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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의 출사표 (어느 날 회사를 나오면서)

by 무한 2009. 8. 25.
커서 코끼리가 되거나 작가가 되거나 둘 중 하나는 꼭 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수염이 부러워 솜털 난 맨살에 면도기 긁어대던 열 몇살 쯤이지만, 고등학생때 신춘문예로 등단해 천재작가 소리 한 번 들어 보려했던 계획은 시월만 되면 도지는 일탈의 버릇 덕분에 원고 한 번 보내보지 못한 채 막을 내렸고, 군대를 다녀와 직장인 놀이를 하며 근근히 블로그에 글 몇 줄 올리는 것으로 목을 축이고 있었다.

직장생활의 애환이야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니 입아프게 더 이야기 할 것도 없고, 회사를 그만두는 마당에 그런 이야기를 꺼내면 차가운 농촌남자답지 않으니 생략하기로 한다. 영화 <비치>에서 디카프리오가 폭포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을 보다가 생각했다. 그래, 젊으니까 가능하다. 

나는 젊음이라는 칼 하나 차고 전장을 누비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제 말 타고(응?) 나가기 전 잠시 몸을 담고 있던 것들과 작별을 한다. 제갈량의 <전출사표>를 마음껏 각색하여 내 놓는 글이니 한자와 한글 사이엔 별 관련이 없음을 미리 밝힌다. 한자로 된 부분은 제갈량의 전출사표 원문이며, 한글로 된 부분은 무한의 출사표이다.


先帝創業未半, 而中道崩 , 今天下三分, 益州罷 ,

회사에 들어온 뒤 매출은 아직 허리에도 미치지 못하였는데 주주들은 상여금을 탐하고, 성수기를 맞아 잠시 오른 매출에 잔치를 벌이고 있으니,



此誠危急存亡之秋也. 然侍衛之臣, 不懈於內, 忠志之士, 忘身於外者,

이는 진실로 위급하여 내일이 보이지 않고 모레도 보이지 않는 때입니다. 여태껏 그만두지 않고 묵묵히 출근하며 기름값 빼면 차라리 동네에서 알바하는 것이 나은 회사를 다녔던 것은,



蓋追先帝之殊遇, 欲報之於陛下也. 誠宜開張聖聽, 以光先帝遺德,

전역 후 처음 들어온 회사를 조금이나마 키워 보고자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무실에서 일하면 노는 줄 아는 현장의 시선과, 회사가 부유하면 모두의 노력이요 부진할땐 사무실의 책임이 되는 것,



恢弘志士之氣, 不宜妄自菲薄, 引喩失義, 以塞忠諫之路也.

웹디자이너로 들어왔지만 현장 일을 도와주다보면 내 일이 되 버리고, 앞선 직원이 퇴사하면 그 일까지 다 떠맡지만 그에 대한 보상은 없고, 무엇보다 어깨동무하고 일단 벌자고 하는 것.



宮中府中, 俱爲一體, 陟罰臧否, 不宜異同. 若有作奸犯科及爲忠善者,

주주와 사원이 별개라면 일단 매출부터 늘리라고 해서는 안될 것이요, 만일 매출이 늘어 직원에게까지 그 이익을 나눠줄 생각이 있는 것이라면



宜付有司, 論其刑賞, 以昭陛下平明之理, 不宜偏私, 使內外異法也.

마땅히 회사 규칙으로 정하거나 매번 말로만 얘기했던 쇼핑몰 인센티브제를 직접 만들어, 회사 잘 되면 준다고 훼이크만 치는 것이 아니라 통장의 숫자로 신뢰를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侍中侍郞, 郭攸之.費褘.董允等, 此皆良實, 志慮忠純, 是以先帝簡拔,

현재 무리하게 취급점이나 판매점을 늘리는 방도 대신 직판의 형태로 나아가야 합니다. 당장은 판매점의 개설비용으로 본사에 돈이 될 지 모르나



以遺陛下. 愚以爲宮中之事, 事無大小, 悉以咨之, 然後施行,

결국은 마진을 나누어주는 곳이 많아 대량생산이 불가한 주문제작업체에서는 한정된 매출에 발목을 잡히게 될 것입니다



必能裨補闕漏, 有所廣益. 將軍向寵, 性行淑均, 曉暢軍事, 試用於昔日,

개설된 판매점 측에 매출이 많다면 야근까지 해서라도 맞출 수 있겠지만 현재와 같은 상황이라면 본사 직판도 판매점들의 반대로 불가하며 서로의 목을 쥔 채 둘 다 굶는 싸움이 될 것입니다



先帝稱之曰..[能]. 是以衆議擧寵爲督. 愚以爲, 營中之事, 事無大小,

직판해서 얼마나 팔겠냐고 하시지만 개인의 공방도 충분히 먹고 살 정도가 되며, 개인 공방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좋은 시설을 갖춘 이곳에서 만들어 팔면 매출 역시 그보다 월등할 것입니다



悉以咨之, 必能使行陣和睦, 優劣得所也. 親賢臣遠小人,

온라인을 통한 대대적인 홍보는 회사를 차고 넘치게 할 것입니다. 광고비가 아깝다고 시행하지 않는 것은 대형마트가 스스로 구멍가게가 되길 자처하는 모양입니다. 



