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연을 몇 가지 버전으로 쓰다가, 너무 구구절절 이야기가 길어지는 것 같아 짧게 정리하기로 했다. 짧게 정리하는 게 H군이 보기에도 편할 테니, 짧고 굵게 짚어보도록 하자.
첫 번째로 말해주고 싶은 건,
-꺼낸 얘기에 책임을 안 지면, 호의도 빛을 잃으며 상대에겐 우유부단하게 보일 뿐이다.
라는 것이다. 오늘 저녁에 만나자고 말을 꺼내 상대도 오케이 했으면 그다음에 이어져야 할 얘기는 ‘몇 시에 어디서 볼까’인 거지, ‘오늘 만나는 거 괜찮아?’가 아니다. 만약 오늘 만나기로 했었지만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겼을 때는 사정에 대해 상대에게 양해를 구하고 약속을 미루든가 해야지, 그런 속사정을 숨긴 채
“오늘 좀 그러면 다음에 봐도 되고. 아냐 만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어떤지 물어보는 거야. 오늘 보는 거 괜찮아? 난 오늘 봐도 괜찮고 다음에 봐도 괜찮아.”
라는 이야기를 하며 대화만 질질 끌어선 안 된다.
어떤 대원들은 자신이 감당하지도 못할 걸 미리 상대에게 선심 쓰듯 공약해 놓고는, 그것에 책임을 져야 할 순간이 오자 ‘그럴 상황이 안 되는데 어쩌냐’는 식으로 나오기도 한다. 그들 중엔 종종
“일부러 그런 것 아님. 여유로우면 진짜 제주도 같이 가려고 했음. 그런데 지금 갑자기 바빠짐. 그래서 못 가는 거고 난 경비도 내가 거의 다 부담하려 했던 건데, 그거 못 가게 되었다고 지금 나에게 화내는 게 좀 당황스러움. 난 좋은 마음으로, 진짜 여행 데려가 주려고 그랬던 건데?”
라는 식으로 스스로를 변호하는 대원들도 있는데, 난 생색내려고 질러 놓은 공약은 그것 자체로 의미나 가치가 있는 게 아니라는 얘기를 해주고 싶다. 늘 말만 앞서 요란하지, 내뱉은 말은 이후 거두기만 할 뿐 책임을 안 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 대한 신용은 필연적으로 점점 낮아지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니 ‘좋은 의도로 그랬다가 상황이 안 되어 못 한 건데, 상대는 왜 여기에 화내는지 모르겠다’라며 셀프 합리화만 하지 말고, 그걸 경험한 상대의 기분은 어떨지도 꼭 생각해 봤으면 한다.
두 번째로 말해주고 싶은 건,
-같은 말이라도,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오만 정이 다 떨어질 수 있다.
라는 것이다. 이건 사실 ‘연애의 기술’과 관련이 있다기 보다는 그냥 아주 기본적인 ‘말하는 방법’에 대한 거라 할 수 있는데, 생일축하를 사양하는 여친에게
“그래도 내가 남자친구인데 생일 축하는 해줘야지. 그리고 내 생일에 네가 축하해준 것도 있고 하니까.”
라고 말하는 건, 어느 모로 보나 좀 별로이며 상대로 하여금
‘얜 나랑 사귀는 걸,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거래 같은 걸로 생각하나?’
라는 생각까지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멘트라 할 수 있겠다.
그냥 “보고 싶으니까 당연히 만나서 봐야지!”라고 해도 되는 걸 H군은 “나도 오늘 쉬는 날이니까.(볼 수 있다)”라고 말하고 말던데, 이런 게 문제가 되는 이유에 대해선 솔직히 내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설명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래에서 이야기 할 문제와 이 문제는 이어져 있으니, 이건 여기까지 하고 다른 문제를 더 보자.
세 번째로 말해주고 싶은 건,
-애정표현만 증폭시킨 연애 역할극을 하면, 현실로 안 느껴질 수 있다.
라는 것이다. 내 지인 중 하나는 취했을 때만 ‘친구, 브로, 우정, 의리’ 뭐 그러면서 건배하며 기분 내놓고는 술 깼을 때 생색내거나 심술을 부리곤 하는데, 그래서 그 친구의 말을 믿는 다른 친구들은 없으며 그에 대해
‘지가 그러고 싶을 때만 그럴 뿐, 아닐 땐 남보다 못한 녀석.’
이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상대에게 H군의 모습이, 내 지인의 그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는 얘기를 난 해주고 싶다. ‘자기가 그러고 싶을 때만 그러는 일관성 없는 모습’에 대한 얘긴데, H군은 바로 위에서 얘기한 것처럼 논리적이고 이성적이게 ‘팩트’만을 말할 때가 있는 반면, 아직 뭐 그렇게 친하지도 않고 오랫동안 정든 것도 아닌데 사랑에 푹 빠진 사랑꾼인 것처럼 표현을 할 때도 있다.
더불어 상대가 한 말을 기억 못 하는 것, 그것도 둘이 의논해서 결론까지 낸 걸 두고 다시 한번 ‘이건 어떻게 할까?’라고 묻는 건, 상대의 마음을 차게 식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도 기억해 뒀으면 한다. 그럴경우 상대는
‘얘는 나랑 대화할 때 집중하긴 하나? 어떻게 그러기로 한 걸 잊을 수 있지? 내가 하는 얘기를 귀 기울여 듣긴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으니, 예쁘다, 귀엽다, 사랑스럽다, 보고 싶다 같은 표현에 들이는 공의 절반을, 상대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잘 기억하는 것에 사용하길 바란다.
