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양과 상대 사이에서 벌어진 일의 근본적인 원인은
-상대에겐 원래 사귈 생각이 1도 없었음. K양이 옆구리 찔러서 사귀게 된 것이며, 사귀게 된 후에도 상대에겐 별 마음이 없긴 마찬가지.
이기 때문인 건데, 그 부분에 대해선 대충 확인한 듯 안 한 듯 넘어가고, 그 외의 부분에서 원인을 찾으니 뭐가 잘 안 보이는 겁니다. K양이 졸라서 연인이라는 간판을 억지로 건 사이니 상대는 귀찮아하고, 무책임하고, 무관심한 모습을 보였던 건데, 이 부분에 대해
“알겠어요. 시작이 좀 잘못됐다는 건 저도 인정해요. 근데 제가 궁금한 건, 어쨌든 사귀게 되었는데 사귄 후에 그가 왜 그렇게 변해갔냐는 거예요.”
라고 하시면, 우린 ‘진짜 이유’는 놔두고 ‘그럴듯해 보이는 이유’를 밤새 찾아봐야 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그는 그냥 아는 오빠동생 정도가 딱 좋다고 생각했던 건데, 이쪽이 옆구리 찔러 억지로 사귀게 된 거라서’라고 해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마음이 없었으면 안 사귀면 되는 거였잖아요? 그러면 되는 걸, 왜 억지로든 뭐든 사귀어 놓고는, 그랬던 거죠?”
그러니까 그게, 사귄다는 것에 별로 무게나 의미를 두지 않는 사람이나 경우가 꽤 있습니다. K양처럼 연인이라는 간판이 걸렸으면 매일 출퇴근하고 열정을 쏟아부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넷플릭스 한 달 이내에 해지하면 무료니 일단 등록하듯 해보는 사람이 있고, 오는 거 안 막고 가는 거 안 잡는 타입이니 애써 거절하거나 자르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보통 ‘상대가 왜 그랬는지’에 대한 답은 ‘상대의 마지막 모습’을 통해 잘 알 수 있는 법인데, K양의 상대는 헤어지자는 얘기도 K양이 알아서 하게 만들며, ‘마음이 없어서 그만 사귀고 싶다’는 이야기도 다른 핑계로 빙빙 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 상대의 모습만 봐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견적이 딱 나오는 법인데, 이 부분에서도 K양은 ‘현실의 상대’가 아닌 ‘내가 생각하는 상대라는 사람’을 대상으로 두고 답을 찾으려 하니 답이 보이질 않는 거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요기까지를 일단 요약하자면, 상대라는 사람도 참 별로였고, 사귈 생각이나 이쪽에 대한 관심도 없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누가 백화점 상품권 준다고 하면 당장 뭐 살 게 없어도 일단 받아두듯 K양이 사귀자고 삼고초려를 하니 거절하지 않은 거였고, 딱 그 정도의 마음으로 ‘오는 사람 안 막는다’ 하는 상대이다 보니 간판만 걸어 놓고는 태업에 들어간 것에 가깝습니다. 그 와중에 K양은 ‘이해하고 맞춰가야 하는 건가?’ 하며 혼란스러워했던 거고, 참다가 대화라도 해보자 하고 말을 꺼내면 상대는 거기에 정색했던 것이고 말입니다.
“그럼 제가 이 연애로부터 배울 건 없는 건가요? 그냥 상대도 잘못 골랐고, 시작도 이상했고, 사귀면서 저 혼자 노력하니 힘들었던 거고 그런 거라 생각하면 되나요? 다음 연애에선 사람 잘 골라 첫 단추 잘 끼우면 될까요?”
그럴 경우 문제의 60%가 해결되긴 할 텐데, 나머지 40%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K양이 아주 보통의 무난한 남자와 연애를 해도 삐걱거림을 만들 수 있는 지점은 아래와 같습니다.
-상대에게 보여주는 모습과 속마음이 많이 다름.
-큰 건 당황스럽게도 그냥 넘어가면서, 사소한 부분에서 확 빈정상해 함.
-상대를 시험에 들게 하거나 ‘어떻게 하는지 보겠어’ 하며 관찰함.
-부정적인 결론을 지어 놓고는 ‘말이나 들어보자’의 마음으로 대화함.
K양이 보낸 신청서를 보면 K양은 지적이며 사람의 마음이나 행동이 어떤 프로세서로 움직이는지를 잘 아는데, 첨부된 카톡대화를 보면 무슨 대학 새내기가 같은 과 오빠에게 칭찬을 바라며 말을 꺼내듯 대화를 합니다. K양 본래의 모습이나 실제 생각을 말해주기보다는, 귀엽고 활기찬 걸 연기하는 느낌이랄까요. 그게 어느 취미나 관심사 모임 하단을 받치고 있을 때에는 잘 묻어갈 수 있는 캐릭터가 될 수 있겠지만, 연애에서까지 그런 모습만 보이면 그냥 계속 어리게 보거나 살짝 얕잡아 볼 수 있다는 걸 기억해두셨으면 합니다.
제대로 연애하겠다며 너무 힘준 채 임하거나, 시작부터 노오오오력을 하려 애쓸 필요는 없습니다. 이해나 배려 같은 것도 서로에 대해 뭘 좀 알 수 있게 교류도 하고 얘기도 하던 중 필요할 때 하는 거지, 너무 앞서서 해버리거나 지나치면 ‘연애를 위한 연애’를 하는 모습이 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아 뭐야 집에 들어갔으면서 얘기도 안 해줬어 ㅠㅠ 아직 밖인 줄 알고 걱정했잖아. ㅠㅠ” 정도로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는 걸, ‘어떻게 하나 보자’ 하며 일부러 꾹 참고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다가, 다음 날 다 이해한다는 식으로 대수롭지 않은 척 넘어가며 마음에 분노를 적립해 두지 말았으면 합니다.
얼마 전 저는 장례식에 다녀왔는데, 거기서 마지막 날 밤을 샐 때 다른 문상객들이 새벽 세 시까지 떠들어 스트레스를 좀 받았습니다. 아직 어린 듯한 그 문상객들은 술도 좀 취한 채 로비에서 열심히 떠들었는데, 남에게 싫은 소리 잘 못 하는 저는 ‘한 마디 할까 말까’를 한참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중 소파에 와서 막 자리를 잡은 다른 문상객이 그들에게 ‘여기 어르신들 주무시니 조용히 좀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고, 그 말 한마디로 소란은 쉽고 간단하게 해결됐습니다. 제가 장례식장에서 혼자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것이나 K양이 연애하며 혼자 분노만 축적하고 있던 것이나 둘 다 쉽게 갈 수 있는 걸 어렵게 가는 거라 할 수 있으니, ‘참을 만큼 참았어. 내가 이렇게 말했는데 저기서 싸우자고 나오면, 그땐 진짜….’ 할 때까지 화를 증폭시키며 기를 모으지 마시고, 처음 나를 불편하거나 힘들게 만드는 자극이 왔을 때 바로 반응하며 ‘해결하는 방향’으로 말을 꺼내보셨으면 합니다. 여린 마음이라 속으로 생각하는 게 더 익숙하다는 건 저도 알지만, 너무 그렇게만 살면 투박한 사람들 사이에서 상처받을 일이 많아만 진다는 말씀을 드리며,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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