此先漢所以興隆也, 親小人遠賢臣, 此後漢所以傾頹也. 先帝在時,

몇 개월이라도 앞을 내다본다면 박스에 회사 로고를 찍는 일이나 광고를 하는 일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중국제와 묻지마 물건들이 판치는 이 때에



每與臣論此事, 未嘗不嘆息痛恨於桓靈也. 侍中尙書.長史.參軍,

무작정 고가정책을 펴는 것은 비오는 날 우산 없이 먼 길을 떠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도 굳이 고가정책을 펴시려거든 저렴하다는 이유로 폐박스에 포장해서 보내진 말아야 합니다



此悉貞亮死節之臣也. 陛下親之信之, 則漢室之隆, 可計日而待也.

나가는 물건 하나 하나가 회사를 대표하는 것입니다. 하나 팔고 말 것이 아니라면, 그만큼의 값어치가 있는 물건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판매 후 관리도 철저해야 합니다.



臣本布衣, 躬耕南陽, 苟全性命於難世, 不求聞達於諸侯,

물건을 본사 차량이 아닌 화물 차량으로 내려보내고, 화물 기사는 설치까지 담당한 것이 아니라고 고객의 집앞에 덩그러니 물건만 내려놓고 간다면



先帝不以臣卑鄙, 猥自枉屈, 三顧臣於草廬之中, 諮臣以當世之事.

제 집에 온 물건이라도 당장 반품을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물건에만 자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판매에는 서비스가 뒤따라 한다는 것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由是感激, 許先帝以驅馳. 後値傾覆, 受任於敗軍之際, 奉命於危難之間,

타사의 물건이 형편 없다고 제작자의 입장에서 이야기만 할 것이 아니라, 그 물건이 왜 많이 팔리고 제작자가 보기엔 형편없는 물건이라도 소비자들이 왜 찾는지



爾來二十有一年矣. 先帝知臣勤愼. 故臨崩, 寄臣以大事也. 受命以來,

그 이유를 알고 배워야 할 것입니다. 또한 신제품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는 것에 대해 제작 비전공자라고 해도 그 의견에 귀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夙夜憂慮, 恐付託不效, 以傷先帝之明. 故五月渡瀘, 深入不毛.

웹에서 잘 나가는 물건이나 신제품의 추세를 살펴보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 처럼 보일지라도 현재 유행을 읽는 작업이며, 회사의 성장을 위한 것이지 해하려는 목적이 아님을 살피셔야 합니다



今南方已定, 兵甲已足, 當奬率三軍, 北定中原, 庶竭駑鈍, 攘除姦凶,

제작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면, 그저 제작자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반대는 아무 도움도 되질 않습니다. 또한 대표라면 책임감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以復興漢室, 還于舊都, 此臣所以報先帝, 而忠陛下之職分也.

홈쇼핑 카달로그 참여시 대표의 승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출이 기대 이하로 나오자 모든 책임을 담당자에게 돌리는 것은 바람직한 대표의 모습이 아닙니다



至於斟酌損益, 進盡忠言, 則攸之.褘.允之任也. 願陛下,

그 담당자는 회사를 나간지 오래지만, 결과가 좋지 않은 다른 일들에 대해서도 모두 그 담당자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대표의 덕을 잃게 할 것입니다



託臣以討賊興復之效, 不效則治臣之罪, 以告先帝之靈.

다른 곳에서 입사를 권하는 요청이 많았으나 이곳보다 훨씬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곳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지 않았던 이유는, 돈을 따라 움직이지 않겠다는 신념이 첫째이며



若無興德之言則責攸之.褘.允等之咎, 以彰其慢. 陛下亦宜自謀,

회사를 함께 키워보자는 약속과 첫 마음을 간직했던 것이 둘째입니다. 그만두겠다 마음을 먹은 것도 돈 때문이 아니니 월급을 아무리 올려주신다 해도 마지막이라 생각하는 마음을 돌릴 수 없습니다



以諮諏善道, 察納雅言, 深追先帝遺詔. 臣不勝受恩感激, 今當遠離,臨表涕泣, 不知所云.

눈 앞의 이익에 태만하지 않고, 처음 말과 끝 말도 같아야 할 것입니다. 그동안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격을 이기지 못하는지라, 지금 멀리 떠나게 됨에 표에 임하여 눈물이 나서 말할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내일부터는 파지를 주으러 나가야 할지 모르는 생활고가 뒤따르겠지만 더 훗날 처자식을 돌봐야 하는 입장에서라면 꿈도 꾸기 어려울지 모르는 퇴직을 결심했다. 회사에 이야기를 한 지는 보름이 다 되어가고, 나에게도 말년 병장의 마음이 찾아오지만 내일부터는 다시 이등병의 마음으로 열심히 글을 쓸 생각이다.

"나도 한때는 작가가 되고 싶었지..."

보다는,

"나는 그렇게 작가가 되었지"

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날이 한 발짝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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