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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한 청년과 막장 아저씨, 복도에서 마주치다

by 무한 2010. 2. 24.
늘 얘기하지만, 우리동네는 살아있다. 얼마 전 떠들썩했던 '알몸졸업식'의 현장이 우리집에서 오분 거리라는 것 까지 밝히지 않아도 이전 글 [공원에서 돈 뺏긴 동생을 위한 형의 복수] 라든가, [내 차를 털어간 꼬꼬마에게 보내는 글] 등으로 이미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내가 사는 아파트의 같은 복도를 공유하는 이웃 중, 가장 유명한 분을 소개하자면 위층에 살고 있는 오십대의 김창식(가명, 50대로 추정)씨다. 그가 밤마다 집 앞 주차장에서 외치는,

"세상이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냐?"

라는 대사는 수 많은 함축적 의미들을 담고 있으며 철학적 고찰이 담긴 문장이다. 행위예술을 전문으로 하는지 귀가 후에는 집에 있는 가구 및 집기들을 모두 꺼내 확인하며, 얼마 전에는 압력밥솥을 바깥으로 던져 주차되어 있던 차가 요란하게 울기도 했다.

내가 이사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올라가서 말리려던 적이 있었다.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고 현관문을 열려고 한 순간, 김창식씨의 부인이 맨발로 뛰어내려오는 것을 보곤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던 기억이 난다. 그 날 김창식씨는 1층까지 내려가며 복도의 유리를 모두 깨부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김창식씨의 부인이 돌아와 그 유리 파편들을 정리하는 소리가 났다.

아무튼, 김창식씨의 소개는 이쯤하고,

한달 전 쯤부터 아래층 복도에서 누군가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층간에 있는 유리문을 열지도 않고 담배를 피운 뒤 바닥에다 꽁초를 그대로 버려두는 일이 계속 벌어졌다. 복도에 담배연기는 가득차고 바닥에는 침과 담배꽁초가 늘어갔다. 누군가 '흡연금지'라고 써 놓은 A4용지를 붙여놓기도 했지만 우습다는 듯 그 종이에 담배를 비벼끈 흔적을 남겨놓았다.

오래가지않아 그 주인공이 2층에 사는 청년이라는 것이 밝혀졌지만, 누구 하나 나서서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 청년을 직접 목격했다는 주민은, 그가 온 몸에 문신을 하고 있으며 한쪽 팔에 깁스를 하고 있고, 한 마디 하려고 얼굴을 봤는데, 그 눈이

"사람 죽일 것 같은 눈까리여."

라는 말을 했다. 물론 나와 마주쳤다면, 반항하는 순간 녀석은 성인남성 치아가 몇 개인지 확인하게 되었겠지만(응?), 나는 밤에 글을 쓰고 낮에 자니, 마주칠 일이 없었다. 새벽에 내려가서 뭐라고 하는 것도 좀 실례고, 아침에 뭐라고 하면 상대가 하루종일 기분 나쁠 것 같기도 해서, 뭐, 난 젠틀맨이니까, 아무튼. 그러던 어느날.


김창식씨가 세상에게 "다 족구하라(X까라) 그래." 라며 샤우팅을 치고 올라올 때, 녀석과 김창식씨의 숙명적인 만남이 이루어 진 것이다.

"야 임마. 너 무어야(뭐야)."

주변의 공기를 제압하는 김창식씨의 일갈이 들렸을 때, 난 사건이 일어났다는 걸 알았다. 그 사자후에 동네 비둘기들의 심장이 얼어 붙었고, 난 현관문으로 다가갔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다으야?(다야?)"

"죄송합니다."


김창식씨의 사자후에 녀석은 일단 사과를 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중저음의 목소리엔 범상치 않은 공력이 담겨 있었고, 김창식씨가 첫 초식 후 별다른 얘길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녀석의 문신을 보고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것을 느낀 것 같았다. 궁금해서 견딜 수 없던 나는 연위갑(황용의 보호갑옷) 같은 깔깔이를 입은 뒤, 사건의 현장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목소리로는 매일 만나던 김창식씨와 흔적만 접하던 녀석을 직접 만나는 순간이었다.

