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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매뉴얼(연재중)/커플생활매뉴얼

한심한 여자친구에게 질려 헤어지려는 남자

by 무한 2013. 1. 18.
한심한 여자친구에게 질려 헤어지려는 남자
오늘은 금요사연모음을 발행해야 하는 날인데, 급한 사연이 도착해 이 사연을 먼저 좀 다룰까 한다. 이번 주말, 4년 연애의 종지부를 찍을 것이라는 L씨의 말을 그냥 넘길 수 없기 때문이다.

L씨는 사연에 '헤어지려고 생각한 이유 네 가지'를 적어두었다. 그것만 보면 헤어지는 게 맞다. 세상물정 모르고, 매사에 의존적이며, "나 오늘 부츠 신을까, 구두 신을까?"처럼 쓸데없는 것만 물어대는 여자를 뭐 하러 사귀는가. 멍충이들은 멍충이들끼리 어울리라고 어서 내치고, 이젠 좀 더 지적이고, 교양 있고, 말이 통하는 여자를 만나자.

내가 힘을 보탰으니, 이제 좀 마음 편하게 그녀를 유기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지금은 엄동설한. 여자친구에게 자격미달 판정을 내렸다 하더라도, 유기는 따뜻한 봄쯤 하자. 이 추운 겨울에 내다 버리면 얼어 죽는다. 그리고 우리끼리니까 하는 말이지만, L씨는 이미

'다른 남자라면 나처럼 얠 견딜 수 없을 걸?
얜 나 아니면 안 돼. 나니까 이 정도 버틴 거지….'



라고 생각할 것 아닌가. 그걸 어떻게 알았냐며 깜짝 놀랄 것 없다. 유기하는 사람들은 다들 그런 생각으로 상대를 갖다 버린다. 계속 사귀기엔 내가 아깝고, 분명 상대보다 더 나은 대안이 존재할 것 같고, 그래도 이 정도면 최선을 다 한 거고, 아무리 생각해도 상대의 단점들은 너무 한심하고….

애써 L씨의 유기를 말리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이미 자신이 아깝다는 확실한 믿음을 가진데다가, 여자친구가 삶을 좀먹는 것 같다고 느끼는 사람을 말려봐야,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저 유기를 잠시 미루는 유예기간만 좀 얻을 수 있을 뿐이다.

다만 난, L씨가 말한 '헤어지려고 생각한 이유 네 가지'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좀 있다. 아래에 적어둘 테니, 유기를 미룬 봄까지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생각해 보길 바란다. 출발해 보자.


1. 제가 챙기지 않으면 여자친구는 아무 것도 못 해요.


여자친구의 주차실력을 평생 초보수준으로 묶어두는 방법을 아는가? 간단하다. 주차 할 일이 있을 때마다 대신 해주면 된다. 여자친구가 핸들을 붙잡고 난처한 표정을 보일 때마다 "비켜 봐봐. 내가 할게."라며 운전석을 대신 차지하면, 그녀는 평생 주차할 때마다 헤매게 될 것이다.

L씨의 사연에선, 여자친구가 난처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L씨가 '해결사'를 자처하며 나선 모습이 보인다. 학생 때는 과제 대신 해주고, 시간표 짜는 것 도와주고, 취업할 때에는 소개서 대신 써주고, 취업 후에는 업무 도와주고, 비서처럼 스케줄 챙겨주고 등등. 그렇게 도와줄 때마다 여자친구가 존경의 눈빛을 보내니, L씨는 뿌듯했다.

그런데 계속 대신 해주고, 도와주다 보니 짜증이 난 거다. 주차만 해도 그렇다. 남들은 알아서 차 잘 대고 올라오는데, 이건 뭐 매번 나가서 대신 주차를 해 줘야 하니 여자친구가 한심해 보인다. 그래서 L씨는 여자친구에게 슬며시 이야기한다.

"이젠 좀 스스로 해야 하지 않을까? 내가 언제까지 도와줄 순 없는 거잖아.
좀 노력해 보자. 큰일은 내가 도와주겠지만, 사소한 일들은 스스로 챙겨보자."



하지만 말 한 마디에 없던 주차실력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여자친구는 여전히 헤맨다. 그럼 또 L씨는 "비켜 봐봐. 내가 할게."라며 운전석을 차지하고, 그러다 지쳐서

'진짜 얜 내 인생의 걸림돌인 것 같아.'


