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린터가 또 바코드를 찍어내기 시작했다. 분명 한글로 된 문서의 인쇄버튼을 눌렀는데 프린터만 알아볼 수 있는 바코드로 변환되어 나온다. 그리고 여지없이, '카트리지 이상'의 주황색 램프가 점멸한다. 건드리지 않아도 혼자 빙의되어 움직이던 마우스를 보고 있던 때의 느낌이 살아난다. A/S문의를 하면 상담원이 아래와 같은 이야기를 할 것이다.
뭐, 그들도 이런 이야기 밖에 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응급처치 후 같은 증상이 계속되면 A/S예약을 해 드리겠다는 그런 얘기. 낯설지가 않다. '내일 아침에 고객센터로 전화해 A/S예약 접수나 해야지.' 라고 생각하는데 인터넷 집전화 전화기의 5번 버튼이 잘 안 눌린 다는 게 생각난다. '뭐, 핸드폰으로 걸면 되는 거지.'라는 생각을 하고 음악이나 들으려 이어폰을 끼는데 삽입형 이어폰의 고무 부분이 툭, 떨어져 나간다.
니들, 혹시 A/S로 내 인생을 좀 먹을 작정이라도 한 거냐?
고등학생 때 였다. 지금은 mp3플레이어 기능이 핸드폰에도 들어가 있지만, 당시엔 대부분 '워크맨'이나 'CD플레이어'를 들고 다녔다.
"삼촌 어렸을 때에는 인터넷이 없었다고?"
이렇게 묻는 조카 또래들은 국사시간 청동거울 얘기듣는 느낌이겠지만. 아무튼 난 일생일대의 큰 결심을 했고, 카세트에 mp3플레이어 기능이 합해진 최신형 워크맨을 구입했다.
떨리는 가슴으로 설명서를 3회 정독하고 열심히 조작했지만 mp3플레이어는 작동하지 않았다. A/S를 받을까 하다가 스피커 선을 꽂지 않고 소리가 안 난다며 A/S기사를 불렀다는 유머가 유행할 때라, 하루를 더 mp3기능을 사용하기 위해 워크맨을 붙잡고 있었다. 물론, 그 다음 날도 작동하지 않았다.
서비스센터를 찾았을 때, A/S기사는, 웃지 않는다고 며칠 전 심하게 혼이라도 난 듯 부담스럽게 계속 미소를 지으며 날 맞이해줬다. 날 어지럽게 만드는 '네~ 고객님~'이나 '고객님의 제품은~' 같은 얘기를 하며, 고등학교 1학년 학생에게 어른이 된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고객님이란 거... 좋은 거구나.'
친절한 상담 끝에, 기판이 잘못 되어서 수리를 했다는 얘기를 들었고 투명에 가까운 블루 플라스틱 속으로 mp3칩이 보이는 워크맨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당시 제일 좋아하던 2pac의 <I ain't mad at cha>라는 노래를 넣으려고 밤을 샜지만, 실패했다. 며칠 후 A/S를 한 번 더 받았지만, 역시 실패했다.
그닥 집요한 성격이 아니라 쿨하게 mp3기능을 포기하고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다. 일년이 지났을 뿐인데 mp3cd 플레이어를 대부분 하나씩 들고 다녔을 정도로 세상이 성큼, 발걸음을 내 딛었으니 늘어난 테잎을 냉동실에 넣는 일 따위를 하며 잊고 있었다.(이렇게 하면 늘어난 테잎이 다시 원상태로 돌아온다는 얘기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듣고 싶은 노래 파일을 얻게 되었고, 그걸 들으려면 mp3cd 플레이어나 mp3 플레이어가 필요했다. 내 워크맨에도 mp3 플레이어 기능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서비스 센터를 찾았을 때, 여전히 친절한 A/S기사가 웃으며 말해줬다.
내 인생과 A/S의 궤도가 최초로 엇갈린 순간이었다.
