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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아들에게 미리 하는 부탁

by 무한 2010. 9. 30.




아들아!

아, 미안하다. 생각해 보니까 딸일 수도 있겠다. 그저 "딸아!"보다는 "아들아!"라고 하는 편이 개인적으로 더 자연스럽기에 이렇게 부르는 거니, 훗날 딸인 네가 읽게 되더라도 악감정은 가지지 말길 바란다.

그러니까,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입장이며 속도위반을 한 것도 아닌 상황에서 이런 글을 남기는 것이 좀 의아할 수도 있겠지만, 아빠는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네 생각을 한다는 걸 알려두고 싶구나. 너는 지금 어느 곡식이거나 바람이거나, 비를 내리고 천둥을 치는 어느 에너지거나, 뭐, 아무튼 어떠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깊게 들어가면 골치 아파지니, 생명탄생의 비밀 같은 건 알아서 찾아보도록 해라.

아빠는 너를 키우기 전 다른 것들을 키워보며 예행연습을 하고 있단다. 경기도 근방의 하천에서 잡아온 민물고기들은 모두 요단강을 건넜고, 장수풍뎅이와 사슴벌레들은 하늘로 갔단다. 그리고 부화의 부푼 꿈을 꾸며 품었던 유정란은 두 달째 부화가 되지 않아 너희 할머니가 음식물쓰레기 봉투에 넣었단다. 이런, 절망적인 얘기를 해서 미안하구나. 기분을 상하게 하려 한 건 아닌데, 미안하다. 아빠가 이런 부분엔 눈치도 없고 소질도 없구나.

너와 미리 대화를 할 수 있다면, 세상에 태어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건지, 태어나고 싶다면 생일은 몇 월이 좋다고 생각하는지, 이름은 뭐라고 짓는 편이 적당한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그럴 방법이 없어서 안타깝단다. 아빠가 엄마와 상의한 후 최대한 좋은 방향으로 결정하마. 학창시절 방학 중에 생일을 맞으면 친구들에게 선물을 받는데 애로사항이 생기니, 7~8월과 12~2월은 리스트에서 삭제하고,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시즌도 피하는 등의 그런 일말이다. 3월도 학기 초반이라, 친구 녀석들과 아직 친해지지 않아 대충 넘어갈 위험이 있으니 5월 후반쯤이 어떤가 싶다. 어디보자, 10개월이니까, 그럼 아빠는 7월에...(응?)

농담이고,

아빠는 별자리가 천칭자리인 까닭에 다정하게 이야기 하거나 사랑을 표현하는 일에 서툴단다. 그게 별자리와 무슨 상관있냐고 할 지 모르지만, 아빠도 왜 이런 일에 서툰지 이유를 알 수 없기에 그냥 아무거나 갖다 붙인 거니 이해해 주길 바란다. 아무튼 아빠의 이런 특색으로 인해서 넌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라는 물음에 "둘 다 좋아."라는 대답을 해 놓고, 뒤에서는 "사실, 엄마가 더 좋지."라는 이야기를 할까봐 아빤 벌써부터 불안하단다. 아빠는 네가 물어볼 것에 대비해 별자리 이름을 외우고, 꽃 이름을 외우고, 곤충과 물고기 이름 등도 외우고, 가물가물한 국사와 세계사 등을 공부하고 있단다. 이런 노력을 감안해서라도 엄마만 좋아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아빠도 좋아해주길 부탁하마. 아빠는 네가 명절날 친척들에게 받은 돈에도 절대 손대지 않을 것을 미리 약속한다.

시간이 지나면 잊을 수도 있는 이야기들을 앞으로 종종 이렇게 편지로 미리 적어둘 생각이란다. 살다보면 그 이야기들은 침묵으로 변하거나, 달력과 함께 뜯겨 나가거나, 서로 다 알거라 생각해 생략하거나,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들에 치여 결국 마음에만 남아있을 수 있으니 말이다.

할아버지와 아빠의 관계가 그랬단다.

네가 아빠에게 말하지 못하는 비밀이 있는 것처럼 아빠도 할아버지에게 그랬고, 할아버지 역시 아빠에게 그랬단다. 함께 집에 있을 때에도 아빠는 아빠의 방에서, 할아버지는 안방에서,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을 하며 서로 각자의 시간을 보냈단다. 아빤 할아버지와 함께 자동차를 타고 갈 때에도, 알맹이가 없는 근황이나, 친구 누구는 어떻다거나 하는 쓸데없는 얘기만 했단다. 네가 저녁시간 웹이나 일기장에 적어 넣는 것보다 훨씬 가볍고, 진심에서 먼 얘기들 말이다.

할아버지의 실수들을 증거로 마음속에서 할아버지에게 유죄판결을 내리기도 했단다. 사실, 이런 과정은 너에게도 찾아오리라고 생각한다. 어렸을 적 항상 '최고'라고 생각했던 아빠가, 점점 네가 세상에 눈을 떠 갈수록 작게 보이는 것 말이다. 작년의 너를 돌아보면, 지금은 말로 꺼내기 부끄러운 짓도 저지르고 그런 생각을 했었다는 것 자체가 쑥스러운 생각들도 했던 것처럼, 아빠도 그럴 수 있는 거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에겐 '최고'인 아빠이기에, 그 실수에 대해 더욱 엄격하게 바라보게 되고, 더 큰 실망을 하게 될 거라 생각한다. 아빠는 네 겨드랑이에 털이 나기 전까지 '우리아빠최고'가 되기 위해 노력할 테지만, 털이 난 직후부턴 네가 아빠 겨드랑이 털만 볼 생각을 하니 벌써 슬프구나. 아빠에 대한 어떤 판정을 내려야 한다면, 실형 보다는 집행유예를 부탁하마.

지금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창 옆으로 메신저가 떠 있단다. 그리고 메신저 명단에는 할아버지의 이름도 보인다. 위에서 이야기 한 것들을 할아버지에게도 털어놓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단다. 할아버지는 이제 로그인 하실 수가 없으니 말이다.

덜컥, 겁이 났단다.

이런 이야기들을 너에게 못하고 무슨 일이 일어나면 어쩔까, 아니면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픈 말을 하거나 미움을 품거나, 생활에 바빠 그렇고 그런 대화들만 나누게 되는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단다. 네가 아빠를 닮았다면 볕이 잘 드는 곳에 앉아도 마음속엔 어둠이 남아, 끝없이 침전하는 기분을 느낄 텐데, 그때, 아빠가 네 손을 잡아주고 싶구나.

지구에서의 한살이는 결코 길지 않단다. 나이가 들수록, 몇 밤을 자고 나니 몇 년이 지나가 버린 기분이 될 텐데, 그 짧은 시간동안 아빠는 너와 친하게 지내고 싶단다. 아무튼, 아빠는 치킨이 먹고 싶구나. 너만 치킨을 좋아하는 게 아니란다. 이 글을 본다면, 아빠도 좀 생각해주길 바란다. 양념 반, 후라이드 반, 무 많이.




▲ 여보, 아버님 댁에 귀뚜라미 풀어드려야 겠어요.(응?) 오늘은 가족들과 맛난 치킨 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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