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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만든 문양(physiogram) 찍으며 놀기

by 무한 2013. 6. 22.
빛이 만든 문양(physiogram) 찍으며 놀기
이거 찍는 건 진짜 별 것 아닌데, 마음에 드는 LED제품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물론, 전선과 저항, 그리고 LED전구를 구입해서 만드는 방법도 있지만, 그럼 또 집에서 납땜질도 해야 하며, 가까운 곳에 철물점이 없는 까닭에 부품을 구입하려면 일산까지 나가야 했다.

'그래! 인형뽑기 보면 LED 열쇠고리가 있잖아! 그걸 뽑아서 사용하자!'


나름 현명한 선택이라 생각했다. 인형뽑기 기계 앞에서 주머니가 가벼워지기 전까진.

인형뽑기 기계는 많이 바뀌어 있었다. 예전처럼 누워 있는 제품들을 집게로 집어 올리는 방식이 아니었다. X축과 Y축을 계산해 한 방에 밀어 떨어뜨리는 방식이었다. 정확히 계산을 했다 하더라도 기계의 미는 힘은 약했고, 내가 뽑고자 하는 제품들은 나오지 않았다. 천 원짜리를 넣으면 한 판, 오천 원짜리를 넣으면 여섯 판인데, 대충 두 번 정도 하면 뽑을 거라 생각해 천 원짜리로 승부를 걸었다. 바보 같은 짓이었다.

만 원쯤 잃고 나서 생각했다.

'저건 설계를 해서 뽑아야 해. 우선은 옆을 밀어서 측면을 향하게 하고,
측면을 향한 물건의 중심부를 밀어서 떨어뜨리는 거야.'



내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난 밤마다 담배를 사러 간다는 핑계로 동네 뽑기 기계를 순회했다. 지나다가 다른 사람들이 옆으로 돌려놓은 물건이 있으면 즉시 돈을 넣고 뽑았다. 마스크, 호신봉, 휴대용 전등, 라이터…. 집에 쓸모없는 물건들이 늘어가기 시작했다.

'잠깐만, 난 LED 열쇠고리를 뽑으려고 했었잖아….'


정신을 차리고 다이소로 향했다. '왜 진작 이 생각을 못 했을까. 서민의 축복 다이소가 있는데.'라며 LED제품을 둘러봤다. LED 열쇠고리는 없었다. 작은 손전등이 있었는데, 그걸로도 찍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우선 구입했다.




▲ 작품명 <둥지>


내가 계획했던 모양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처음으로 찍은 physiogram치고는 괜찮았다. 새 둥지 안에 백열등을 밝힌 모양이라 작품명을 <둥지>라고 정했다.




▲ 작품명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손전등을 돌릴 때 한 방향으로 힘을 더 주어 돌렸더니 위와 같은 모양이 나왔다. 작품명을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한 건, 별 것 아닌 사진이고 누구나 다 찍을 수 있는 사진이지만, 여하튼 해봐야 경험이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본인의 실력은 제자리에 있는데 눈만 높아질 수 있는 것 중 대표적인 게 '사진'이다. 움직이지 않으면 입으로 사진을 찍는 일에 익숙해지고, 내밀만한 사진 한 장 없으면서 사진계의 원로가 된 듯 행동하게 된다.

"초접사? 그거 그냥 링플래시랑 접사랑 있으면 누구나 다 찍는 건데 뭐."

초접사 사진을 찍어본 적도 없으면서 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아는 것'과 '해본 것'의 격차가 벌어지지 않도록, 차곡차곡 찍어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작품명 <실마리>


다이소에서 산 손전등으로 찍은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아 다른 제품을 인터넷에서 주문했다. 파티용품을 파는 쇼핑몰에서 손가락에 끼워 밝힐 수 있는 '손가락 LED 라이트'를 팔고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쇼핑몰 사장의 마인드가 특이했다.

