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류심사에서 세 번 떨어진 자기소개서, 문제는?
예정에 없던 매뉴얼입니다만, K씨가 보내 주신 학업계획서(자기소개서 포함)를 열어보니 전부 새로 써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급하게 글을 적습니다. 모집하는 곳에서 요구하는 스펙을 웃도는 데에도 불구하고 세 번이나 서류통과를 하지 못했던 건, 학업계획서 탓이 맞는 것 같습니다.
J씨가 보내주신 글은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렇게 병을 극복했다." 류의 수기에 가깝습니다. 나름 체계적으로 작성하시려 여섯 부분으로 나눠두신 듯한데, 그 요점만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지금 J씨는 투병 수기가 아니라 학업계획서를 써야 하는 상황입니다. 모집하는 곳에서
이라고 적어둔 것은, 학업계획을 자유롭게 작성하라는 거지 주제를 마음대로 정해서 하고 싶은 말 적으라는 게 아닙니다. 지금 자신이 무엇을, 왜 쓰고 있는지 먼저 곰곰이 생각해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뭘 어떻게 바꿔야 할지는 아래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주신 글을 보면, 아프셨을 때의 상황을 적은 건 의사선생님께 들은 얘기가 절반입니다. 어떻게 다쳤고, 무슨 검사를 했고, 어떤 치료를 받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지루하게 이어집니다. J씨에겐 그게 엄청 심각한 일이었기에 그렇게 적으셨겠지만 타인에겐 별로 와 닿지 않는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예컨대 제가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서 무릎을 다친 얘기를, 1시간 대화 중 40분 동안 한다면 J씨도 분명 지루해 할 거라 생각합니다. 꼭 그 얘기를 해야 한다면 앞부분에 짧게 3줄 정도로만 적길 권합니다.
'그것'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J씨가 쓴 '그것'에 대한 설명은 블로그에 적어 사람들에게 소개하게 알맞을 뿐입니다. 학업계획을 살피려고 한 사람에게 그 글을 내밀면,
이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것'을 등산으로 바꿔 말하자면, J씨는 등산을 하며 생긴 마음의 변화를 말하는 것 대신 구입한 등산용품과 등산로 설명만을 적어둔 것과 같습니다. 운동원리까지 찾아 정말 자세히 적긴 하셨습니다만, 쓸데없이 자세합니다. 그 글을 읽을 사람이 블로그 독자가 아니라는 점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에 가서 J씨는 뜬금없이 책과 영화 얘길 합니다.
대책 없이 '감상문' 형식으로 마무리 되는 느낌입니다. 책의 문장과 영화의 대사가 앞의 이야기와 이어지는지 천천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있어 보인다고 아무렇게나 갖다 붙이면 곤란합니다. 학업계획서의 전반을 꿰뚫지 못하는 인용은 필요 이상으로 짙게 한 화장과 같습니다. 예뻐 보이려고 한 화장도 과하면 역효과가 날 수 있듯, 듣고 본 이야기들을 다 꺼낼 필요는 없다는 걸 적어두겠습니다.
근본적인 질문은 "너 뭐 하고 싶어?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라는 걸 글 쓰는 내내 유념하시길 바랍니다.
문장을 나눠야 합니다. 저도 만연체의 나쁜 습관이 들어 있는 까닭에 이 얘기를 꺼내기가 좀 불편하긴 합니다만, J씨의 문장은 제 경우보다 좀 더 심각하신 것 같습니다. 한 문장을 따와 살펴보겠습니다.
소리 내어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호흡을 해야 하는 적당한 시점을 찾지 못해 숨이 차지 않습니까? 소리 내어 읽어도 숨차지 않을 정도로 문장을 나누시면 될 것 같습니다. 문장을 나눌 때마다 어딘가에 로열티를 지불해야 하는 게 아니니 마음 놓고 나누시길 권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오는 "저를 보내셨습니다."같은 부분은 '돌려' 정도를 넣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처럼 생략으로 인해 어색한 부분이 종종 등장하는데, 모두 살펴볼 수는 없고 한 문장만 가져와 보겠습니다.
의도적으로 주어를 생략하신 게 아니라면, 주어는 꼭 넣어주시기 바랍니다.
문장을 고쳐 예를 들지 않는 까닭은, 사실 저 문장 자체를 버려야하기 때문입니다. 저 문장이 들어간 부분 전체를 걷어내야 합니다. J씨가 쓰신 건 운동 후기입니다.
