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마지막 판 왕처럼 생긴 녀석이 소리쳤다.
'이자식.. 생긴 것과 다르게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어..'
아들의 얼굴을 본 아줌마는 "어머,어머"를 연발하더니 괴성을 지르며 한 손에는 장지갑을 든 채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리곤 금방이라도 장지갑으로 후려칠 기세로 소리쳤다.
"누구야!, 누구냐고!, 누가 우리애를 저렇게 만들었어! 어? 누구야!"
흥분한 아줌마를 보며 마음속에서 꿈틀대는 개그본능이 "그게 바로 접니다" 같은 대사를 골라내고 있었지만, 입 밖으로 꺼냈다가는 내일자 신문에 <경기도 일산의 한 고등학생, 파출소에서 장지갑에 맞아 혼수상태> 같은 헤드라인이 뜰 것 같았다. 우리가 모두 시선을 피하자, 아줌마는 경찰에게 따지듯 묻기 시작했다.
"아니, 도대체 왜 그랬데요? 네? 어떻게 사람을 저지경으로 만들어요. 네? 가만있어봐, 나 이거 그냥 못 넘어가"
그리곤 어디론가 전화를 하려는 찰나, 쿨한 경찰이 대답했다.
"아주머니 아들이 먼저 얘 동생 돈을 뺏었대요. 그래서 돈을 찾으러 갔다가 싸움이 붙었고, 아까 여학생들이 신고해서 다 파출소로 데려온 거에요"
"무슨 돈을 뺏어요? 우리 애가 뭐가 아쉬워서 돈을 뺏어요."
"돈 뺏은 건 다 인정 했어요"
"아니, 우리 애는 돈 뺏는 애가 아니라니까요. 용돈도 달라는 대로 주는데, 왜 돈을 뺏겠어요?"
아줌마는 몸을 틀어 마지막 판 왕 처럼 생긴 녀석을 돌아보며 물었다.
"너 정말 돈 뺏었어? 니가 그런거 맞아? 응? 니가 그런거 맞냐고?"
대답을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녀석을 보며 아줌마는 장지갑 든 손을 머리에 갖다 댔다. 그리곤 뭔가 생각하는 듯 하더니 다시 물약을 먹고 기운차린 전사처럼 쏘아대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렇지, 사람을 저렇에 때리는 게 어딨어요. 난 이거 정말 그냥 못 넘어가."
그리곤 우리를 돌아보며 이야기 했다.
"니들 잘 걸렸어. 콩밥 좀 먹어봐"
역시나 마음속의 개그 본능은 "현미밥은 안되겠습니까?" 라는 대사를 생각해 냈지만 말하지 않았다. 괜한 개그를 쳤다간,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줌마가 휴지에 물을 뭍혀 녀석의 얼굴을 닦아 주는 사이, 다른 녀석들의 부모님과 우리 부모님이 파출소에 도착하셨다.
"아니, 너, 얼굴이 왜이래?"
J군의 어머니는 프로였다. 멀쩡한 J군의 얼굴을 보며 "세상에"를 연발하셨고, 광대뼈까지 내려온 J군의 다크서클을 보며 "여긴 왜 이래?"라고 묻고 계셨다. 경찰들도 의아해하는 눈치였지만, 누구 하나 대 놓고 "멀쩡한데 왜그러세요?"라고 묻는 사람은 없었다.
결혼 전 한국의 추리소설은 모두 다 읽으셨다는 우리 엄마는 냉정을 잃지 않으며 우리를 향해 탐문을 시작했다.
"쟤들이 먼저 공원에서 돈을 뺏었다고?"
"응. 전화 받고 가 보니까, 쟤들이 공원에서 술 마시고 있더라고"
"뭐? 술을 마셔? 학생이? 술 마시고 돈 뺏었다고?"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경찰이 뭔가 실마리를 찾았다는 눈빛으로 다가왔다.
"쟤들이 공원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고?"
"네"
그리곤 다시 녀석들 쪽으로 다가가 말했다.
"니들, 술 어디서 샀어?"
녀석들이 대답을 안하자 재차 같은 질문을 던졌고, 그 상황을 지켜보던 어느 아줌마가 대답했다.
"내가 줬어요."
"네?"
"술, 내가 줬다고"
"아주머니, 무슨..."
"술 내가 준거니까, 더 묻지 말아요"
누가 봐도 거짓말인 걸 아는 얘기였지만, 술을 줬다는 아줌마 말에 경찰도 더 추궁하진 않았다.
'저 아줌마.. 그림을 그리고 있어.. 이제부턴 두뇌싸움이군..'
그 후, 우리쪽에서는 '술 마시고 돈 뺏은 것'을 강조하며 이야기 했고, 상대방은 '때린 것'을 문제삼았다. 답이 없는 이야기가 길어지자 경찰이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실 거에요? 합의를 보실래요? 아니면 경찰서로 넘길까요?"
경찰의 얘기에 "애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 무슨 합의냐" 라는 주장과 "술 마시고 돈 뺏어서 정당하게 받으러 갔고, 싸우다 이렇게 된거다" 라는 주장이 엇갈렸다. 그렇게 이야기가 길어질 기미가 보이자, 다시 경찰이 입을 열었다.
"그럼, 합의를 안 보신다는 거죠? 얘들은 금품갈취로 넘길거고, 쟤들은 폭력으로 넘길겁니다. 정말 합의보실 생각이 없으신 거죠?"
아무래도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하늘색 후드티 녀석의 엄마가 입을 열었다.
"도대체 얘들이 얼마를 뺏었데요? 얼마를 뺏었길래 애를 이렇게 만들어요?"
내 인생에서 가장 난처했던 시기를 말해보라고 하면, 바로 이 순간을 이야기 할 것이다. 다행히 아까 내 진술서에 큰 관심을 보이던 쿨한 경찰은 위로가 되는 대답을 해 주었다.
"지금, 액수가 중요한게 아니잖아요"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하늘색 후드티 녀석이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했다.
"이천원..."
소변이 급해 길가에서 해결하는데 경찰이 뒤에서 어깨를 두드리는 느낌이었다.
우리쪽에 계시던 부모님들도 월드컵 한-일 전에서 일본이 역전골을 넣은 동시에 휘슬이 울렸을 때와 비슷한 표정을 지으셨다.
"우리 애들하고, 그쪽 애들하고 빨간줄 가서 좋을게 뭐가 있겠습니까, 다음부터 그러지 않도록 지들도 반성했을 거고, 여기서 마무리 집시다"
홍박사의 아버지께서 급히 상황중재를 맡으셨고, 하늘색 후드티 녀석의 엄마만 제외하면 다른 분들도 대체로 수긍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하늘색 후드티 녀석의 엄마는 포기하지 않고 질문을 더 이어갔다.
"니들 싸운거야? 아니지? 응? 니가 맞은거지?"
모두의 이목이 하늘색 후드티 녀석의 입으로 집중되었다. 녀석은 역시나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술 취해서.. 생각이 안나..."
녀석의 그 아름다운 발언을 들은 아줌마는 '내가 이 색히 낳고 미역국을...' 이라고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고, 아름다운 발언 덕분에 우리는 파출소에서 나올 수 있었다.
부모님들끼리 인사를 나누며 파출소 바깥에서 어수선한 시간을 잠시 갖고 있을 때, 뒤 따라 나오던 마지막 판 왕처럼 생긴 녀석이 나에게 소리쳤다.
"야, 스무살이라매? ㅅㅂ 스무살이라매?"
녀석의 부모님이 그만하라고 녀석을 만류했고, 난 웃으며 대답해 줬다.
"응. 내년에 ㅋ"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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