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를 보다가 흥미를 느낀 까닭에 글 쓸 생각을 안하고 지난 방송들을 다시 보느라 매뉴얼을 발행하지 못했다. 비슷한 루트로 진행되는 방송을 보며, 이야기의 초반엔 '아오 빡쳐! 저걸 그냥!'이라며 아드레날린을 마구 분비해 댔고, 전문가가 나와 "이것은 아이의 잘못이 아닙니다. 블라블라."이런 말과 함께 여러가지 요법을 통해 아이를 컨트롤 하면, 조금전까지 망나니 같던 녀석도 순한 양이 되는 모습이 인상깊었다.
노멀로그에 인용되는 여러 사연들에 대해 "저건 정상적인 대화가 아니라 골빈 것들의 대화가 아니냐."라거나 "상대방을 배려하고 이해해야 한다는 거 누가 모르냐."같은 댓글을 주시는 분들이 있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그게 바로 우리 모습이고 알면서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들이다.
아무런 실수 없이 상대 여자사람을 빵빵 터트렸다는 분은, 알고보면 상대의 말을 아무렇게나 잘라 먹으며 자신이 주목받는 일에만 매진했고, 신중하게 경청했다는 분은 둘의 대화가 아니라 방청객처럼 고개만 끄덕거리다 돌아오는 실수를 저질렀다. 남자의 돈만 보고 연애를 하는 여자사람을 두고 쓰레기 같다고 표현해 주신분의 메일엔, 결국 상대 여자사람의 외모를 보고 반했는데 방법이 없겠냐는 얘기가 담겨있었다.
뭐, 이렇게 아무리 얘길해 봐야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생각은 변하지 않을테니 접어두자. 다만, 크게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그녀에게 내 이미지는 좋지 않은지, 비싼 선물까지 줬는데 화를 풀지 않는지, 이건 진짜 아무 일도 아닌 것 같은데 며칠씩 연락을 하지 않는지, 오늘은 <우리 그녀가 달라졌어요>를 찍는 마음으로 매뉴얼을 시작해보자.
진짜 알아서 하는 거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그 끝이 흐지부지되거나 마무리를 짓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더 나누고 싶지 않은 대화가 나왔을 때,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무심코 던지는 일이 많다. 연애 초기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함께한 시간이 길어지며 슬슬 고개를 든다. 어느 상황에서 사용되며, 어떻게 작용을 하는지 살펴보자.
남자 : 여섯시간만 자고 일어날 수 있어. 금방 들어갈거야.
여자 : 너 전에도 그렇게 말하고 결국 지각했잖아. 그리고...
남자 : 알았어. 내가 알아서 할게.
여자 : 응. 얼른 마시고 들어가.
(다음 날)
여자 : 출근 잘 한거야? 아침에 문자하니까 답이 없길래...
남자 : 지금 가고 있어. 내가 이따 전화할게.
여자 : 아직 출근 전이야? 것 봐. 내가 어제 일찍...
남자 : 알았어. 암튼. 이따 전화할게. 끊어.
연애기간은 증명된 두 사람이 만나서 단순히 '우리 커플입니다.'하는 게 아니고, 서로가 서로에게 증명해가는 기간이라고 생각한다. 다 알아서 한다고 해 놓고 매번 제대로 하는 일이 없다면 상대의 잔소리가 늘어나는 것은 뻔하고, 이쪽에선 너무 간섭받는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전화, 한다고 했으면 하자. 남자친구의 전화한다는 말에 기다리다 망부석 된 여자사람들이 우리나라 편의점 숫자보다 많다. 남자들끼리는 "어, 그래 연락할게."라는 말이 "어, 그래 수고해라."정도로 쓰이지만, 여자는 전혀 다르게 받아들인다.
만나면 늘 피곤하다거나 졸리다는 얘기를 하는 남자친구 때문에 사귀어도 사귀는 게 아니고, 살아도 사는 게 아니라는 여자대원의 메일을 그만 받고 싶다. 종합비타민에 오메가3라도 챙겨 먹이라는 것 말고 무슨 말을 더 해줄 수 있겠는가.