학업계획서나 자기소개서에 저런 상세한 에피소드가 들어가는 건 처음 봅니다. 쉽게 이해하실 수 있도록 말씀드리겠습니다. 소개팅에 나가 이성에게 이야기를 하는 중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 자리에서 저렇게 자세히 상황묘사를 했다간 상대가 하품을 할 것 같지 않습니까? 에피소드는 요점을 말하기 위한 디딤돌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에피소드가 요점의 자리에 들어앉아 버리는 주객전도를 경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 더. 불필요한 수식을 줄이시기 바랍니다. 저 위에서도 보입니다만 '나이가 지긋이 드신' 같은 수식은 굳이 쓸 필요가 없습니다.
같은 문장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친구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엔 괜찮은 수식이지만, 학업계획서나 자기소개서에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전하고자 하는 요점과 관련된 수식인가를 꼭 살피시길 권합니다.
건강을 회복한 이야기를 길게 하다가, 갑자기 주제를 바꿔
이라며 방향을 트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J씨가 어떤 마음으로 그 이야기를 꺼냈는지는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밖에서 보자면 두 이야기 사이에 연관성이 없습니다. 그건 마치
식의 진행과 같습니다.
이라는 부분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저 얘기를 하려면 앞에서 "난 이러이러한 일화로 증명되듯 예민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다."라거나 "난 이러한 경험들을 통해 상대의 감수성에 호소할 수 있는 재능을 키웠다." 정도의 근거를 제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용이 너무 진부합니다. 사용자의 감수성에 호소해야 한다거나, 상품에 스토리를 결합시켜야 한다거나, 직관적인 인터페이스를 개발해야 한다는 건 이 시점에 누구나 다 하고 있는 생각입니다. 지금, "사용자 신경 쓸 것 없이 신기술을 개발하자!"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제가 만약 같은 내용을 쓴다면,
정도로 운을 띄우고, 그에 대한 근거와 그간 스스로 공부해온 것들을 소개한 뒤, 앞으로 어떻게 결합시켜 나갈지를 설명할 것 같습니다. 그 정도면 "사용자의 감수성에 호소해야 한다."라는 진부한 주장도 나름 힘을 얻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자신의 주장이 남의 주장과 일치하더라도, 그 결론에 도달한 이유는 분명 다를 것입니다. 그걸 보여줘야 합니다. "누구의 말처럼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가 아닌, "이러이러한 일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정도로 말입니다. 그 경험을 적는 것이 자기소개서고, 그 생각을 어떻게 현실에 펼칠지를 말하는 게 학업계획서 입니다.(물론, 어떤 경지에 이른 상태가 아니기에 부족한 부분들이 있음을 스스로 잘 알 것이고, 그걸 극복해 나갈 방안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도 포함되어야 합니다.) 이걸 잊지 않으신다면, 좀 다른 얘기들로 뻗어 나가더라도 이야기 전체의 큰 뿌리는 벗어나지 않을 수 있으실 겁니다.
다시 작성하실 때 기억하셔야 할 몇 가지 사항들을 좀 더 적겠습니다.
우선 "짧게 말하면"이라든가 "간략히 설명하자면" 등의 이야기가 들어가면, 무조건 그 소개서는 망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저런 문장이 나왔다는 건 이미 소개서가 산으로 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투병 수기 및 취미 설명문이 되어 버린 J씨의 글에서 등장했던 문장입니다.
