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완가재(화이트 클라키)와 함께 동네 산책하기.
카프카의 <변신>에서 나온 장면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책을 다시 읽어보았지만 그런 장면을 찾을 수 없다. 아마 <변신>을 읽었던 그 시기에 읽었던 다른 책이었거나, 잘못된 번역일 수 있다. 내가 기억하는 그 장면은 아래와 같다.
그는 종종 가재를 실로 묶어 산책을 하곤 했다.
그는 현관 계단 기둥에 가재를 묶어두고, 계단을 올라 내 방으로 왔다.
당시 그 책을 읽으며 '이건 또 무슨 발번역 인가?'하는 생각을 했던 것까지 기억난다. 가재와 산책을 하다니. 가재는 수생동물인데. 원문에는 외국에만 사는 동물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그걸 한글로 옮기다보니 마땅한 게 없어 가재로 옮겨 둔 것이라 생각했다. 한국에 '백작'이라는 호칭이 없다는 이유로 '몽테 크리스토 백작'을 '몽테 크리스토 대감'으로 번역하고, '영국 신사'를 '영국 선비'로 번역했던 일처럼 말이다.
여하튼 저 문장을 읽고 몇 해쯤 지났을 때, 난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을 읽다가 놀라운 문장을 발견하게 되었다.
파란 리본에 가재를 묶어 뤽상부르 공원을 돌아다녔다. 드 네르발은 물었다.
"왜 개는 괜찮은데 가재는 우스꽝스러운가?
또 다른 짐승을 골라 산책을 시킨다 한들 무슨 상관인가?
나는 가재를 좋아한다.
가재는 평화롭고 진지한 동물이다. 가재는 바다의 비밀을 알고, 짖지 않고,
개처럼 사람의 단자적 사생활을 갉아먹지 않는다.
괴테는 개를 싫어했지만, 그렇다고 괴테가 미쳤던 것은 아니지 않은가."
- 알랭 드 보통 <불안> 중에서
전에 읽었던 '가재 산책'이 발번역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로부터 몇 해가 지난 지금. 난 직접 가재와 산책을 나가기로 했다.
가재와 산책을 할 때 가장 신경 써야 하는 건 시간이다. 웹 어딘가에 나와있는,
물 밖에서는 폐호흡을 합니다."
따위의 말을 믿었다간 가재가 요단강을 건너고 만다. 가재는 아가미 호흡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고기와 달리 물 밖에서 꽤 긴 시간을 버틸 수 있는 건 가재에겐 적은 산소로도 버틸 수 있는 능력이 있고, 가재의 갑각이 아가미에서의 수분증발을 어느 정도 막아주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오랜 시간을 버티는 건 아니다. 가재는 온도가 낮고 습한 곳에서는 한 시간 이상도 버틸 수 있지만, 온도가 높고 건조한 곳에서는 5~10분만 지나도 생명끈을 놓고 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난 날씨를 참고해 산책시간을 10분으로 잡았다.
화단에 가재를 내려놓자 나무 밑으로 들어가려 했다. 난 가재와의 산책에 들떠 휴대폰으로도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그 사진을 지인에게도 전송했다. 사진은 본 지인은,
"뭐야? 인삼이야?"
라는 답장을 보냈다. 사진 제목은 '인삼으로오해받은가재.jyp'가 되었다.
가재를 잔디밭으로 데려갔다. 녀석은 "뭐야? 이거 어항에 있는 수초랑 비슷한데?"라며 유심히 잔디를 관찰했다.
녀석이 잔디밭에 있는 돌 틈으로 들어가려다가 실패한 뒤 짜증을 내고 있다. 햇빛 때문에 눈이 부신지 집게발을 들어 집게그늘(응?)을 만들고 있다.
근처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길래 난 녀석을 놀이터로 데려갔다. 그네를 태워주고 싶었는데 녀석이 붙잡을 생각은 안 하고 자꾸 내려가려 하길래 그만 두었다. 대신 미끄럼틀을 태워주었다. 신나기보다는 불안했는지, 녀석은 집게발로 브레이크를 걸었다.
다시 화단으로 데려갔다. 녀석은 자라고 있는 잔디 싹을 집게발로 움켜쥐었다. 놀이터에 있던 꼬꼬마들이 쫓아와 자꾸 귀찮게 굴었다.
"야~ 이거 봐봐. 살아 있어. 움직여."
"이거 어디서 팔아요? 얼마예요?"
난 "나보다 멀리 뛰는 사람한테 이거(가재) 줄게."라고 말한 뒤 보도블럭에서 놀이터까지 힘껏 뛰었다. 그러고는 선을 그어 그게 커트라인임을 꼬꼬마들에게 알려줬다. 꼬꼬마들은 그 선을 넘으려 애쓰느라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았다.
가재와 함께 벤치에 앉아 멀리뛰기를 하고 있는 꼬꼬마들을 잠시 지켜봤다. 폴짝폴짝 뛰고 있는 꼬꼬마들이 신기한지 가재도 말없이 꼼짝 않고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잠깐만. 꼼짝 않고?
녀석의 몸이 굳어가고 있었다. 어서 집으로 데려가 물에 넣어줘야 할 시간이 된 것이다.
집에 들어가는 길에 마지막으로 한 컷. 저 사진을 남긴 채 가재는 세상을 뜨고 말았다는 건 훼이크고, 집에 돌아와 물에 적신 뒤 맞댐을 해 어항에 넣어줬다. 수고한 가재를 위해 저녁식사로 냉짱(냉동 장구벌레)을 주었다. 녀석은 냉짱을 집게발로 집어 먹다가 잠깐 멈춰 날 바라봤다.
"아까 찍은 사진, 잘 나왔어?"
라고 묻는 것 같았다. 난 잘 나왔다며 고개를 끄덕거려줬다. 녀석은 만족했는지 다시 냉짱을 집어 먹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새우가 허둥대며 가재를 넘어 다녔다. 그 모습이 꼭 "야 뭐야, 어디 갔다 왔는데? 말해줘. 나 궁금해서 잠 못 잔다."라며 재촉하는 듯 보였다.
가재의 호흡방법이 궁금하신 분들은 아래의 글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 ProfBill (http://www.newton.dep.anl.gov/askasci/bio99/bio99434.htm)
좋은 설명이다.(응?)
가재의 육지에서의 호흡방법은 게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갑각의 도움을 받아 수분증발을 막고, 입에서 뿜어내는 점액질 거품으로 산소를 흡수하며 동시에 수분손실도 막을 거라 예상된다. 가재도 게처럼 아가미에 건조방지 도움판을 갖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나저나 '가재와의 산책'에 대한 이야기는 블로그에만 적어야겠다. 오프라인에서 지인들에게 가재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한 적이 있었는데, 지인들은 내가 피겨스케이팅에 대한 설명을 들을 때 보이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먹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나마 우정을 생각해 잠시나마 가재 이야기를 들어줬던 한 친구는,
"아무튼 너, 무슨 클라키니 하는 얘기까지 하는 걸 보니
꽤 전문적으로 가재를 키우는 것 같아. 그치?"
라고 말했다. 하긴. 나도 언젠가 귀뚜라미를 키운다는 친구에게 "왜 그래? 요즘 삶이 힘들어? 너 그러다 귀뚜라미 된다."라고 말한 적 있으니 그걸로 퉁 치도록 하자. 사월의 어느 날 가재와의 산책. 잠시나마 신났던 시간이었다.
▲ 가재와 산책을 갔다 온다고 하자, 가재 담아 가라며 통을 내 주신 어머니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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