대한민국에서 성인 남자사람으로 사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걸 안다. 학업을 마치고 군대까지 다녀오니, 설명서도 없는 제품이 배달된 것 처럼 '너도 이제 성인입니다.'라고 하는데 당혹스럽지 않을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회사에 들어가면 가르쳐주기보다는 갈구려고 하는 살쾡이들도 있고, 허리띠 졸라매고 적금을 부어봐도 내집 마련 할 수 있을지 고민되며, 원만한 사회생활을 위해선 술자리에도 빠지지 말아야 하고, 로또도 사보고 펀드나 주식도 해 보지만 꽝, 다음기회를 기약하라는 얘기, 운이 좋아도 비룡반점 A세트 시킬 정도의 수익일 뿐이니 피곤하다는 말, 이해가 간다.
그러나 그게 어디 남자들만 그렇겠는가. 사회에 첫발을 내 딛었더니 커피부터 타오라고 하고, 지연언니는 미영이 뒷담화를 하는데, 미영이는 지연언니 뒷담화를 하고, 지연언니랑 미영이 둘만 있게 되면 자기 뒷담화를 하는 직장에서 승진을 꿈꾸기 보다는 숫자 틀리지 않도록 더 신경을 써야 하는, 게다가 놀 거 다 놀던 미희는 과거생활 청산하고 시집가서 피부관리 받으러 다닌다는데, 자신은 카드값 청구서나 받으며 네일아트 샵을 그림의 떡처럼 쳐다보는 여자사람도 있지 않겠는가.
자신도 피곤한데 남자친구를 만나면 이 녀석은 혼자 세상의 피곤 다 짊어진 듯 졸리다는 말만 입에 달고 산다면, 세상 살 맛 나겠는가. (아래에 계속)
(위에서 이어) 그래서 미희 얘기 잠깐 꺼내, 코도 완전 확 티나고 무슨 보톡스는 그리 맞아대는지 시집가서 이상하게 변하는 것 같다고 했더니 남자친구는 "넌 왜 친한친구 흉을 그렇게 보냐."라며 여자사람 맘 모르고 혼내기나 하고, 애써 칭찬하려고 혜진이네 커플은 홍콩이나 싱가폴을 무슨 국내 여행지 다니듯 다니며, 남자친구가 끔찍하게 위해주는 것 같다는 얘길 했더니,
"그럼 너도 그런 남자 만나."
이 부근에서 여자사람은 이전 여자사람들의 기분을 표절하는 것이다.
"외톨이야♪ 외톨이야♪ 빠리바리바게트♬"
그렇다고 마냥 남자의 잘못이란 애긴 아니다. 남자 역시, 그렇게 못해주는 것에 대해 미안하면서도 뭔가 찝찝하고, 게다가 그 혜진이 남친이라는 녀석에 대한 짜증과 비교당하는 것에 대한 분노, 우주 멀리 아주 멀리 납치될 줄 알았지만 결국 후레시맨이 아닌 일반어른이 된 것에 대한 트라우마등이 한데 섞여 울퉁불퉁한 말을 꺼내는 당신도 이해한다. 나도 당신과 소주 한 잔 마시며 롤링 발칸을 쏘고 싶은 기분이다.
그래도 우리에겐 화장실에서 초코파이를 몰래 먹었던 시절이 있으니 너무 슬퍼하거나 노여워 하지 말자. 고참에게 걸리지 않으려 바스락 소리도 내지 않으며, 발자국 소리만 들려도 얼른 관등성명 댈 준비를 하며 침을 더 분비해 입속의 초코파이를 녹이던 그 전우애. 사나이로 태어나면 할 일이 많다는 군가도 있으니, 여자친구가 누군가와 날 비교하면 말해주자.
"내가 널 훨씬 더 행복하게 해 줄거야. 해외여행? 당장 여권 만들어. 내일 출국해 버릴라니까."