실제로 본 김창식씨는 붉은 얼굴에 튀어나올 것 같은 눈, 곰의 허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깁스를 한 녀석은 키가 여섯 척이 넘고 범의 어깨에 매의 눈을 가지고 있었다. 녀석의 손에서 아직도 타고 있는 담배를 보곤, 둘 사이엔 앞으로 나눠야 할 많은 이야기가 남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복도에다 이게 다 뭐하는 그어야?(거야?)"

"예, 죄송합니다."


"동네 사람들 한테 피해주고 뭐하는 그어야?(거야?)"


사실, 김창식씨가 할만한 대사는 아니었다고 생각하지만, 일 대 일의 다툼이 아니라 동네사람 대 녀석의 문제로 몰아간 것은 김창식씨의 연륜이 만들어 낸 훌륭한 공격이라고 생각했다. 무슨 일인가 궁금한 사람들이 하나 둘 복도로 모여들었다.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을 본 녀석은 자신이 불리한 상황이라는 것을 느꼈는지 담배를 들고 서둘러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갑자기 도망간 상대를 향해 김창식씨는 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다.

"야아, 인마, 이거 다 치워. 야, 나와, 안 들려?"

"......"


"나오라고 인마, 이 색끼 동네 사람들한테 피해를, 이 색끼, 야"

"......"


"너 인마, 아주 오늘 잘 걸렸어, 내가 너 한 번 잡아서 아주 혼을 내줄라고, 이 색끼"

"......"


"나와, 나와서 다 치워. 아주 너 그냥 아주."

"......"


녀석의 현관문은 굳게 닫혀있고, 김창식씨의 사자후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사람들은 하나 둘 집으로 들어갔다. 나도 김창식씨가 녀석에게 화를 내는 건지 세상에게 화를 내는 건지 주어가 자꾸 바뀌는 사자후가 지겨워 집으로 돌아왔다. 김창식씨의 씨끄러운 공격이 계속되자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저씨, 좀 조용히 좀 합시다."

"내가 왜에?(왜?)"

"씨끄러우니까 그만 하시라구요. 지금이 몇 신데..."


"몇 신데?"

"그만 하시라구요."


"몇 시냐고?"

"아휴..."


김창식씨를 말리러 온 다른 남자는 김창식씨의 얼토당토 공격을 받곤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그것은 위층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릴 때 마다 김창식씨가 자주 쓰는 무공이었다.

뭐? 어? 뭐? 그래서? 뭐? 왜? 뭐? 그런데? 뭐?

녀석의 집 앞에서 떠드는 것에 김창식씨도 지쳤는지 계단을 하나씩 오르기 시작했다. 2층에서 4층까지 올라가는 데 30분 가량의 시간이 걸렸다. 중간에 노래를 두 곡 불렀고 들고있던 봉지를 떨어뜨려 우리집 앞에서 소주병이 깨졌으며, 세 번 정도 넘어졌고 한 번의 통화를 했다.

자신의 집 앞에 도착했는지 띡띡띡띡띡띡띡, 번호키 누르는 소리가 났고, 탁탁팍, 번호가 틀렸는지 커버를 부서트릴 듯 닫았다 올리는 소리가 들렸다. 띡띡띡띡띡띡띡, 탁탁팍, 이런 씨, 띡띡띡띡띡띡띡, 탁탁팍, 이 상황이 계속 반복되었고, 김창식씨가 분명 옆집에서 잘못 누르고 있으며 그 집엔 아무도 없는데 저러다 번호키만 고장낼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경찰이 왔다.