성인이 된 후로 구입하는 물건들이 많아지며, 늘 그림자처럼 A/S가 따라다녔다. 나는 기계와 연관해서는 재수가 좀 없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대부분 구입해던 물품들이 '특별한 경우'를 만들어 냈다. A/S기사들 조차도,
이런 이야기를 할 정도로 많은 에피소드가 있었다. 집에서 핸드폰 신호가 잘 잡히지 않아 중계기를 설치했을 때, 여전히 먹통인 핸드폰을 보며 설치기사는 "제 껀 잘 잡히는데... 핸드폰을 바꿔보세요." 라는 얘기도 했고, 컴퓨터 수리점에서는 "이건 왜 그런지 저도 모르겠네요." 라는 말도 들었다. 인터넷 접속 문제로 우리집을 찾았던 기사는 "계속 방문해도 상태가 그대로네요. 해지해도 위약금 안 무실 거예요." 라는 얘기를 해 주었다.
어쩌면 초자연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A/S불가의 상황을 겪으며, 나는 나와 비슷한 A/S피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난 뽑기 운이 없다."라는 좌우명을 가지고 있었으며, 로또만큼의 확률로 불량품이나 이상제품에 당첨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로또에 당첨된 사람들은 꿈이라도 꾸었다지만, 이들에게는 그저 막연한 "설마 이번에도..." 같은 염려가 전부였다. 그리고 그 예상은 틀림없고 말이다.
나 역시 A/S를 거듭하며 복근이 단단해 졌다. 컴팩트 디카를 샀는데 동영상 촬영이 안 되었을 땐, 뭐 그럴 수도 있다며 너그럽게 넘어갔고, SD카드(카메라메모리)이상으로 찍은 사진에 줄이 쫙쫙 가거나 USB가 곧 폭발할 것 처럼 뜨거워 지는 이상증상을 보였을 때에는 "역시 정확하군."따위의 흐뭇한 웃음까지 지었다.
지금 쓰고 있는 핸드폰의 배터리 넣는 캡을 뾰족한 것으로 벗이기 전까지는 절대 버튼만 눌러서 열리지 않는 다는 것이나, 선물받은 손목시계의 좌측 하단 버튼이 다른 버튼과 달리 손톱까지 사용해 힘껏 눌러야 작동하는 것, 컴퓨터를 몇 시간 사용하면 저절로 멈추는 일이라든가(나더러 좀 쉬라고 권하는 것 같음) 이사간 집은 꼭 수압이 약한 것, 자동차의 RPM이 1단에서 미친듯이 올라갔던 일 등등 열거하자면 이 끝 없는 이상증세를 이젠 여유로운 마음으로 이해하는 단계까지 접어들었단 얘기다.
다른 A/S피플들 역시 많이 길들여 진 것으로 보인다. 카메라 렌즈가 AF를 못 잡고 계속 버벅거려도 그저 "그 품은 원래 그래요." 따위의 충고를 하는 사람도 보이고, "국산이 다 그렇죠, 뭐"라는 얘길 하는 사람도 보인다. 지구본이 국산이라 기울었다는 수십년 전의 유머가 생각나는 슬픈 일이다. 그럼 이 A/S피플들을 더 슬프게 만드는 일은 뭐가 있을까?
우선, A/S로 인해 고통받는 모든 이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한다. 혹자는 A/S때문에 발생하는 일은, 머피의 법칙과 연관된 심리적 요인이 크다고 신용카드 요금청구서 같은 얘길 하겠지만, 난 뒤로 넘어졌는데 코가 깨진 듯한 여러분들의 마음을 알 것 같다. 귀에서 뽑아내려던 삽입형 이어폰의 이음새가 힘없이 두동강 났을 때의 그 심정 말이다. 토닥토닥 하는 심정으로 몇 가지 슬픈 이야기들을 할까 한다.
A. 잘 작동하는데요?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 가? A/S기사가 방문하거나 서비스센터를 찾으면 방금 전까지 메롱상태였던 기계가 정상으로 돌아온다. 양치기 소년의 기분이 된다. 경기도 고양시에 사는 P군(31세,무직)은 이런 일을 방지하고자 서비스센터에 들어가기 전 스스로 고장을 내다 고객과실로 유상수리를 경험한 적이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B. 이런 증상은 처음 인데요?
집에서 귀신을 봤다는 사람 취급을 당한다. 귀신 얘기야 사람들이 귀를 세워 들어주기라도 하지만, 제품에 관한 이야기는 용의자 취급을 당할 뿐이다. 이젠 서비스센터에 방문할 일이 있으면 먼저 "이런 일은 처음이죠?" 라고 묻는 A/S피플도 생겨났다. 이미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는 대답을 들으면 '내가 졌군..'이라고 생각하는 부작용을 겪으며 말이다.