"라이트는 한 팩에 네 개 들어있고, 가격은 천오백 원 입니다.
그런데 이게 라이트 중에 빛이 나오지 않는 것들이 종종 있습니다.
제품 자체의 불량인 건데, 그걸 이해해 주실 수 있는 분들만 구입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른 곳과 비교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거, 안에 들어 있는 전지 값도 안 되는 가격입니다.
교환이 안 되니, 구입하실 분들은 넉넉히 구입하시길 권합니다.
여기서 네 팩 사도 다른 곳 한 팩 가격보다 쌉니다."



두 팩을 주문했다. 다행히 내가 받은 라이트는 모두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다만, 손가락에 걸도록 장착되어 있는 고무가, 잡아당기자 부스러져 버렸다. 어차피 난 실에 매달아 쓸 거니까, 뭐.




▲ 작품명 <냉정한 현실>


손가락 라이트 두 개를 동시에 돌려 보았다. 빨간색 라이트가 중간 중간 끊긴 게 보이는데, 접촉불량이라서 그렇다.

"실제로 보면 예쁠 것 같아요!"


전혀 예쁘지 않다. 불 다 끄고 홀로 방 안에 앉아 LED 라이트 흔들리고 있는 걸 보고 있으면, 정신병에 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셔터가 열린 30초 동안 나는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본다.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응?)




▲ 작품명 <Man of Steel>


모양이 'S'자와 비슷한데다 얼마 전 <맨 오브 스틸>을 보고 온 까닭에, 작품명을 저렇게 정했다. 짧게 영화 감상평을 적자면, 스포츠카 조수석에 타고 신나게 달린 뒤 내린 느낌이다. 어딜 갔다 왔는지, 운전을 누가 했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나저나 <레미제라블> 보고 난 이후, 러셀 크로우 얼굴만 보면 자꾸 노래 부를 것 같아서 혼자 긴장한다.




▲ 작품명 <레이스 티코스터>


모양이 털실로 목도리를 절반가량 짠 것 같기도 하고, 레이스 티코스터의 모양 같기도 해서 작품명을 저렇게 정했다. 티코스터 얘기를 하니까 갑자기 레몬차가 먹고 싶어져서 레몬차를 한 잔 타왔다.




▲ 작품명 <태양도 수명이 있다면서요?>


초등학생 시절, 태양에도 수명이 있다는 글을 읽고 충격을 받았다. 태양이 사라진다니. 태양의 수명은 약 100억 년이며, 현재 태양은 50억 년 정도를 살았다고 한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 태양이 사라질 일은 없지만, 언젠가 저 태양도 식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 글을 읽은 게 초등학교 1학년 때인가 그랬는데,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허무함이 찾아왔던 기억이 있다. 태양이 수명을 다하면, 호랑이가 남긴 가죽이든 사람이 남긴 이름이든 다 부질없는 것 아닌가.




▲ 작품명 <The Abyss>


'제임스 카메론'의 영화를 보며 유년기를 보냈다는 건 축복이다. <터미네이터>와 <에일리언>도 재밌지만, <어비스>라는 영화는 나로 하여금 한동안 '정말 바닷속에 저런 게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위의 사진이, 그 영화에서 사람 얼굴로 변하던 심해생물체와 닮았기에 <The Abyss>라는 제목을 붙였다. 최종심에 올랐다가 밀린 또 다른 제목은 <해파리>다.


사실, 이 시리즈는 LED 라이트를 하나 제작해서 더 찍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배희여사(ebay)에게 주문한 물건들이 오지 않았고, 그러던 중 시간이 촉박해져 일단 올리게 되었다. 때문에 애정이 생기지 않는 사진들도 몇 장 섞여 있다. 주문한 물건이 도착하면, 업그레이드 된 궤적 사진을 한 번 더 찍어 올릴까 한다.

80일 프로젝트가 이제 62일 남았다.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이것으로 난 3주차 계획까지 완료했다. 무슨 핑계가 있든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니까 했냐, 안 했냐.'로만 단순하게 스스로를 평가해야 다음 발걸음을 내 딛을 수 있는 것 같다. 누구나 그간 '흐지부지'는 많이 해 봤을 테니, 이번만은 80일, 억지로라도 가보자. 함께!




▲ 큰 크기의 사진들은 노멀로그 갤러리(http://normalog.blog.me)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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