끝으로 하나 더 해주고픈 말은,
-그저 상대의 불평을 당장 잠재우기 위해 일단 뭐든 다 해주겠단 얘기를 마구 뱉을 게 아니라, 이해와 설득을 위한 노력과 이쪽의 상황을 충분히 설명하는 것도 필요하다.
라는 것이다. 상대가 불만을 품거나 화가 난 것처럼 보이면 그 위기에서 벗어나려 맹목적으로 사과를 하고, 그러면서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무리한 공약까지를 자꾸 하다 보면, 상대의 기대치는 기대치 대로 높아질뿐더러 이쪽은 책임지지도 못할 약속까지 해버린 까닭에 스스로도 지칠 수 있다. 곤란한 부분이 있으면 곤란하다고 말한 뒤 상대가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양해를 구해가며 설득시켜야지, 대충 눈치 봐서 넘어갈 것 같으면 어물쩍 넘어가려 하거나 그러다 갈등이 생길 기미가 보이면 ‘아! 아냐아냐! 너 하고 싶은 거니까 같이 하자!’ 라는 태도만 보이면, 해주고도 상대의 기분만 상하게 할 수 있으며 이쪽의 말과 행동에 진정성이란 게 없다는 인상만 심어줄 수 있다.
H군은 이런 일이 발생하는 이유에 대해 ‘내가 관계에서의 우위를 점하지 못해서’라고 생각하는 것 같던데, 이건 그것보다는 H군이 속으로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생각을 하면서 겉으로는 상대가 원하는 대로 다 맞춰주는 듯한 모습만 보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악순환이라고 보는 게 맞다. 그렇게 겉으로 ‘상대가 원하는 사람’을 연기하려 하면 H군도 힘들뿐더러 그런 모습이 아닌 순간에 대해 상대는 모두 실망할 수 있으니, 예쁘게 연애하려 노력하기보다는 진짜 H군의 생각과 상황과 속마음을 공유하며 만나봤으면 한다. 자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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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1등!
답글
2등이다!!
답글
3등!
답글
4등!
답글
5등
답글
잘 보고 갑니다.
답글
H군이 마음과는 다르게 연기하기 하기때문에 상대와도 딱 그만큼의 관계밖에 안되는겁니다.
답글
무한님 말 틀린거 진짜 1도없음
본인 스스로가 진짜 진국이되세요
맹탕이 진국 따라해봐야 항상 뽀록남
답글
애정표현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상황과 동떨어진 애정표현이 오히려 마음을 멀어지게 할 수도 있단 생각 해보게 되네요
답글
말만 거창하게 해놓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신뢰받지 못하는 게 당연합니다.
답글
남자는 안된다고 하면 쪼잔하고 계산적으로 보일까봐 우선 공수표를 남발하고 속으로 꿍한 경우가 있는 것 같아요. 해줄 수 없는 부분은 양해를 구하고 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 진심을 적절하게 표현하는 법을 연습해보셔요..
답글
말을 먼저 하는 것의 단점도 있군요~
답글
오늘도 잘 보고 갑니당
답글
그냥 상대방을 별로 안 좋아해서 그런거에요
사랑이아니고 그냥.. 외로움이건 성적욕구던 뭐던간에
그래서 여자를 만나면 저렇게 하게 됩니다.
답글
스티븐 호킹이 쓴 ‘유혹하는 글쓰기’라는 책을 읽었는데 그 첫 페이지에 “솔직함이 최선이다”라는 구절이 있더라구요.글을 쓰는 데에만 적용되는 말은 아닌 것 같아요!
답글
아무래도 사연자분은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과 사귀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외로워서 사귀시는 게 아닌지...? 그렇지 않고서는 같이 의논해서 합의한 문제를 다시 묻는 일이 과연 있을 수 있을까요?
제 절친 중 한 명이 그래요. 의도는 '선의'인 걸 분명히 알겠는데도 말투가 너무 지적질하는 말투여서(지적질이 의도하는 바가 아닌 걸 오래 지켜본 사람들은 다 압니다), 결국 이 절친과 거리를 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의도가 무엇이든 실제 마음이 무엇이든 사람들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영향받고 상처받고 그렇게 되는 것이겠죠.
답글
와!! 전남친이랑 비슷한 유형의 사람이네요.ㅠㅠ
속마음은 그게 아니면서 겉으로는 넌괜찮겠어? 아니 나는 괜찮은데~ 식의 말을 하고
'너가 보고싶으면 뭐 만나러 오겠지~' '너가 하고싶으면 나랑같이 하겠지~' 이런식의 말을 자주하던 사람이었어요.
그냥 보고싶다! 만나고싶어! 라고 간단하게만 말해도 마음은 배로 느껴지는데 말이죠.
나중에는 그냥 지치더라구요. 진짜 좋아서 만나는가 의문도 들고,,,
대화법만 바꿔도 훨씬 서로가 행복한 연애를 할 수 있어요. 내 마음을 숨긴채 상대를 떠보는식의 대화는 서로의 관계를 더욱 망칠 뿐이란걸 알았으면 좋겠어요.
답글
이런 사람 많은가봐요......내 주위에도 한명 있어요
답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