라는 생각을 하고 만다. 어쩌면 좋을까. 아이가 넘어져 다칠까 두려워 유모차에만 태우고 다니면, 아니는 영영 걸음마를 익히지 못 하는 법인데.


2. 뭘 하기 전에 꼭 저한테 확인 받으려 해요.
 

이건 지인의 이야기까지 예로 들어 설명한 적 있는 부분이다. 여자친구가 회사에서 속상한 일 있었다는 얘기를 하면,

"너도 잘못했네. 그러니까 실수를 왜 해? 숫자를 제대로 봤어야지."
"월급도 얼마 안 주면서 뭐 대우가 그따위야? 당장 때려 쳐."
"이팀장? 걔 전화번호 뭐야. 그 XX X XXX XX가 XX라고, 전화번호 줘봐."



등의 반응을 보이는 것 말이다. 판사나 검사가 아니라 여자친구의 변호사가 되라고 수 없이 이야기 했지만, 대부분의 남자가 '문제해결 프로세스'에 따라 움직이는 까닭에, 저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여자친구는 그저

"걘 진짜 성격파탄인 것 같다. 싸이코 땜에 자기 속상했지?"


정도의 토닥토닥을 바란 건데, 남자는

'이건 내가 나서서 해결해야해.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고, 어서 답을 찾자.'


라며 재판봉을 드는 것이다. 게다가 그 판결을 내리는 과정에서 남자는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한다. 해결하지 못하면 여자에게 우스워 보일 수 있다는 긴장감, 그리고 훗날 이 판결로 인해 문제가 발생해야 하지 않는다는 책임감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나 오늘 부츠 신을까, 구두 신을까?"


라는 질문도 남자는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거기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는 "그냥 신고 싶은 거 신어."라는 대답이 있는데, 그 얘기를 꺼냈다간 재앙이 찾아온다. 센스 있는 남자들은 "그 옷엔 부츠가 어울릴 것 같은데?"라며 가볍게 대답하는 법을 이미 깨우쳤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남자는

"뭐 그런 것까지 물어봐? 뭐 신을 지까지 내가 다 확인해 줘야해?"


라며 화를 낸다. 판결에 대한 부담스러움이 여자친구를 '계속 찾아오는 민원인'으로 보이게 만든 까닭이다. 남자는 '이렇게 매사에 의존하는 여자와 계속 사귀어야 할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3. 저에 대한 불만을 대놓고 말 안 하고, 뒷담화를 해요.


군대에 있을 때, 우리 소대장이 그랬다.

"불만이나 군생활에 어려움이 있으면 나한테 다 말해.
헌병대에서 소원수리(무기명 신고)같은 거 받아갈 때 적지 말고,
나한테 말하면 내가 다 들어 줄게. 허심탄회하게 말해."



그 말을 듣고 소대장을 찾아가 불만을 말하면, 소대장은 이렇게 답했다.

"군생활은 원래 힘들어. 나도 너희들과 똑같이 힘들어. 그러니까 참아."
"없으면 없는 대로 해야지, 뭐 없다고 안 하고 그러면 안 되잖아?"
"사회도 군대랑 똑은데, 지금 그거 못 견디면 어떻게 사회생활 하려고 그래?"



그러니까 '들어 준다'는 게, 해결해 준다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내 귀로 들어 주겠다.'는 뜻이었다. 두발자유 고등학교라고 해서 입학했더니, "두발규제가 없다는 게 아니라, 두 발로 걸어 다니는 게 자유."라는 이야기를 듣는 것과 비슷하달까.

똑똑한 남자친구가-이 연애가 여자친구를 위한 자신의 희생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남자친구가-, 이쪽에서 얘기하는 족족 모두 방어를 해 버리는데 무슨 얘기를 할 수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이쪽에서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남자친구는 잔소리와 지적질을 해 대는데, 거기에 대고 어떻게 불만을 이야기 할 수 있겠는가?

여자친구라고 해서 연애에 아무 불만이 없으며, 생각 없이 헤헤 거리고 있는 건 아닐 것이다. 때문에 마음속에 차오르는 감정들을 분출을 해야 하는데, 남자친구라는 견고하고 거대한 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으니, 물이 바위를 만나 옆으로 돌아 흐르듯 남들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 놓는 수밖에 없다.