괄호와 주석을 달아가며 설명해야 하는 전문용어의 남발도 주의해야 합니다. 예컨대 "꽃을 보며 생각했습니다."라고 하면 충분할 것을, "진달래(피자식물문 쌍떡잎식물강 진달래과, 학명 Rhododendron mucronulatum Turcz. var. mucronulatum)를 보며 든 생각으로…."라고 쓸 필요는 없습니다. J씨의 글 7, 8, 11, 13, 14페이지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유명인들의 전설 같은 패기를 따라하지 말길 권하고 싶습니다. 그게 다 실제보다 부풀려 전해졌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 패기를 따라하는 사람만 뿌듯할 뿐 보는 사람은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직원이나 학생을 뽑은 입장이라고 해도
라고 말하는 지원자가 있으면, "네, 다음 환자 들어오세요."라며 내보낼 것 같습니다. 극단에 몰렸을 경우 그런 베팅을 해 볼 순 있겠습니다만, 애초부터 혼자 이상한 분노로 끓어오르며 패기를 내세울 필요는 없습니다. 차분하고 온화하게 자신의 생각을 꺼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심사 할 사람들을 이쪽에서 미리 속물로 설정해 두고 일부러 그들을 자극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수정한 글은 normalog@naver.com 으로 다시 한번 보내주시기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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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이별을 결심하게 만드는 남자의 특징
예정에 없던 매뉴얼입니다만, K씨가 보내 주신 학업계획서(자기소개서 포함)를 열어보니 전부 새로 써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급하게 글을 적습니다. 모집하는 곳에서 요구하는 스펙을 웃도는 데에도 불구하고 세 번이나 서류통과를 하지 못했던 건, 학업계획서 탓이 맞는 것 같습니다.
J씨가 보내주신 글은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렇게 병을 극복했다." 류의 수기에 가깝습니다. 나름 체계적으로 작성하시려 여섯 부분으로 나눠두신 듯한데, 그 요점만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1. 난 예전에 다친 적 있다.
2. 다쳐서 절망하며 거의 대인기피 수준까지 추락했다.
3. 어느 날 그런 나에게 한줄기 빛처럼 '그것'이 찾아왔다.
4. '그것'을 하며 자신감이 붙고, 난 재활에 성공했다.
5. 내게 도움을 준 '그것'은 이러이러한 것이다.
6. 이젠 일상생활에 지장 없다. 잡스 자서전도 읽었다. 날 뽑아라.
2. 다쳐서 절망하며 거의 대인기피 수준까지 추락했다.
3. 어느 날 그런 나에게 한줄기 빛처럼 '그것'이 찾아왔다.
4. '그것'을 하며 자신감이 붙고, 난 재활에 성공했다.
5. 내게 도움을 준 '그것'은 이러이러한 것이다.
6. 이젠 일상생활에 지장 없다. 잡스 자서전도 읽었다. 날 뽑아라.
지금 J씨는 투병 수기가 아니라 학업계획서를 써야 하는 상황입니다. 모집하는 곳에서
"별도의 양식 없이 지원자가 자유롭게 작성하여 제출"
이라고 적어둔 것은, 학업계획을 자유롭게 작성하라는 거지 주제를 마음대로 정해서 하고 싶은 말 적으라는 게 아닙니다. 지금 자신이 무엇을, 왜 쓰고 있는지 먼저 곰곰이 생각해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뭘 어떻게 바꿔야 할지는 아래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1. 듣고 본 것들은 '선별해서' 작성하기
주신 글을 보면, 아프셨을 때의 상황을 적은 건 의사선생님께 들은 얘기가 절반입니다. 어떻게 다쳤고, 무슨 검사를 했고, 어떤 치료를 받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지루하게 이어집니다. J씨에겐 그게 엄청 심각한 일이었기에 그렇게 적으셨겠지만 타인에겐 별로 와 닿지 않는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예컨대 제가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서 무릎을 다친 얘기를, 1시간 대화 중 40분 동안 한다면 J씨도 분명 지루해 할 거라 생각합니다. 꼭 그 얘기를 해야 한다면 앞부분에 짧게 3줄 정도로만 적길 권합니다.
'그것'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J씨가 쓴 '그것'에 대한 설명은 블로그에 적어 사람들에게 소개하게 알맞을 뿐입니다. 학업계획을 살피려고 한 사람에게 그 글을 내밀면,
'학업계획을 쓰라고 했더니, 이건 뭐 취미생활 카달로그를 만들어 왔구만.'
이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것'을 등산으로 바꿔 말하자면, J씨는 등산을 하며 생긴 마음의 변화를 말하는 것 대신 구입한 등산용품과 등산로 설명만을 적어둔 것과 같습니다. 운동원리까지 찾아 정말 자세히 적긴 하셨습니다만, 쓸데없이 자세합니다. 그 글을 읽을 사람이 블로그 독자가 아니라는 점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에 가서 J씨는 뜬금없이 책과 영화 얘길 합니다.
"제가 읽은 책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어쩌고저쩌고.
또, 어느 영화의 명대사는 뭐뭐뭐뭐 이죠.