C. 택배로 보내주세요.
급한 일이 있어서 구입했는데 정상작동하지 않을 때, 내 경우 집에 프린터가 있지만 프린터가 인쇄할 생각을 하지 않아 PC방이나 친구집을 찾아야 하는 상황엔 여전히 울컥한다. 마우스 교체 후 예전 마우스를 버렸는데 새 마우스가 작동하지 않을 때, A/S를 받으려면 마우스 들고 찾아오거나 택배로 보내라는 얘길 듣고 주변에 남는 마우스를 구하며 역시, 울컥한다.
D. 뭐 그거 가지고 그래?
남의 이야기는 늘 쉬운 법이다. 핸드폰 충전이 제대로 되질 않아 책 사이에 끼워 놓고 각도를 맞춰줘야 깜빡임 없이 충전이 될 때, 그 불편함을 주변에 얘기하지만 속 좁은 사람 취급을 당하는 일이 있다. 인터넷이 되어야 업무를 볼 수 있는 데 서비스가 되지 않을 때, 겨우 몇 시간 접속 안되는 걸로 뭐 그렇게 성화냐는 말을 들을 때 판도라 행성으로 가고 싶어진다. 더욱 슬픈 건 A/S피플들 조차 다른 A/S피플의 일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거다.
E. 그는 왜 차를 부쉈을까?
얼마 전 차량이상으로 몇 번이나 항의했지만 별대른 대안 없이 유별나거나 까칠한 사람 취급을 당한 A/S피플이 대리점 앞에서 차를 부순 일이 있었다. 이처럼 A/S는 인생을 좀 먹는다. 더군다나 한 번 이상증상을 나타낸 기기가 아무리 A/S를 받아도 같은 증상을 반복할 때, 분명 그 당사자의 정신은 피폐해진다고 생각한다.
F. 배보다 배꼽
그나마 A/S를 받을 수 있는 경우는 행복한 거다. 거래명세서가 없으면 A/S가 불가하거나 치명적인 부분이 고장나 살릴 수 없는 경우, 제품이상으로 보상판매를 해 준다고 했지만 인터넷의 가격보다 훨씬 높은 경우, 수리비와 새 물건의 차이가 별로 없는 경우, 사용하다 고장났으니 소비자 과실로 밖에 볼 수 없다는 경우 등등 A/S관련 뉴스만 살펴봐도 슬픈 이야기들이 보인다. 항의하다가 "이상스럽게 까칠하다"라거나 "우리 회사도 보험팀이 있으니 소송하든 맘대로 해라."라는 이야기를 들은 전설들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품 받아서 열어본 이야기들은 계속 올라 오고, 무슨무슨 체험단 식의 글은 쏟아진다. 이벤트를 하면 엄청난 칭찬 댓글이 달려있고, 평점등은 올라간다. 그 이야기들을 보며 모니터를 구입했지만 몇달 후 그 회사는 망했고 난 모니터 AV보드와 아뎁터를 돈 주고 구매해야 했다. 뭐, 나야 이런 일이 한 두번이니 아니니 그러려니 하지만 비슷한 일들로 고통받고 있을 A/S피플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이야기의 끝을 "A/S에 투자할 기업의 돈을 제품을 더 잘 만드는 데에 쓰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따위로 맺어야 한다는 것이 마음아프지만, A/S피플이 늘어나는 이유도 바로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제품 때문이 아닌가. 어차피 쓰다보면 고장날 수 밖에 없는 숙명을 지닌 기기들의 한계도 있겠지만, 제품들이 본래 의도와는 다른 동작으로 인해 사용자의 인생을 좀 먹고 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여전히 주황색 램프만 점멸하는 프린터, 앞으로 벌어질 접수와 수리를 위해 잠시 꺼 두어야 겠다. 파격적인 카트리지 가격으로 유지비가 기존의 2배 이상 저렴하다는 제조업체 카페의 배너 아래, 이상증상을 호소하는 A/S 피플들의 불평과 카트리지를 바꿔보라는 일률적인 답변을 보며, "여기 제품 다신 사나 봐라."라는 인생 좀 먹는 소리가 들린다.
