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양이 보낸 사연엔 매뉴얼 일주일 치 분량의 이야기들이 담겨 있기에,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말해야할지 모르겠다. 믿기 어렵겠지만, 저 제목을 고르는 것에만 삼십 분이 넘게 걸렸다.
H양의 이기적인 태도, 남친의 가난, 영혼 없는 대화, 직장인과 학생이라는 신분, 잦은 이별통보, 갑을관계, 짜증, 부모님, 동물욕, 숫자욕, 자기 학대, 집착, 현실성 없는 반성, 위로의 부재, 의지, 가면놀이…. 이 수많은 문제들을 다 다룰 순 없고, 그 중 문제들을 야기하는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출발해 보자.
1. 택배기사 붙잡고 영국 총선 얘기하기.
내가 마주하는 사람 중, 아무래도 택배기사님이 제일 바쁘신 듯 보여서 예로든 것임을 먼저 밝힌다. 우리 동네에 오는 택배기사 중에는 초인종을 누른 후, 안에서 대답을 하면 "택배요."하고는 내가 문을 열기 전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져 버리는 분들이 있다. 난 그분들이 삶의 최전방에서, '시간이 금'이라는 얘기를 몸소 보여주고 계신다고 생각하기에 예로 들었다.
그런 택배기사에게 "잠시만요."하며 말을 걸어, 얼마 전 영국 총선에서 보수당이 승리한 것에 대해 얘기를 나누자고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물론 그 중에는 노동당 경제공약을 날카롭게 비판했던 프리티 파텔 하원이 새 내각에 기용될 것으로 보인다는 전망을 하시는 분도 있겠지만, 대개는 뭐 이런 놈이 다 있냐는 표정으로 엘리베이터 '닫힘' 버튼을 빠르게 누르실 것이다.
H양은 남친에게 정치 이야기를 한 것을 두고
"미래를 함께 할 사람이랑 이런 저런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거 아닌 가요? 사회를 보는 입장이 어떤지도 중요하다고 생각해 물어본 건데, 남친은 짜증을 냈습니다."
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것도 어느 정도 둘의 상황과 환경이 비슷할 때 가능한 거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H양이 졸업 후 독립해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 학교 다닐 땐 부모님이 학비에 용돈까지 지원해주셨지만, 이젠 전부 H양이 부담해야 한다. 거기다 더해 부모님의 사이가 나빠지셔서 이혼 얘기까지 오고가는 상황이다. 또 그 와중에 H양의 동생은 완치 가능성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 병으로 인해 병원에 입원해 있다. 이런 와중에서 남친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 H양도
'쟤는 참 세상 사는 거 걱정할 것 없이 배부른 얘기들을 꺼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난 H양에게, '사회를 보는 입장'이 어떤지를 아는 것도 분명 중요하겠지만, 그것보다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아는 게 더 중요한 거란 얘기를 해주고 싶다. 이건 말을 안 한 H양의 남친이 더 문제이긴 하지만, 둘이 연인임에도 불구하고 남친이 이사 간 것도 H양이 몰랐다는 게 난 좀 이해하기 어렵다. 둘은 하루 이틀 사귄 것도 아닌데 서로의 가족들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둘 중 누군가의 부모님이 병원에 입원하셔도 빨리 나으시길 바란다는 이야기만을 할 뿐이었다. 이런 와중에 '사회를 보는 입장'에 대해 심도 깊은 대화를 하면 둘의 사이가 더 돈독해 지는 것일까? 속은 새카맣게 타들어가고 있는데?
H양에겐 미안하지만, 난 H양이 이별 후 남친에게 보냈다는 편지 역시 남친에겐
'뜬구름 잡는 사랑타령'
으로 느껴졌을 거라 생각한다. '기댈 수 있는 사람', '소중한 사람', '이런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 고마운 사람', 뭐 이런 거 다 좋고 아름다운 말이긴 한데, 이사 갔다는 것도 모른 채 사귀고 있는 관계에서 저런 이야기만을 하는 건, 현실에 발 딛지 않은 채 그저 연애를 꾸미고 장식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2. 다른 세상 사람?
위의 주제와 이어지는 내용이다. H양의 말을 보자.
"남친은 제게서 자신과 환경적으로 차이가 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저까지 그 무리에 편입시켜 '다른 세상 사람'으로 생각한 듯합니다."
실제로 둘은 '다른 세상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미당은 <무등을 보며>에서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노래하기도 했지만, 실제로 낡아 해진 옷을 입고 몇 달쯤 살다보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낡아 해진 옷을 입고 사는 것으로 인해 관점이 달라지고, 태도가 달라지고, 삶의 방식이 달라질 수 있다. 외부의 별다른 자극 없이 집에 앉아 누더기를 입고 산을 바라볼 때에야 독야청청한 마음이 들 수 있겠지만, 대문 밖을 나서는 순간부터 주변의 시선, 지인들의 평가, 새로 만난 사람들의 속닥거림 등을 통해 약간의 우울증과 대인기피 증상이 생길 수 있다. 강철 멘탈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면, 구멍 난 양말만 신고 나가도 신발 벗고 들어가는 식당 앞에서 망설이게 되지 않는가.
