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읽으며 그 내용을 가장 파악하기 힘든 사연이, ‘왜, 어떻게’가 없는 사연입니다.
-여행 가서도 남친이 제게 실망해 싸웠어요.
-제가 말실수를 한 이후로 남친이 냉랭하게 대했어요.
-만나서 풀고 예전처럼 지냈는데, 남친 태도가 미묘하게 변했어요.
왜 싸웠는지, 어떤 말실수를 한 건지, 어떻게 변한 건지 등이 없는 저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마치 ‘폰이 안 돼요.’ 라는 얘기를 듣는 기분이 듭니다. 폰이 안 된다는 말만으로는 화면이 안 나온다는 건지, 전원이 안 들어온다는 건지, 인터넷 연결이 안 된다는 건지, 터치가 안 된다는 건지, 배터리는 바꿔 끼워 보았는지 등을 전혀 알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때문에 해줄 수 있는 말이라고는 ‘침수를 당했거나 떨어뜨렸나요?’나 ‘어떻게 안 되는 건가요?’, 또는 ‘전원 껐다가 켜보세요.’ 밖에 없는 것이고 말입니다.
Y양이 주신 사연 역시 설명이 그냥 막연하게만 되어 있기에,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방법은?’ 이라는 그 질문에 답을 하기가 참 난감합니다. 막연한 질문에 막연한 대답을 하자면 ‘그럼 다시 잘 해보세요.’ 정도가 될 텐데, 어제 삼겹살 맛있게 구워 먹고 생긴 에너지를 이런 의미 없는 문답에 쓰는 건 서로에게 낭비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Y양의 질문에 대해선, 연애 중 보인 Y양 태도의 문제와 함께, ‘결혼 약속까지 한 사이라고 해도 주의해야 할 점들’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해 볼까 합니다.
연애고 결혼이고를 떠나, 친구나 지인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은 결국 연인 관계에서도 분명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사소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늘 늦는 지각의 문제.
-자꾸 지적하고 화내는 문제.
-화가 나면 폭언을 하는 문제.
-극단적으로 이별을 자꾸 말하는 문제.
-한쪽만 일방적으로 돈을 쓰는 문제.
등은, 철판을 굽폈다 폈다 반복할 때처럼 그 피로가 축적되어 아예 관계를 두 동강 낼 수 있는 것들입니다. 처음에 별문제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 건 ‘점점 좋아지겠지’ 하는 기대와 당장은 마냥 좋은 큰 애정 덕분인 거지, 상대가 ‘그래도 되는 사람’이어서 그런 건 절대 아니며 전부 다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이어서 그런 것 역시 아닙니다.
Y양의 사연엔 여기다 옮겨 적지 말라고 한 이야기들 외에
“남친이 항상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하면서 저에게 기회를 많이 줬어요.”
“남친이 제게 확신을 가지고 결혼 얘기를 한 후, 저는 마음을 놓아버린 것 같아요.”
라는 부분들이 나오는데, 이런 지점들을 종합해 보면
-‘다시 안 그러겠다’고 말은 했지만, 바뀌지 않는 부분이 많았음.
-여러 번 헤어져도 결국 또 만나왔으니, 다툼이나 이별에 별로 긴장하지 않음.
-결혼하기로 했으니 다 된 거라 생각해, 관계에 그다지 공을 들이지 않음.
라는 부분들이 이 연애를 피폐하게 만들고 만 것 같습니다. 상대가 진심으로 불편함과 불공평함을 느껴 이쪽에게 호소하는 것들도 ‘잔소리’로 듣고 만다거나, 어차피 결혼하기로 한 거니 연애에 공들이는 건 접어두고 ‘결혼 후 편한 생활’ 같은 것만을 바라고 있다거나 하면서 말입니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결혼의 문 앞에서 갈라서는 커플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결혼을 약속하긴 했지만 그걸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한쪽이 손을 놓고 있어 다른 한쪽을 지치게 한다든지, 결혼까지 약속했으니 헤어질 일 없다 생각해 그냥 짜증 부리고 있는 본성 그대로 행동하다 인간적인 실망을 안긴다든지, 결혼 후 이쪽에게 손톱만큼의 피해도 오지 않게 하려 상대를 들볶고 약속을 받아내려 하다 결국 결혼에 회의적으로 만들고 마는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상대가
‘이런 식이라면, 결혼해서 사는 건 거의 수감생활일 것 같다. 나에게 행복이나 즐거움이 되는 건 전혀 없고, 전부 고쳐야 하거나 의무적으로 해야 할 일들만 늘어나는 것 같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때, 결혼 약속까지를 포함한 관계 전체에 대한 포기를 하는 거라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런 갈등은, 연애하다 그냥 싸우고 토라진 채 연락 안 하고 있다가, 며칠 후에 화해의 제스쳐를 보이며 다시 만나왔던 것처럼 해결되긴 힘듭니다. 대부분 ‘홧김에’가 원인인 연애시절 이별 수준이 아니라, 둘이 함께하는 미래에 대한 잿빛 전망이 그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Y양은 제게
“남친은 돌아올까요? 연락을 기다리면 연락할까요? 남친과 다시 대화를 나누게 되었을 때, 제가 뭐라고 해야 남친을 다시 잡을 수 있을까요?”
라고 질문하셨는데, 지금은 예전처럼 그냥 수동적으로 있던 것에서 벗어나 Y양의 솔직한 심정과 둘의 연애를 돌아보며 느낀 것들을 말해야 할 때입니다. Y양은 상대와 꽤 오래 사귄 까닭에 ‘말 안 해도 남친이 날 잘 아니, 내 마음을 다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지금 Y양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건 상대의 결정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며, 사과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고, 그건 자칫하면 끝까지 혼자 자존심만 세우고 있는 걸로 보여질 수 있는 위험한 일입니다.
더불어 Y양은
-굳이 문제가 되었던 부분에 대해 쑥스럽게 얘기하며 사과하기보다는, 그냥 다시 웃고 떠들며 아무 일 없었던 듯이 지내면 되는 것. 그게 다 풀렸다는 증거.
라고 생각하는 타입인데, 이건 그렇게 덮어두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절대 아닙니다. 그간 서로 잘 안다고 생각해서 칭찬도 제대로 안 하고, 사과도 제대로 안 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꼭 떠올려 보시길 바라며, Y양이 상대의 동반자가 되기 충분히 적합한 사람이며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야 할 때라는 걸 잊지 마셨으면 합니다. 제게 말한 반성과 후회의 말들 절반만 남친에게 전달해도 이건 해결될 수 있는 일이니, 서로의 부재에 너무 익숙해지기 전에 얼른 다시 연락하셨으면 합니다. 자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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