▲ 내가 끝까지 고쳐본다며 붙잡고 있을 터프가이들에겐 박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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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같이 지내실분, 이라는 구인광고에 낚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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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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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잉크 카트리지를 꺼내 면봉으로 닦아주세요.
2. 카트리지를 교체해 보세요.
2. 카트리지를 교체해 보세요.
뭐, 그들도 이런 이야기 밖에 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응급처치 후 같은 증상이 계속되면 A/S예약을 해 드리겠다는 그런 얘기. 낯설지가 않다. '내일 아침에 고객센터로 전화해 A/S예약 접수나 해야지.' 라고 생각하는데 인터넷 집전화 전화기의 5번 버튼이 잘 안 눌린 다는 게 생각난다. '뭐, 핸드폰으로 걸면 되는 거지.'라는 생각을 하고 음악이나 들으려 이어폰을 끼는데 삽입형 이어폰의 고무 부분이 툭, 떨어져 나간다.
니들, 혹시 A/S로 내 인생을 좀 먹을 작정이라도 한 거냐?
1. A/S와의 인연, 그 시작
고등학생 때 였다. 지금은 mp3플레이어 기능이 핸드폰에도 들어가 있지만, 당시엔 대부분 '워크맨'이나 'CD플레이어'를 들고 다녔다.
"삼촌 어렸을 때에는 인터넷이 없었다고?"
이렇게 묻는 조카 또래들은 국사시간 청동거울 얘기듣는 느낌이겠지만. 아무튼 난 일생일대의 큰 결심을 했고, 카세트에 mp3플레이어 기능이 합해진 최신형 워크맨을 구입했다.
떨리는 가슴으로 설명서를 3회 정독하고 열심히 조작했지만 mp3플레이어는 작동하지 않았다. A/S를 받을까 하다가 스피커 선을 꽂지 않고 소리가 안 난다며 A/S기사를 불렀다는 유머가 유행할 때라, 하루를 더 mp3기능을 사용하기 위해 워크맨을 붙잡고 있었다. 물론, 그 다음 날도 작동하지 않았다.
서비스센터를 찾았을 때, A/S기사는, 웃지 않는다고 며칠 전 심하게 혼이라도 난 듯 부담스럽게 계속 미소를 지으며 날 맞이해줬다. 날 어지럽게 만드는 '네~ 고객님~'이나 '고객님의 제품은~' 같은 얘기를 하며, 고등학교 1학년 학생에게 어른이 된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고객님이란 거... 좋은 거구나.'
친절한 상담 끝에, 기판이 잘못 되어서 수리를 했다는 얘기를 들었고 투명에 가까운 블루 플라스틱 속으로 mp3칩이 보이는 워크맨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당시 제일 좋아하던 2pac의 <I ain't mad at cha>라는 노래를 넣으려고 밤을 샜지만, 실패했다. 며칠 후 A/S를 한 번 더 받았지만, 역시 실패했다.
그닥 집요한 성격이 아니라 쿨하게 mp3기능을 포기하고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다. 일년이 지났을 뿐인데 mp3cd 플레이어를 대부분 하나씩 들고 다녔을 정도로 세상이 성큼, 발걸음을 내 딛었으니 늘어난 테잎을 냉동실에 넣는 일 따위를 하며 잊고 있었다.(이렇게 하면 늘어난 테잎이 다시 원상태로 돌아온다는 얘기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듣고 싶은 노래 파일을 얻게 되었고, 그걸 들으려면 mp3cd 플레이어나 mp3 플레이어가 필요했다. 내 워크맨에도 mp3 플레이어 기능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서비스 센터를 찾았을 때, 여전히 친절한 A/S기사가 웃으며 말해줬다.
"기판이 잘못 되었네요. 수리비 꽤 나올 텐데... 무상기간이 지나셨어요."
내 인생과 A/S의 궤도가 최초로 엇갈린 순간이었다.
2. A/S피플
성인이 된 후로 구입하는 물건들이 많아지며, 늘 그림자처럼 A/S가 따라다녔다. 나는 기계와 연관해서는 재수가 좀 없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대부분 구입해던 물품들이 '특별한 경우'를 만들어 냈다. A/S기사들 조차도,
"그런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 일인데... 아무튼 센터로 방문해 보세요."