H양의 남자친구가
"너와 함께하는 미래가 안 그려진다."
"내 사정을 잘 아는 친구와 이야기 했는데, 그 친구도 헤어지는 게 맞는 거란 얘기를 한다."
라는 이야기를 한 건, H양이 가진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그가 둘의 관점, 태도, 삶의 방식에서의 차이를 극복하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H양은
"제가 아끼는 사람 중에 돈 때문에 힘든 사람은 남친이 처음이었거든요."
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이래서 이걸 설명하기가 좀 어렵다. 직장생활을 안 해 본 친구가,
"너 휴가 쓸 수 있는 거 남아 있다며. 밥도 못 먹을 정도로 바쁘면, 이럴 때 휴가 좀 쓴다고 해버려. 어차피 쓸 수 있는 휴가 남았는데 뭐가 걱정이야? 그리고 회식도 참석만 했다가 잠깐 빠져버려. 참석하면 된 거지 뭐하러 계속 따라가? 약속 있다고 하고 나와 버려. 상사라고 해도 그 사람 역시 너랑 같은 직원일 뿐인데, 뭐하러 눈치를 봐?"
하는 걸 보고 있는 느낌이랄까. 언젠가 TV에서 국회의원이 분장을 하고 마트에서 직업체험을 하는 프로그램을 본 적 있는데, 그 의원은 마트에서 몇 시간 일하곤
"제가 쇼핑을 해본 적도 없기 때문에…, 말하자면 고객도 안 돼봤던 거예요."
"이런 곳이 있을 줄 상상을 못 해봤죠."
등의 이야기를 했다. 또 널리 알려진 대로, 몇 년 전 어떤 의원은 "요즘 버스비, 70원쯤 하나요?"라는 발언을 한 적도 있지 않은가. H양은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왔고, 또 아직 사회생활을 시작하기 전이라 직장인이 어떤 생활을 하는지 몰랐다. 때문에 남친에게 이해하기 힘들다는 불만을 표시하거나, 남친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 '비교'의 이야기들을 직간접적으로 꺼내놓기도 했다. 그런 말들을 하는 H양이, 남친에겐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되는 거 아니냐."라는 이야기를 하는 마리 앙투아네트 처럼 보이진 않았을까?
3. 엄한 곳에서 발휘되는 똑똑함.
위의 글들을 읽으며 '왜 제목에 헛똑똑이가 들어간 거지? 안 똑똑한 것 같은데?'라는 의문을 가지신 독자 분들이 있을 텐데, H양은 똑똑하다. 다만 문제는 그 똑똑함이 상대에 대한 비판을 할 때, 그리고 자기변호를 할 때에만 발휘된다는 점이다.
"화가 가라앉으면 연락하자고? ㅋㅋㅋ 장난하냐? 좀 그럴싸한 변명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건 그냥 알아서 삭히고 오라는 거냐? 너만 불행하고 힘든 코스프레는 집어 치우고 정리 좀 확실히 해. 잘못은 지가 다 저질러 놓고 나중엔 불쌍한 척. 가여운 척. 소름 돋는다."
전부 다 적으면 너무 신상이 드러나는 까닭에 일부만 옮겨 적은 건데, H양은 저런 식으로 현재의 상황과 상대의 허물을 날카롭게 지적해 할 말이 없게 만든다. 나 역시 둘의 이전 대화들을 읽으며 남친이 맹목적으로 사과를 하고 자꾸 대화를 유예만 하려는 태도에 좀 답답했는데, H양은 그걸 놓치지 않고 짚어냈다.
그런데 문제는, 평소엔 H양이 전혀 저런 생각하고 있다는 걸 내색하지 않으며, 쌓아 두다가 폭발할 땐 동물욕(강아지), 숫자욕(10+8) 등을 섞어 한다는 것이다. 더불어 관계를 박살낼 생각이 아니라면 상대가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은 만들어 줘야 하는 건데, H양은 뒷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상대를 궁지로 몬다.
[평소의 대화]
남친 - 이렇게 늦게 끝날 줄 몰랐어. 미안해.
H양 - 아냐 ㅋ 나중에 같이 가면 되지.
남친 - 미안해 진짜로….
H양 - 아냐 갠춘 ㅋㅋㅋ
[폭발할 때]
"*발놈아 바쁘면 연락으로라도 성의를 보여야 하는 거 아니니? 여기서 말하는 성의는 일어났다 뭐한다 이게 아니야 *신아. 그리고 그게 다 우리를 위해 하는 거라고? ㅋㅋㅋ 내가 니 마누라냐? 지금이 중요하지 나중이 중요하냐? **끼야 마음 떴으면…."
