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윤씨가 그녀에게, 완전히 속아 넘어간 것 같습니다. 그녀는 그냥 예쁘게 대답하며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려 했던 건데, 상윤씨는 그녀가 딱 그 정도로 단순하며 그게 그녀 모습의 전부라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ㅋㅋㅋㅋㅋ 아 너무 웃겨.”
라고 말은 했어도, 실제로는 별로 웃기지 않으며 저거 말고는 해 줄 리액션이 없어서 저럴 수 있는 건데, 상윤씨는
‘내 드립이 통했나보네 ㅎㅎ 완전 성공적! 담에 또 해야지!’
라고 착각한 거라 할까요.
바람직한 건 아닙니다만 제 경우는 상대가 자신의 10% 정도만 제게 드러내 보여주며 그것과 다른 나머지 90%의 속마음을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하는데(어쩌면 제가 여린마음동호회 회장인 게 이것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상윤씨는 저와 반대인 것 같습니다. 상윤씨는 상대가 보여주는 게 90%이며 나머지 10%는 속마음이라 생각하는 것 같고, 그것마저도 그 10%는 ‘연약함, 겁 많음, 힘들어함’ 들이 주를 이루고 있는 거라 여기는 것 같습니다.
상윤씨는 이별의 원인을
-그녀가 시험 준비와 연애를 병행하기 벅차했기 때문.
이라고 생각하며, 때문에 지금은 붙잡고 싶은 마음을 참고 묵묵히 응원하는 마음으로 있다가 시험이 끝난 후 ‘가볍고 밝게’ 손을 내밀면 잡힐 거라 여기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기다리는 중에 이쪽에서 해야 할 연락이나 이후 ‘가볍고 밝게’ 다가갈 때의 멘트 등을 도움받고 싶어 하시는 것 같은데, 무슨 말을 어떻게 하든 그녀는 상윤씨를 거절할 것이라는 것에 전 제 카카오뱅크 통장을 걸 수 있습니다.
그건, 그녀가 상윤씨를 밀어낸 게 ‘응원을 잘 못 해줘서’라거나 ‘좋아한다는 표현을 많이 안 해서’가 아니라, ‘특별한 한 사람으로서의 매력이 느껴질 정도로 와닿는 게 없어서’ 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상윤씨는 제게
“전 좋은 말 많이 해주려 노력하고, 연락 성실히 하려 노력하고, 갈등을 만들지 않으려고도 애썼으며, 최대한 챙겨주려 노력했거든요. 근데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한 사람으로서의 매력이 느껴질 정도로 와닿는 게 없어서일 거라 하시니, 뭘 얼마나 더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라고 하실 수도 있는데, 오히려 전 상윤씨의 그 ‘애써서 잘해주려 꾸몄던 모습’이 ‘특별한 한 사람으로서의 매력’을 묻어버렸다고 생각합니다. 글에 비유하자면, 상윤씨가 보여줬던 모습들은 ‘수필’이나 ‘후기’가 아니라 ‘신문기사’나 ‘교과서’의 느낌이었던 거라 할 수 있겠습니다.
문제를 해결하고자 함께 살펴보는 거니 이런 표현을 쓰는 걸 양해해 주신다면, 전 상윤씨가 ‘뻔한 남자’에 속하는 거라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계속 사귄다면,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무슨 얘기를 하고 어떻게 반응할지가 빤히 다 보입니다. 내일은 또 ‘아침을 여는 글귀 한 줄’ 같은 걸 보내며 파이팅 해줄 것 같고, 회식이 있으면
“나 이제 회식가요오~ 자기는? 퇴근 잘 했오? 보고파요 ㅎㅎ”
라는 멘트를 보낼 것 같습니다. 상대가 고민을 말하면
“헐헐 그랬오? 우리자기 마음 아팠겠네~”
정도로 반응할 것 같으며, 아무튼 이걸 옮겨 적는 것도 참 재미없을 정도로 그냥 애교 섞은 일상보고 하고 기계적인 애정표현을 할 것 같은 느낌이 강합니다. 그렇게 친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한 10년 만에 연락이 닿아 반가운 친구에게, 웃으면서 좋은 얘기 해주고 칭찬해주는 것 같은 일이, 두 달 동안 변함없이 일어나는 느낌이랄까요.
어쩌면 상윤씨는 또 제게
“그건, 그녀가 먼저 ‘했오~’ 같은 말을 해서 저도 따라한 건데요? 그리고 제가 그렇게 말했을 때 그녀 반응이 나쁘지 않았는데, 실제로는 그게 아니라니 혼란스럽네요.”
라고 할 수 있는데, 그래서 이걸 전
-그냥 둘 다 귀여운 척하며 이십 대 초반의 첫 연애하듯 하다가, 질리고 만 연애.
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상윤씨가 사연신청서를 쓰기 위해 본인이 전체를 조망하며 했던 생각, 상대에 대한 분석, 상황에 대한 해석 등을, 제게 말할 때 썼던 말투를 사용해 상대와도 어느 정도 공유를 했어야 합니다. 그래야 상윤씨도 어른스러운 생각을 할 수 있으며, 마냥 오오 헤헤 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고, 원래 혀짧은 소리로 단순보고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상대도 알 수 있는 겁니다. 상윤씨가 그걸 못 하는 사람이 아닌데, ‘착한 남친’을 연기 하려다 1차원적인 모습만 보여주고 만 게 저는 좀 안타깝습니다.
상윤씨가 제게 부탁한 ‘가볍고 밝게’의 멘트나 연락빈도 같은 걸 말하기 어려운 이유를, 그리고 그걸 우리가 고민해 봐야 손톱만큼도 효과가 없을 것임을 이제 좀 알 것 같지 않으십니까? 지금까지 제가 한 이야기를 들은 후 두 사람의 마지막 대화를 보면 상윤씨도 제가 느꼈던 충격과 공포를 느끼게 되실 거라 전 생각합니다. 이별통보하는 상대에게
“그럼 친구할까.”
“흥흥.”
“나빠 나 차다니.”
정도의 반응을 보였던 부분, 그리고 예의 있게 만나서 얘기해달라며 생각 정리되면 만나자고 요구하는 부분 말입니다.
상윤씨는 노멀로그에 있는 많은 글들을 읽으셨다고 하는데, 그 글의 대부분은 ‘수험생인 상대’에 대한 글이지 않습니까? 때문에 그걸 보고 내린 결론은
-고시라는 게 강박을 가지게 하기에 상대가 그런 것.
-이별의 아픔보다 불합격의 아픔이 더 클 수 있기에 그런 것.
-그게 해결되면 고민이 없어질 테니, 당당히 유혹(응?)하면 되는 것.
인 것이고 말입니다. 동시에 자신에 대해 살펴봐야 할 부분에 대해서는 ‘헤어질 때 친구로 남자는 식의 대시는 한 번 했으니 그걸로 된 것’ 정도로 간단히 결론을 내버리시고 말던데, 지금이라도 ‘상대’에게 초점을 두던 것에서 벗어나 ‘상대가 봤을 나’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그러면 무슨 말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실 테니 말입니다. 더불어 ‘그녀가 날 찼다’는 것에만 너무 꽂힌 까닭에 ‘그녀가 마지막이라며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놓치지 말길 바라며,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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