이런 이야기를 할 정도로 많은 에피소드가 있었다. 집에서 핸드폰 신호가 잘 잡히지 않아 중계기를 설치했을 때, 여전히 먹통인 핸드폰을 보며 설치기사는 "제 껀 잘 잡히는데... 핸드폰을 바꿔보세요." 라는 얘기도 했고, 컴퓨터 수리점에서는 "이건 왜 그런지 저도 모르겠네요." 라는 말도 들었다. 인터넷 접속 문제로 우리집을 찾았던 기사는 "계속 방문해도 상태가 그대로네요. 해지해도 위약금 안 무실 거예요." 라는 얘기를 해 주었다.
어쩌면 초자연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A/S불가의 상황을 겪으며, 나는 나와 비슷한 A/S피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난 뽑기 운이 없다."라는 좌우명을 가지고 있었으며, 로또만큼의 확률로 불량품이나 이상제품에 당첨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로또에 당첨된 사람들은 꿈이라도 꾸었다지만, 이들에게는 그저 막연한 "설마 이번에도..." 같은 염려가 전부였다. 그리고 그 예상은 틀림없고 말이다.
나 역시 A/S를 거듭하며 복근이 단단해 졌다. 컴팩트 디카를 샀는데 동영상 촬영이 안 되었을 땐, 뭐 그럴 수도 있다며 너그럽게 넘어갔고, SD카드(카메라메모리)이상으로 찍은 사진에 줄이 쫙쫙 가거나 USB가 곧 폭발할 것 처럼 뜨거워 지는 이상증상을 보였을 때에는 "역시 정확하군."따위의 흐뭇한 웃음까지 지었다.
지금 쓰고 있는 핸드폰의 배터리 넣는 캡을 뾰족한 것으로 벗이기 전까지는 절대 버튼만 눌러서 열리지 않는 다는 것이나, 선물받은 손목시계의 좌측 하단 버튼이 다른 버튼과 달리 손톱까지 사용해 힘껏 눌러야 작동하는 것, 컴퓨터를 몇 시간 사용하면 저절로 멈추는 일이라든가(나더러 좀 쉬라고 권하는 것 같음) 이사간 집은 꼭 수압이 약한 것, 자동차의 RPM이 1단에서 미친듯이 올라갔던 일 등등 열거하자면 이 끝 없는 이상증세를 이젠 여유로운 마음으로 이해하는 단계까지 접어들었단 얘기다.
다른 A/S피플들 역시 많이 길들여 진 것으로 보인다. 카메라 렌즈가 AF를 못 잡고 계속 버벅거려도 그저 "그 품은 원래 그래요." 따위의 충고를 하는 사람도 보이고, "국산이 다 그렇죠, 뭐"라는 얘길 하는 사람도 보인다. 지구본이 국산이라 기울었다는 수십년 전의 유머가 생각나는 슬픈 일이다. 그럼 이 A/S피플들을 더 슬프게 만드는 일은 뭐가 있을까?
3. A/S피플을 슬프게 하는 것들
우선, A/S로 인해 고통받는 모든 이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한다. 혹자는 A/S때문에 발생하는 일은, 머피의 법칙과 연관된 심리적 요인이 크다고 신용카드 요금청구서 같은 얘길 하겠지만, 난 뒤로 넘어졌는데 코가 깨진 듯한 여러분들의 마음을 알 것 같다. 귀에서 뽑아내려던 삽입형 이어폰의 이음새가 힘없이 두동강 났을 때의 그 심정 말이다. 토닥토닥 하는 심정으로 몇 가지 슬픈 이야기들을 할까 한다.
A. 잘 작동하는데요?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 가? A/S기사가 방문하거나 서비스센터를 찾으면 방금 전까지 메롱상태였던 기계가 정상으로 돌아온다. 양치기 소년의 기분이 된다. 경기도 고양시에 사는 P군(31세,무직)은 이런 일을 방지하고자 서비스센터에 들어가기 전 스스로 고장을 내다 고객과실로 유상수리를 경험한 적이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B. 이런 증상은 처음 인데요?
집에서 귀신을 봤다는 사람 취급을 당한다. 귀신 얘기야 사람들이 귀를 세워 들어주기라도 하지만, 제품에 관한 이야기는 용의자 취급을 당할 뿐이다. 이젠 서비스센터에 방문할 일이 있으면 먼저 "이런 일은 처음이죠?" 라고 묻는 A/S피플도 생겨났다. 이미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는 대답을 들으면 '내가 졌군..'이라고 생각하는 부작용을 겪으며 말이다.