여친 - 넌 매번 나를 혼내려고 하는 것 같아.
나친 - 악의를 가지고 그러는 게 아니잖아. 다 잘 되자고 하는 얘기지.



말해봐야 저런 식인데, 무슨 불만을 얘기할까?


4. 열심히 달래고, 화내고 해봐야 고쳐지질 않네요.


나중에 땅을 치며 후회할 소리다. 상대가 역사, 정치, 상식 등에서 그대보다 아는 것이 적으니 하찮아 보이고, 한참 더 배우고 익혀야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한창 세상 돌아가는 것에 관심을 시작할 이십대 중후반에는 그럴 수 있다. 역사, 정치, 상식, 처세 등을 알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까닭에 눈에 불을 켜고 지식을 얻고자 한다. 반면 자신과 달리 그런 것들에 별 관심을 두지 않으며 잘 모르는 여자친구는 한심해 보인다. 그래서 여자친구가 그런 것들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돕고, 또 옆에서 끊임없이 강조를 하지만 여자친구에겐 별 변화가 없다. 기껏해야 한다는 소리가

"나 어그부츠 사려고 하는데, 긴 걸로 살까, 아니면 짧은 걸로 살까?"


따위다. 자연히 이보다 더 한심한 여자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대여, 우리가 먹고 자란 밥이 그런 것들도 잘 모르는 어머니의 손으로 지은 것이며, 우리가 몸을 누였던 집이 그런 것들도 잘 모르는 아버지의 수고로 지은 것임을 잊지 말자. 장자의 말을 잠시 빌려다 달리 말하면, 그런 것들은 몸에 걸칠 수 있는 옷과 같지만, 변치 않고 곁에 머무는 사람은 몸과 같다. 옷이야 헤지면 갈아입을 수 있지만 몸이 상하면 후회해도 늦는 것 아닌가.

상대를 분석해 단점을 찾아내고, 그걸 고치려 들다 보면 자신을 잊는 일이 벌어진다. 전지적 입장에서 상대를 바꾸려 들고, 불평만 하게 되는 것이다. 가난한 가족에 비유하자면, 부모의 통장이 가벼운 것에만 한탄하지 제 능력 없음을 돌아보지 않는 것과 같다. 땀 흘려 돌밭에다가 집을 세운 사람도 있는데, 누구는 지붕 얹기가 귀찮다며 비 새는 걸 탓하고만 있다. 상대가 노력하면 분명 더 나아질 수 있다고 그대가 믿고 있는 것처럼, 그대 역시 배워라, 고쳐라 하며 잔소리만 하지 않는 '더 나은 남자'가 될 수 있는 것 아닐까.


언젠가 한번은 꼭

'아…, 그때 그녀는 이런 나 따위를….'


하며 후회하는 순간이 찾아 올 것이다. 그녀를 유기하기 전이든, 유기한 후든 말이다. 좇던 것의 허무함을 경험하거나, 삶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 분명 그런 후회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내 모난 모습을 온몸으로 감당하면서도 상대가 옆에 있어 주었다는 걸, 깨닫게 될 테니 말이다.

봄쯤 하기로 계획된 유기를 시행하기 전까진 '내가 그녀에게 노력하라고 말했던 것만큼 나는 최선을 다 했는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길 바란다. L씨는 "그녀와 연애를 하는 게 아니라, 육아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라고 말했지만, 내가 보기엔 L씨가 그녀를 사육하려 드는 것으로 보인다. 강아지에게 몇 가지 재주 가르치듯 그녀를 대하지 말고, 우선 '한 사람'으로 존중하며 대하길 권한다.

자 그럼, 다들 얼음을 녹일 만큼 뜨거운 불금 보내시길 바라며!



▲ 네이버 아이디가 해킹당해 바로 비밀번호 바꾸었습니다. 충격과 공포네요.
앞으로 도착하는 사연은, 메일을 백업받아 PC에 저장하고 웹에서는 삭제하겠습니다.
여기저기 제 아이디로 광고글이 올라간 건 확인하고 모두 지웠는데,
혹 제가 발견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댓글로 남겨주시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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