물론, 진짜로 여자친구가 여권을 만들어오면 발열, 오한, 두통, 기침, 인후통, 콧물, 호흡곤란의 증상을 좀 보여야 한다. (신종플루 증상이다.) 농담이고, 다른 남자랑 비교한 여자친구에게 으르렁 거리기 보다는 더 행복하게 해 줄 거니까 잠시만 기다리라고 말해보자. 그게 당신의 진심 아닌가.
속마음을 말하고 싶은데, 그건 잘 안되고, 대화는 계속 이상한 방향으로 엇나가고, 감정은 격해지고, 그러다보면 이런 말 꼭 나온다.
"나 원래 이래. 왜? 몰랐어?"
비슷한 말로, "니가 나에 대해서 뭘 알아?"라는 말이나. "그래서? 어쩌라고?"같은 얘기들이 있다. 헤어지고 싶어서 그러는 거라면 확실히 효과가 있는 말들이다. 반전 없는 영화가 재미 없다는 것에는 나도 어느정도 동의하지만, 연애나 인간관계의 반전은 그닥 유쾌한 일이 아니다. 날이 잘 선 도끼로 상대의 발등을 힘차게 내리찍으면 상대는 어떻게 될까?
이런 상황을 겪으면 이승기의 노래처럼 <내 여자라니까>로 시작해서 <결혼해 줄래>까지 갔다가 결국 <우리 헤어지자>에 도달하게 된다. 사과를 통해 그 날카로운 말을 지울 수는 있겠지만, 쓰고 지우는 것이 자유로운 화이트보드에도 고친 글씨는 더욱 선명하게 눈에 띄는 법이다. 또한, 계속 그 고친 글씨에만 마음이 머문다면 다음 글씨를 쓸 때에도 망설이거나 실수할 위험이 크다.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은 하지 말자.
위의 일들로 인해 갈등이 생겼을 때, 선물을 하거나 평소 잘 하지 않았던 애정표현으로 둘의 갈등이 잠시 사그라들 수는 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임시방편으로 마련한 그런 행위는 진통제가 될 순 있어도 치료를 하진 못한다. 둘 사이에 작은 덜컹거림만 찾아와도 다시 갈등의 얼굴을 보게 될 것이고 남자의 입장에서 비명처럼 내뱉을 수 있는 말은 딱 하나다.
"나더러 더 뭘 어쩌라고?"
이런 이야기로 연애의 마지막을 장식한 커플이 많았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위의 이야기 같은 건 하지 않는다는 걸,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을 알 거라 생각한다. 진짜 마음이 변하거나 다른 사정이 생긴 사람들은 대부분 말도 없이 가 버리거나, 대충 여지를 남겨두고 급하게 관계를 마무리 하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왜 이별에 합의해야 했을까.
언젠가 EBS에서 보았던 짧은 영상이 있다. 호랑이와 황소가 사랑한 이야기 였는데, 호랑이가 황소를 생각하며 계속 고기를 가져다주고, 황소는 호랑이를 생각해서 계속 풀을 뜯어다 줬다. 가장 즐겨먹을 수 있는 거니, 상대도 기뻐할 거라 생각하며 말이다. 얼마간은 애써 참으며 버텼지만, 결국 둘은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별할 수 밖에 없었다.
뜬금없이 왜 갑자기 호랑이와 황소 얘기를 하냐고 물을지 모르지만, 요즘 힘든 일이 너무 많다는 여자친구에게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 질 테니, 어서 자라고 말하는 어느 남자를 보며, 여자친구는 그 힘든 일을 해결하거나 잊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남자친구와 대화하며 공유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적었다. (물론, 힘든 일이 생기면 동굴로 들어가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 남자의 입장에선 이해하기 힘든 일일 것이다.)
복잡하게 얽힌 여러가지 일들을 다 떼어내고 '나'와 '너', '우리'를 명확하게 바라보자. 나의 모난 부분이 사랑하는 상대를 아프게 하고 있는데, 상대가 더 다가오지 않거나 아프다는 얘길 한다며 답답함만 호소하지 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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