합격한다면, 그곳을 빛내는 인재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또, 어느 영화의 명대사는 뭐뭐뭐뭐 이죠.
합격한다면, 그곳을 빛내는 인재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대책 없이 '감상문' 형식으로 마무리 되는 느낌입니다. 책의 문장과 영화의 대사가 앞의 이야기와 이어지는지 천천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있어 보인다고 아무렇게나 갖다 붙이면 곤란합니다. 학업계획서의 전반을 꿰뚫지 못하는 인용은 필요 이상으로 짙게 한 화장과 같습니다. 예뻐 보이려고 한 화장도 과하면 역효과가 날 수 있듯, 듣고 본 이야기들을 다 꺼낼 필요는 없다는 걸 적어두겠습니다.
근본적인 질문은 "너 뭐 하고 싶어?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라는 걸 글 쓰는 내내 유념하시길 바랍니다.
2. 문장의 문제
문장을 나눠야 합니다. 저도 만연체의 나쁜 습관이 들어 있는 까닭에 이 얘기를 꺼내기가 좀 불편하긴 합니다만, J씨의 문장은 제 경우보다 좀 더 심각하신 것 같습니다. 한 문장을 따와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던 중 XX병원에 찾아 갔을 때 나이가 지긋이 드신 의사선생님께서 제 경우는 수술 아니면 방법이 없는데 아직은 제 나이가 너무 어리니 나중에 걷지도 못 할 정도가 되면 그 때 수술을 고려해 보시자면서 저를 보내셨습니다."
소리 내어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호흡을 해야 하는 적당한 시점을 찾지 못해 숨이 차지 않습니까? 소리 내어 읽어도 숨차지 않을 정도로 문장을 나누시면 될 것 같습니다. 문장을 나눌 때마다 어딘가에 로열티를 지불해야 하는 게 아니니 마음 놓고 나누시길 권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오는 "저를 보내셨습니다."같은 부분은 '돌려' 정도를 넣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처럼 생략으로 인해 어색한 부분이 종종 등장하는데, 모두 살펴볼 수는 없고 한 문장만 가져와 보겠습니다.
"친구와 미리 도착하여 몸을 풀고 약간의 긴장감을 안고 앞 조의 경기를 보았습니다."
의도적으로 주어를 생략하신 게 아니라면, 주어는 꼭 넣어주시기 바랍니다.
문장을 고쳐 예를 들지 않는 까닭은, 사실 저 문장 자체를 버려야하기 때문입니다. 저 문장이 들어간 부분 전체를 걷어내야 합니다. J씨가 쓰신 건 운동 후기입니다.
"3, 2, 1 Go! 드디어 시작 소리와 함께 타이머는 울렸고…."
학업계획서나 자기소개서에 저런 상세한 에피소드가 들어가는 건 처음 봅니다. 쉽게 이해하실 수 있도록 말씀드리겠습니다. 소개팅에 나가 이성에게 이야기를 하는 중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 자리에서 저렇게 자세히 상황묘사를 했다간 상대가 하품을 할 것 같지 않습니까? 에피소드는 요점을 말하기 위한 디딤돌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에피소드가 요점의 자리에 들어앉아 버리는 주객전도를 경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 더. 불필요한 수식을 줄이시기 바랍니다. 저 위에서도 보입니다만 '나이가 지긋이 드신' 같은 수식은 굳이 쓸 필요가 없습니다.
"효도르가 체력단련을 위해 사용한다는…."
"무한도전 조정편에서 나온 적 있는…."
"무한도전 조정편에서 나온 적 있는…."
같은 문장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친구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엔 괜찮은 수식이지만, 학업계획서나 자기소개서에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전하고자 하는 요점과 관련된 수식인가를 꼭 살피시길 권합니다.
3. 진부한 말을 다르게 하는 방법
건강을 회복한 이야기를 길게 하다가, 갑자기 주제를 바꿔
"이 분야에서 성공한 누구누구도 처음엔 나처럼…."
이라며 방향을 트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J씨가 어떤 마음으로 그 이야기를 꺼냈는지는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밖에서 보자면 두 이야기 사이에 연관성이 없습니다. 그건 마치
ⓐ 잡스도 뭔가를 이루기 전까진 백수였다.
ⓑ 나도 지금 백수다.
ⓒ 난 내가 잡스처럼 될 수 있다는 걸 믿어 의심치 않는다.