아까 그 다른 남자가 신고를 한 걸까. 두 명의 경찰이 다가오자 김창식씨는 더이상 번호키 커버를 세게 닫지 않았다. 띡띡띡띡띡띡띡, 흐흠, 띡띡띡띡띡띡띡

"아저씨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단전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엄있는 경찰의 목소리였다.

"나?"

역시, 김창식씨는 얼토당토 신공을 펼치며 운기조식을 했다.

"여기 아저씨 댁 맞아요?"

"뭐?"

"여기가 아저씨 집 맞냐고요."


"차암나."


띡띡띡띡띡띡띡, 문은 열리지 않았다.

"아저씨 집이 어디에요?"

"뭐?"

"집이 어디냐구요."


"여기다. 왜? 가라."

"아저씨, 자기 집 문도 못 여는 사람이 어딨어요?"


"가라고. 할 일 없어?"

"신고가 들어와서 온 거 잖아요. 집이 어디에요?"


"그냥 가라고. 가. 가. 그냥 가라고."

"이 아저씨 안 되겠네."


난 김창식씨가 곧 경찰들과 함께 가게 될 거라 생각하곤 배웅을 해 주기로 했다. 문을 열고 층간 창문 있는 곳 까지 올라갔다. 경찰들을 밀며 계속 가라는 얘기를 하는 김창식씨. 어? 그런데,

'저 집 맞는데?'

김창식씨가 서 있는 곳은 김창식씨의 집 앞이었다. 그럼 단순히 번호를 틀려서 문을 못 열었던 것인가. 그 집이 맞다고 말해주려다가 그만두었다. 김창식씨의 입장에서도 안면없는 이웃이 자신의 집까지 알고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요태까지 날 미행한고야?" 라고 물을지도 모르고 말이다. 마침 경찰이 현관문을 두드리기 시작했으니 우선 지켜보기로 했다.

"계세요?"

"......"

"문 좀 열어 주세요."


"......"

"아무도 안 계세요?"


"......"

"계세.."


철컥, 문이 열렸다. 아무 대답이 없다가 갑자기 문이 열리니 경찰들도 당황하는 듯 했다. 나 역시 왜 이 긴 시간동안 문을 열지 않았는지 궁금했다. 잠시 멍하니 있던 경찰이 입을 열었다.

"이 분 여기 사시는 분이세요?"

"......네."


"......"


"현철아빠, 들어와."


"......"


"......"


"왜 문을 안 열어 주셨어요?"


"......"


"아니, 왜 문을... 아저씨, 들어가세요."


바로 그 순간, 김창식씨의 눈이 빛났다.

"나 잡아가라."

"네?"


"나 좀 잡아가."

"들어가세요."


"나 안들어가."

"아주머니, 아저씨 데리고 들어가세요."


"나 잡아 가라고. 나 잡아가."

"얼른 들어 가세요."


담배를 피고 들어간다느니, 얘기 좀 하자느니, 길고 긴 실랑이 끝에 김창식씨는 경찰들에게 들려 집 안으로 옮겨졌고, 경찰들은 어떻게든 나오려고 발악하는 김창식씨를 막으려 문을 온 몸으로 막고 있다가 잠잠해지고 나서야 돌아갔다. 나도, 집으로 돌아왔다.

얼마나 싫었으면 그랬을까. 지옥같은 생활이 싫어 김창식씨의 부인이 문을 잠궜던 거란 생각이 들었다. 집안의 집기를 꺼내 부수고, 욕을 하고, 깨고, 소리지르는 것이 무서웠을 것이다. 두 사람도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이 있지 않았을까. 도망가거나 문을 잠그는 것이 아니라, 남편의 귀가를 기다리던 때가 있진 않았을까. 연재중인 연애매뉴얼의 주제를 자꾸 커플의 이야기로 잡게되는 이유다.

어쨋거나 그 일 이후 아래층 녀석은 복도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게 되었고, 김창식씨 가정의 다투는 소리는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그 일을 글로 적어두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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