 얘기가 훨씬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결혼이 모든 것을 보장해주며 ‘결혼하면 싸움 끝’인 거면, 저도 당장 가서 무릎이라도 꿇어보라고 권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김형이 그 연애를 경험하며 보아왔던 것들은 이후 어떤 미래가 펼쳐질 수 있는지에 대한 부정적인 예고편이었으며, 마지막에 상대가 보인 모습까지를 전부 상대의 모습인 거라 생각하면, 상대 역시 결코 김형에게 좋은 사람은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김형은
‘나이도 이 정도면 많은 거고, 결혼까지 생각했으면 연애의 거의 끝장까지 도달한 건데, 여기서 어떻게든 결혼으로만 이을 수 있으면 되는 거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실 수 있는데, 김형보다 나이도 훨씬 많으며 이미 결혼도 한참 전에 한 분들의 사연도 저는 무수히 받고 있습니다. 결혼 전 ‘그래도 결혼만 하면 뭐 어떻게든 바뀌어서…’라고 생각했지만, 결혼 후 ‘결혼 전의 문제들은 애들 장난이었구나….’라는 걸 깨닫게 된 분들의 사례까지 다 취합해서 드리는 말씀이니, 어쩌면 결혼을 할 수도 있었다는 코앞의 일만 보며 아쉬워하지 마시고, 길게 멀리까지 보며 다시 한번 여유를 가지고 찬찬히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그러고 나면 이게, 그저 예스맨을 하며 막다른 골목까지 가다가, ‘내가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 맞게 가고 있었던 건지?’에 대한 답을 구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는 것을 발견하실 거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오늘은 여기까지.
▼ 이 매뉴얼은 김형에게 해당되는 이야깁니다. '부모님 반대'라고 해서 다 적용하진 마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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