C. 택배로 보내주세요.
급한 일이 있어서 구입했는데 정상작동하지 않을 때, 내 경우 집에 프린터가 있지만 프린터가 인쇄할 생각을 하지 않아 PC방이나 친구집을 찾아야 하는 상황엔 여전히 울컥한다. 마우스 교체 후 예전 마우스를 버렸는데 새 마우스가 작동하지 않을 때, A/S를 받으려면 마우스 들고 찾아오거나 택배로 보내라는 얘길 듣고 주변에 남는 마우스를 구하며 역시, 울컥한다.
D. 뭐 그거 가지고 그래?
남의 이야기는 늘 쉬운 법이다. 핸드폰 충전이 제대로 되질 않아 책 사이에 끼워 놓고 각도를 맞춰줘야 깜빡임 없이 충전이 될 때, 그 불편함을 주변에 얘기하지만 속 좁은 사람 취급을 당하는 일이 있다. 인터넷이 되어야 업무를 볼 수 있는 데 서비스가 되지 않을 때, 겨우 몇 시간 접속 안되는 걸로 뭐 그렇게 성화냐는 말을 들을 때 판도라 행성으로 가고 싶어진다. 더욱 슬픈 건 A/S피플들 조차 다른 A/S피플의 일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거다.
E. 그는 왜 차를 부쉈을까?
얼마 전 차량이상으로 몇 번이나 항의했지만 별대른 대안 없이 유별나거나 까칠한 사람 취급을 당한 A/S피플이 대리점 앞에서 차를 부순 일이 있었다. 이처럼 A/S는 인생을 좀 먹는다. 더군다나 한 번 이상증상을 나타낸 기기가 아무리 A/S를 받아도 같은 증상을 반복할 때, 분명 그 당사자의 정신은 피폐해진다고 생각한다.
F. 배보다 배꼽
그나마 A/S를 받을 수 있는 경우는 행복한 거다. 거래명세서가 없으면 A/S가 불가하거나 치명적인 부분이 고장나 살릴 수 없는 경우, 제품이상으로 보상판매를 해 준다고 했지만 인터넷의 가격보다 훨씬 높은 경우, 수리비와 새 물건의 차이가 별로 없는 경우, 사용하다 고장났으니 소비자 과실로 밖에 볼 수 없다는 경우 등등 A/S관련 뉴스만 살펴봐도 슬픈 이야기들이 보인다. 항의하다가 "이상스럽게 까칠하다"라거나 "우리 회사도 보험팀이 있으니 소송하든 맘대로 해라."라는 이야기를 들은 전설들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품 받아서 열어본 이야기들은 계속 올라 오고, 무슨무슨 체험단 식의 글은 쏟아진다. 이벤트를 하면 엄청난 칭찬 댓글이 달려있고, 평점등은 올라간다. 그 이야기들을 보며 모니터를 구입했지만 몇달 후 그 회사는 망했고 난 모니터 AV보드와 아뎁터를 돈 주고 구매해야 했다. 뭐, 나야 이런 일이 한 두번이니 아니니 그러려니 하지만 비슷한 일들로 고통받고 있을 A/S피플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이야기의 끝을 "A/S에 투자할 기업의 돈을 제품을 더 잘 만드는 데에 쓰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따위로 맺어야 한다는 것이 마음아프지만, A/S피플이 늘어나는 이유도 바로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제품 때문이 아닌가. 어차피 쓰다보면 고장날 수 밖에 없는 숙명을 지닌 기기들의 한계도 있겠지만, 제품들이 본래 의도와는 다른 동작으로 인해 사용자의 인생을 좀 먹고 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여전히 주황색 램프만 점멸하는 프린터, 앞으로 벌어질 접수와 수리를 위해 잠시 꺼 두어야 겠다. 파격적인 카트리지 가격으로 유지비가 기존의 2배 이상 저렴하다는 제조업체 카페의 배너 아래, 이상증상을 호소하는 A/S 피플들의 불평과 카트리지를 바꿔보라는 일률적인 답변을 보며, "여기 제품 다신 사나 봐라."라는 인생 좀 먹는 소리가 들린다.
▲ 내가 끝까지 고쳐본다며 붙잡고 있을 터프가이들에겐 박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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