[폭발 후 상대가 사과할 때]
H양 - 노력이라도 해봤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남친 - 왜 안 했다고 생각하지?
H양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남친 - ….
H양 - 지나가는 개가 웃겠다.
사실 둘은 저때 헤어졌어야 하는 게 맞다. 하지만 연인 간 싸움이라는 게 부부싸움처럼 칼로 물 베기 같아서,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긍정적인 감정들을 털어 놓으며 다시 만났다. 단, 저 때 들었던 충격적인 말, 그리고 상대의 진짜 속마음을 들여다보게 된 것 같은 충격은 마음속에 고스란히 축적되었다. 나 역시 충격적이었던 건, 남친 부모님이 어떤 병을 앓고 계신데 H양이 홧김에 그것을 비유해서 말했다는 거다. 예컨대 남친 어머니께서 우울증을 앓고 계시며 정신과를 다니신다 하면, H양은 싸우다
"내가 너 때문에 정신과 좀 가야겠다. 너랑 대화하다 정신병 걸리겠어."
라는 이야기를 했다는 거다. 이게 H양도 생각지 않게 한 실수라면, 아무리 싸움 중이라도 얼른 사과하고 본의 아니라는 걸 밝혔어야 하는데, H양은 남친이 "아무리 화나도 그런 얘기는 하지 말자."라고 말려도 그냥 무시해 버렸다.
그런데 H양은 위와 같은 일들을 벌인 뒤, 자기변호를 하며 본인 행동을 합리화 시켜 상대를 설득하는 일을 잘 한다. 때문에 남친은 뭔가 억울하고 찝찝하지만 다시 한 번 H양을 믿어보게 되는 것이다. H양은 상황에 따라 때로는 가여운 모습을 보여주고, 또 때로는 '진짜 속마음'을 이제야 털어 놓는 것처럼 감동을 만들어 내고, 또 때로는 남친이 몰랐던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려주며 그의 마음을 돌린다. 분명 똑똑하다. 하지만 다시 만나 봐도 비슷한 갈등이 찾아오는 게 반복되고, 또 재회할 때의 말들과 달리 축적된 행동은 정 반대의 의미를 증명했기에, 남친은 양치기 소년에게 몇 번 속은 마을사람처럼 아예 마음을 닫아버리고 말았다.
이별 이후 벌어진 더욱 끔찍한 일들에 대해서는 적지 않도록 하겠다. 위에서 이야기 한 것들만 가지고도 이 관계엔 희망이 없다는 걸 충분히 설명할 수 있으니 말이다. 현재 H양은 이걸 '남친 취업 후 갈등을 겪은 커플이 헤어진 사례'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은데, 난 H양의 사연이 그 사례들과는 3% 밖에 겹치지 않는다는 얘기를 해주고 싶다. 똑같이 폰에 전원이 들어오지 않아도 배터리가 다 되어 그런 것과 침수되어 그런 것은 상황이 전혀 다른 것 아닌가.
우리가 그만큼 사랑하던 사이니까 다시 한 번 기회를 달라는, 그 사랑타령을 일단 내려놔야 한다. 둘은 사랑하지 않아서 헤어진 게 아니라 가까이 할수록 서로의 가시 때문에 상처를 입기에 헤어진 거다. "난 여기서 네가 힘들 때 기대서 쉴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따위의 이야기를 열심히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또 말로는 욕심과 이기심 때문에 붙잡지 않을 거라고 말하고 너를 존중하겠다고 말하지만, 행동으로는 남친 찾아가서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하며 상대가 얘기해도 무시한 채 이쪽의 욕심만 내세우면, 당연히 신뢰하기 어려운 것 아닌가.
재회하면 바뀐 모습 보여주겠다는 말만 하지 말고, 지금부터 상대의 말 한 마디도 내 말 한 마디와 같은 무게를 가진다고 생각하며, 상대의 결정을 존중하자. 어느 땐 상대를 회유했다, 또 어느 땐 저주했다 하며 이쪽의 욕심만을 들이미는 건, 이기적인 태도의 연장이며, 상대를 더욱 질색하게 만드는 일이 될 뿐이다.
더불어 재회를 하면 어떤 모습일지도 한 번 생각해 보길 바란다. 당장은 H양에게 재회가 가장 절실한 목적이니 물불 가리지 않고 매달리고 있지만, 여기서 보자면 둘은 다시 만나도 똑같은 갈등을 겪을 가능성이 높으며 여전히 답이 없는 관계일 수 있다. 헤어지기 직전의 관계를 늘려 H양이 참으며 1년, 2년 더 만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있을까? 난 H양이 연애 초기의 모습만을 떠올리며 맹목적으로 재회를 요청하진 않았으면 한다. 다시 만난다고 해서 연애 초기로 돌아가는 게 아니다. 중반 이후로는 H양도 괴롭지 않았는가. 다시 만나기만 하면 다 해결될 것 같은 재회의 환상에 속지 말고, 좀 더 냉정하게 H양의 연애를 관망해 보길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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