ⓑ 나도 지금 백수다.
ⓒ 난 내가 잡스처럼 될 수 있다는 걸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식의 진행과 같습니다.
"이제는 기술뿐만 아니라 사용자들의 감성에 호소할 수 있는…."
이라는 부분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저 얘기를 하려면 앞에서 "난 이러이러한 일화로 증명되듯 예민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다."라거나 "난 이러한 경험들을 통해 상대의 감수성에 호소할 수 있는 재능을 키웠다." 정도의 근거를 제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용이 너무 진부합니다. 사용자의 감수성에 호소해야 한다거나, 상품에 스토리를 결합시켜야 한다거나, 직관적인 인터페이스를 개발해야 한다는 건 이 시점에 누구나 다 하고 있는 생각입니다. 지금, "사용자 신경 쓸 것 없이 신기술을 개발하자!"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제가 만약 같은 내용을 쓴다면,
"철학 없는 감수성은 허세로 기울기 쉽다."
정도로 운을 띄우고, 그에 대한 근거와 그간 스스로 공부해온 것들을 소개한 뒤, 앞으로 어떻게 결합시켜 나갈지를 설명할 것 같습니다. 그 정도면 "사용자의 감수성에 호소해야 한다."라는 진부한 주장도 나름 힘을 얻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자신의 주장이 남의 주장과 일치하더라도, 그 결론에 도달한 이유는 분명 다를 것입니다. 그걸 보여줘야 합니다. "누구의 말처럼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가 아닌, "이러이러한 일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정도로 말입니다. 그 경험을 적는 것이 자기소개서고, 그 생각을 어떻게 현실에 펼칠지를 말하는 게 학업계획서 입니다.(물론, 어떤 경지에 이른 상태가 아니기에 부족한 부분들이 있음을 스스로 잘 알 것이고, 그걸 극복해 나갈 방안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도 포함되어야 합니다.) 이걸 잊지 않으신다면, 좀 다른 얘기들로 뻗어 나가더라도 이야기 전체의 큰 뿌리는 벗어나지 않을 수 있으실 겁니다.
다시 작성하실 때 기억하셔야 할 몇 가지 사항들을 좀 더 적겠습니다.
우선 "짧게 말하면"이라든가 "간략히 설명하자면" 등의 이야기가 들어가면, 무조건 그 소개서는 망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저런 문장이 나왔다는 건 이미 소개서가 산으로 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투병 수기 및 취미 설명문이 되어 버린 J씨의 글에서 등장했던 문장입니다.
괄호와 주석을 달아가며 설명해야 하는 전문용어의 남발도 주의해야 합니다. 예컨대 "꽃을 보며 생각했습니다."라고 하면 충분할 것을, "진달래(피자식물문 쌍떡잎식물강 진달래과, 학명 Rhododendron mucronulatum Turcz. var. mucronulatum)를 보며 든 생각으로…."라고 쓸 필요는 없습니다. J씨의 글 7, 8, 11, 13, 14페이지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유명인들의 전설 같은 패기를 따라하지 말길 권하고 싶습니다. 그게 다 실제보다 부풀려 전해졌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 패기를 따라하는 사람만 뿌듯할 뿐 보는 사람은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직원이나 학생을 뽑은 입장이라고 해도
"지금의 제가 부족해 보일지 모르지만, 전 분명히 발전할 겁니다.
당장은 답을 모르더라도 반드시 답을 찾아내고야 말 겁니다.
이래도 절 뽑지 않으시겠습니까?"
당장은 답을 모르더라도 반드시 답을 찾아내고야 말 겁니다.
이래도 절 뽑지 않으시겠습니까?"
라고 말하는 지원자가 있으면, "네, 다음 환자 들어오세요."라며 내보낼 것 같습니다. 극단에 몰렸을 경우 그런 베팅을 해 볼 순 있겠습니다만, 애초부터 혼자 이상한 분노로 끓어오르며 패기를 내세울 필요는 없습니다. 차분하고 온화하게 자신의 생각을 꺼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심사 할 사람들을 이쪽에서 미리 속물로 설정해 두고 일부러 그들을 자극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수정한 글은 normalog@naver.com 으로 다시 한번 보내주시기 바라며!
▲ 메일 보내실 때에는 이력, 양식, 작성한 글, 특이사항을 함께 보내시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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